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으로 맛보는 초기 자본주의
작년 7월 말부터 게임을 시작했다. 사실 어렸을 때부터 게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집에 데스크탑이 한 대 있었는데, 그건 큰 누나의 차지였기에 게임을 별로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항상 18시에 퇴근을 하니까, 누나는 그때까지 게임을 하다가 나한테 넘겨준다.
엄마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항상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어느새 날 컴퓨터 중독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심했으면 엄마는 방학 때 컴퓨터를 분해해서 부품을 숨기거나, 가지고 출근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억울하다. 난 두 누나에게 당하고만 살았다.
2000년대 후반부터 10년대까지 대한민국 사회에서 게임에 대한 인식은 어땠을까?
바닥이었다. 항상 언론에서 푸는 사건은 게임 중독자가 살인을 저지른 이야기, 게임 중독자 부부가 게임하다가 자식 밥을 챙겨주지 않아서 죽인 이야기 등등. '게임 중독자' 워딩을 강조하며 국민들에게 '게임'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심었다. 당장 '더 지니어스'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연예인 집단이 스타 프로게이머 홍진호를 왕따 시키고 지들끼리 협력하여 게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옛날 사람 중엔 게임을 좋게 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정부 의도와 반대로 대한민국 PC방 수는 천장을 모르고 솟아오른다. 어느새 게임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뽑을 수 없는 구성 요소 중 하나가 됐다. 게다가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들이 국제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위상을 날리고, 달러를 가지고 오는 모습을 보며 정부도 바뀌기 시작했다.
'아 돈이 되는 사업이구나' (물론 이건 내 뇌피셜이다)
그렇게 e-sports란 기괴한 단어를 만들었고 사업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궁금한 사람은, 한국이스포츠협회라 (KsSPA)를 검색해서 찾아보길 권한다.
세계에선 대한민국이 게임 잘하는 나라로 이미 유명하다. 이스포츠 강국이 맞다.
나는 이번에 Path of Exile이란 게임을 했다. 4개월마다 모든 재화 시스템이 초기화되고 새로운 리그가 열린다. 리그가 오픈하는 시간 3~4 시간 전부터 유저들은 게임에 접속해서 대기한다. 마치 리셀하기 위해 백화점 오픈런 하는 사람을 연상케 한다. 이들이 세네 시간 전부터 대기하고 있는 이유는 게임 중독자여서가 아니다. 아니 맞을지도 모르겠다만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다. 이 게임엔 작은 사회가 있고 경제 시스템이 잡혀있다. 굳이 따지자면 '초기 자본주의'에 해당된다.
4개월마다 초기화되니까 모두가 바닥부터 시작하게 된다. 모두가 노동자가 되는 거다. 아무것도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기회의 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노력만 하면, 시간만 투자하면, 열심히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사회다. 문제는 이 게임이 외국 기업의 게임이기에, 아시아인과 시차가 크게 맞지 않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초저녁에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오픈런 준비를 한다.
'초기 자본주의'가 가지는 가장 큰 문제점은 과잉 공급이다. 이 게임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해서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이게 조금 애매한 얘기지만, 정확히 말하면 화폐의 가치가 떨어진다. 오픈런을 하지 않고, 퇴근하고 잠깐 짬 내어 게임하는 유저는 인플레이션에 제대로 당하고 만다. 참고로 이 게임은 화폐란 게 없고, 모든 게 물물교환이다.
심지어 게임 아이템의 가치 또한 현대 사회처럼 바뀐다. 즉, 어떤 유저가 유행시키면 가격이 폭등하고, 시간이 지나면 감소한다.
이 작은 자본주의 게임에서 재미난 사실이 있다. 바로 공산/사회국가와 민주 국가가 공존한다는 것이다. 사민주의인 유럽 국가부터 시작하여, 러시아, 중국, 대만 등등. 참 재밌지 않나? 다양한 이념의 국민들이 모여서 모두가 프롤레타리아를 탈출하여 부르주아가 되기 위해 몸부림친다는 게.
초기 자본주의를 맛보지 못한 선진국 국민들은 신세계를 경험했다. 현실과 다르게 모두가 노력하면, 그에 상응하는 기댓값을 얻을 수 있는 사회. 정부의 시장 개입이 없기 때문에, 자유시장에선 시간 투자가 곧 부르주아의 지름길이다. 아마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걸, 게임에서 이룰 수 있다는 점이. 유저의 욕망을 자극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