고정순 작가가 전하는 묵직한 위로
고정순 작가의 그림책은 언제나 깊은 울림을 줍니다. 처음 읽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다시 읽을 때 마음을 건드리기도 하는데, 오늘 소개해드려고 하는 작품들이 바로 그런 책입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 깊숙한 곳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킵니다.
『나는, 비둘기』는 평범한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 비둘기는 나무에 내려앉다가 반짝반짝 빛나는 전구에 날개가 걸리고 맙니다. 이 날이후 비둘기는 다시 하늘을 날 수 없게 됩니다. 다른 새들보다 먹이를 찾는 것도 느리고 불편하지만 비둘기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걷습니다. 걸으면서 벌레가 많은 곳과 음식 찌꺼기가 있는 곳도 찾게 되지요. 비둘기는 눈먼 늙은 쥐에게도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줍니다. 생쥐는 비둘기에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날개로 날 수 있기를 기도하지요.
비둘기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골목을 돌다가 그만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한쪽 발목을 잃게 됩니다. 다리 하나로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비둘기. 그러던 어느 날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비둘기의 목에 감기게 됩니다. 비닐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쥐 아저씨가 말씀하신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날개가 아닐까?' 비둘기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높은 건물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하늘을 날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합니다. 남은 한 발을 굴러 있는 힘껏 뛰어오르는 비둘기. 그렇게 하늘을 나는 비둘기를 마지막 장면으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검은 봉지는 분명 비둘기의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짐입니다. 하지만 비둘기는 그것을 장애물이 아닌 멋진 날개로 받아들입니다. 상처와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하늘을 날겠다는 의지를 품은 채로, 검은 봉지를 쓰고 과감하게 뛰어내립니다. "나, 난다." 비록 끝이 보이는 여정일지 모르지만 용기 있게 뛰어내리는 그 장면은 처연하면서도 빛나도록 아름답습니다. 상처와 결핍, 불편함을 안고도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는 그 모습이 참 뭉클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저 비둘기처럼 봉지를 걸친 채 살아갑니다. 전구에 날개가 걸려 다치고, 유리에 다리를 베이기도 하면서 남들보다 늦거나 부족한 모습이라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불행은 또 다른 가능성으로, 결핍은 새로운 날개로 변합니다.
작가님의 다른 작품『가드를 올리고』도 비슷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책에는 복싱선수가 등장합니다. 산을 오르듯 고단한 길을 걸으며 길을 잃고 헤매고, 계속 맞고 쓰러집니다. 링의 모퉁이에서 홀로 넘어져 포기할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바람이 부는 곳까지만 가보자."라고 말이죠.
결국 마지막 순간, 그는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다시 한번 더 가드를 올립니다. 이 장면은 영웅적인 승리가 아니라, 흔들리고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서려는 인간의 끈질김을 담고 있습니다. 그 여운은 오래도록 남아 어쩔 수 없이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펼치지만 결국 같은 주제로 수렴합니다. 넘어져도, 불편함이 있어도, 끝내 우리는 스스로를 일으켜야 한다고 말이죠. 나아가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는 넉넉한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사고를 깰 수 있게 만드는 기회도 찾아옵니다. 한 권의 그림책 속에 이런 깊이 있는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저도 자주 넘어지곤 합니다. 다시 일어서는 게 두렵기도 합니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을 때도 찾아옵니다. 그러나 책 속 주인공들은 넌지시 보여줍니다. 해석을 달리 한다면, 작은 다짐 하나를 붙잡을 수 있다면, 꿈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날 수 있고 맞설 수 있다고. 그렇제 조용히 독자의 마음에 묵직한 위로를 건넵니다.
『가드를 올리고』에 나오는 마지막 문구가 오래도록 울림을 줍니다.
"오늘도 일어서는 당신에게."
고단한 하루 끝에 이 글귀를 다시 떠올린다면, 언젠가 우리도 봉지를 날개 삼아 날아오를 수 있지 않을까요? 바람을 맞으며 다시 한번 가드를 올릴 수 있지 않을까요.
때때로 나를 일으켜준 이름 모를 권투선수에게, 오늘도 검은 봉지를 멘 채 하늘을 바라보는 누군가에게,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서려 애쓰는 모든 당신에게, 이 그림책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비둘기』에 나타난 '인지 재구성(Cognitive Reframing)'애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검은 봉지를 장애물이 아닌 날개로 인식하는 비둘기의 모습은 인지행동치료의 핵심 개념인 '관점 전환'을 완벽히 보여준다. 같은 상황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는 것이죠. 이는 아들러(Alfred Adler)의 개인심리학에서 말하는 '개인적 의미부여'와도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는 객관적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실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따라 감정과 행동이 결정됩니다.
『가드를 올리고』에서 보여주는 '회복탄력성(Resilience)'의 메커니즘도 흥미롭습니다. 복싱선수가 "바람이 부는 곳까지만 가보자"며 자신을 다독이는 장면은 '자기 연민(Self-Compassion)'의 실천입니다. 심리학자 크리스틴 네프(Kristin Neff)가 강조한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고 이해심 있는 태도를 취할 때 진정한 회복이 가능합니다. 또한 '작은 목표 설정'을 통해 압도적인 상황을 관리 가능한 단위로 나누는 것은 스트레스 관리와 동기 유지에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작품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의미 치료(Logotherapy)'적 요소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빅터 프랑클(Viktor Frankl)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고통 자체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 고통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견딜 수 있습니다. 비둘기가 자신의 결핍에 '날개'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복싱선수가 자신의 고난에 '성장의 여정'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아가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는 넉넉한 이가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사고를 깰 수 있게 만드는 기회가 찾아옵니다. 이는 '이타적 행동'이 개인의 심리적 건강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피할 수 없는 상실과 시련을 숨기지 않는 것, 고통과 상처를 숨기지 않고 인정하며 그 속에서 힘을 찾는 용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불행 속에서도 나를 보호하기 위해 가드를 올리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