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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말해요

김담곤 에세이

by 백일몽

눈치가 빠르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하나를 보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생각하는 것, 그런 가정을 하나 둘 견고하게 만드는 것, 그 가정에 맞게 대비하는 것. 이게 어떻게 보면 내 안정된 진화 전략이 아닐까? 물론 가정은 전부 망상에 불과하다.




ESS, 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 영어 그대로 해석하면 된다. 다양한 생명의 집합인 지구, 여러 위협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유의 진화 전략이 발달했다. 지금부터 말하는 과거 지구는 원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생명체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임을 뜻한다.


과거엔 서로 다른 종으로부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종마다 생존 전략을 선택했다. 야생에서 포식자를 만났을 때 대처하는 방법이 가장 적절한 예시다. 먹이사슬이나 피라미드란 단어를 필수 교육과정에서 들어봤을 것이다. 귀신 개미나 파리지옥 등등,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종끼리 다투고 공생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인간은 조금 다르다. 같은 종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견제하고 치고받고 싸운다. 남이 잘 나가는 것을 질투하면서, 때로는 저주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이 가장 소셜한 생명체란 사실을 부끄럽게 만든다. (물론 짝짓기를 위해 수컷끼리 경쟁하는 것도 있다만 여기선 제외하자)


과거와 현재 지구의 가장 큰 차이점은 포식자로부터 위험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인간이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오르면서, 지배적인 생명체가 돼 가면서, 자연의 섭리에서 탈출했다.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기 시작하면서, 위험이 사라지니 멋대로 지구를 주무르기 시작한다. 환경이 파괴될 걸 알면서, 다른 생명체가 피해볼 걸 알면서 계속 지구를 멋대로 휘졌는다.


계속 쓰다 보니까 삼천포로 빠진다. 오늘의 주제어는 인간의 환경 파괴가 아니다. 현재 지구에서 인간 개인은 고유의 생존 전략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집단으로부터, 어느 사회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만든 본인만의 규칙이다. 오늘은 내가 만든 생존 전략에 관한 얘기다.




바디랭귀지는 신체언어다. 길을 걷다가 갑작스럽게 외국인이 말을 건다면, 우리는 당황한다. 머리에 영어 단어는 가득하지만, 막상 꺼내려고 하면 생각나지 않는다. 최대한 몸짓과 손짓으로 언어를 대체한다. 신기하게도 의사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다.


Body langauage는 단순히 몸짓이나 손짓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여기엔 억양의 높낮이, 안면 근육의 사용, 눈동자, 이밖에 많은 것이 포함된다. 이런 섬세한 것을 관찰하기 시작하니 많은 것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서 밥 먹을 때 상대방을 보면, 상대방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물을 따라주고, 휴지를 건네주고 하는 모습에서 상대방의 동공이 커졌던 경험이 있다.


가까운 사람을 주의 깊게 살피면, 그 사람의 행동 패턴이 보인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무의식적으로 하는 게 있다. 만약 그 패턴이 깨지게 된다면, 십중팔구 심리적이나 육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을 것이다. 그런 날엔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자리를 피한다. 아니면 말을 적게 하거나, 장난도 치지 않고 거슬리지 않게 숨는다.


어느새 나는 상대방을 관찰함으로써 위험한 상황을 피하는 전략을 선택하게 됐다. 이게 내 ESS다.





사람과 대면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얼굴이다. 얼굴에 많은 정보가 달려있다. 느끼는 감정에 따라 안면 근육이 변한다. 『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에는 감정입자(emotional granularity)란 개념이 나온다. 이는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표현할 수 있는 스펙트럼의 범위를 뜻한다.


저자 리사 팰드먼은 실험자에게 다양한 얼굴 형태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상대방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선택하게 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험은 실패했다. 실험자마다 감정 입자의 범위가 달랐기 때문이다. 같은 사진을 보고 선택지를 고르지만, 실험자마다 선지를 고르는 게 천차만별이었다. 감정 입자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능력이기에, 실험 결과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밀리의 서재 무료 한 달이 끝났기 때문에 뒤 내용은 읽지 못했다.




병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독감이 유행하기 시작하니 병원 내 모든 사람은 마스크를 의무적으로 착용한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식별할 수 있는 바디랭귀지는 눈밖에 없다.


눈만 보고선 이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없다. 눈으로 내게 신호를 보내도, 하관이 어떤 구조인지 알 수 없다는 것, 결국 눈과 억양으로 상대방의 니즈를 파악해야 한다. 바디랭귀지 정보가 부족하니 다양한 경우의 수가 나온다. 이걸 계속 신경 쓰다 보니까 머리에 과부하가 온다.


어떤 사람과 대화할 때 눈살을 찌푸리길래 나한테 화가 난 줄 알았다. 이에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더 이야기해보니까 나한테 화가 난 게 아니라, 내 목소리가 작아서 "네?"와 같은 의미로 찌푸린 것이다.


이처럼 정보 수급처가 적어지니 의사소통에 문제가 오기 시작했다. 내 생존 전략이 진화적으로 안정한 것인지, 아니면 언젠가 벽에 부딪히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헤쳐 나가며 엉금엉금 기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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