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의 시작

어느 날 고아가 되었다 #5

by 마릴라 Marilla

가끔 TV나 유튜브 상담채널에 나오는 K-장녀의 사연을 접하곤 한다. 감정쓰레기통, 유별난 모녀에서 남이 되는 여러 사례들을 보며 상처받은 딸들이 동의하는 다수의 댓글과 함께 결혼하지 않은 상담자 혹은 남자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는 비판의 댓글도 부지기수였다. 그 당시 나는 후자에 동의했다. 그런 딸들이 있다고 하나 그것이 나의 일이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비밀이 없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고 친구들의 이름을 다 기억하고 불러주는 다정한 엄마라며 친구들이 부러워했고 공부하라는 잔소리대신 일찍부터 이성교제를 권장하는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다. 자식에게도 감사표현을 하고 선한 말을 하며 성실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으로 돈이 많으면 하나님을 모른다 할까 부자되기 싫다던 엄마를 어떤 위인보다 존경했다. 자기중심적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미련할 정도로 착하고 개인생활이 없는 사람이어서 늘 엄마가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아주 어릴 때 혈기왕성한 30대였던 부친은 엄마가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로 엄마옷을 꺼내다가 불태운 적이 있다. 삶이 팍팍했던 엄마가 교회를 위안삼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잠든 밤이면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빈예배당에 가서 나를 옆에 눕혀놓고 혼자서 기도를 하곤 했다. 집에선 덤덤하다가도 철야기도에서 대성통곡을 하며 우는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걷기 시작할 때부터 엄마의 슬픔을 알았고 자주 우는 딸이 되었다. 엄마의 표정을 살피고 엄마옆에 붙어 지내는 날이 많았다. 학교에 입학한 뒤 소풍날이면 엄마는 김밥을 싸느라 힘들었지만 어린 우리들은 들떠 있었다. 그 시절 엄마의 김밥을 떠올리면 원형이 아닌 네모난 모양에 요즘 김밥처럼 큰 크기여서 초등학생이 넘기기엔 목이 메었다. 성인이 되어 적은 속재료로 많은 양을 싸려고 그랬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론 슬픈 기억이 되었다. 우리가 애기일 때 너무 힘들어서 도망칠 생각을 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는 말에 엄마가 떠나지 않아서 내 인생이 덜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상처가 담긴 이야기는 친한 친구에게만 하는 비밀얘기 같았다. 그것이 쌓여 내 인생의 전반에 우울한 배경으로 깔리게 될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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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게 하는 남편에 대한 한탄이 위험한 것은 같이 사는 가족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는 남이 아닌 생활을 함께 하기에 매일 원망과 의심이 싹트고 이미 주입된 나쁜 이미지로 덧입혀져 경험보다 우선 각인된다. 그런 원망의 대상으로부터 엄마는 보호해야 할 대상이 되고 엄마의 감정을 먹으며 방패막이로 자란다. 오랜 시간 서서히 스미는 과정은 믿음이라는 이유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종교처럼 신념이 되고 신앙이 된다. 그렇게 미움을 심어놓은 엄마들은 어느날 말한다. 그래도 아버지를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자녀는 부모가 뿌린 씨앗대로 자란다. 고추씨를 뿌려놓고 상추로 자랐다고 탓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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