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층위에 대한 염라대왕과의 담의.
오늘도 어김없이 내 양쪽 귀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탑재된 이어폰이 매달려 있다. 출근할 때, 운동할 때, 통화할 때, 독서할 때, 심지어 구내식당에서마저 이어폰을 끼고 산다. 말이 노이즈 캔슬링(소음 차단)이지 실상은 주변음 All 차단이다.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고 내가 '듣고 싶은' 소리를 듣는다. 청각은 홀로 낙원으로 향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상적인 생활에서 듣는 행위는 내가 원하는 주파수만 청취하고 주변음은 흘려보내도 일상생활에 크게 지장 없다. 하지만 시각은 다르다. '본다'라는 행위는 인간 본질과 관련 있다. 이제부터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시각에 접목했을 때의 명칭을 내 맘대로 비전 캔슬링이라 칭하겠다(잡음 혹은 소음과 같은 뜻을 의미하는 단어가 시각에는 유독 없다). 사과 비전프로를 착용하고 비전 캔슬링을 설정한 뒤 내가 보고 싶은 화면만을 띄우고 일상생활을 시작하는 순간 벌써 어딘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그 상태로 밖으로 나와-밖으로 나오는 것 마저 어렵겠지만-딱 20분만 돌아다니면 그대로 검은 도포를 두른 사자들과 인사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염라대왕한테 가서 이렇게 고하겠지.
"억울합니다. 염라대왕께서 사과 비전을 아실지 모르지만 저는 단지 비전 캔슬링을 하고 돌아다니다 사고가 난 것입니다. 노이즈 캔슬링하고는 잘만 돌아다니는데 왜 인간은 비전 캔슬링을 하고 돌아다닐 수 없는 건가요. 이건 제 잘 못이 아닙니다. 인간을 이렇게 만든 창조주의 잘못입니다. 애초에 감각에 층위를 두시면 어찌합니까. 상위 감각과 하위 감각으로 지각되는 불완전한 인간의 체(觀)를 인식하지 못한 것이 죄라면 그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염라대왕이 말하길
"모르긴 왜 모르더냐. 요즘엔 생전의 죄를 비추어 보기 위해 이승의 요물인 사과 비전을 사용한다. 가만 보자 너의 죽음의 원인이 모꼬...... 어허 갈!!! 도로 한복판에 그냥 맨 몸뚱이로 뛰어들다니. 이건 자살로 봐도 무방하구나. 네 이놈을 어느 지옥에 보내야 할지..."
"대왕께서도 제 죽음의 목도를 시각으로써 살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째서 청각이나 그 외의 감각으로는 확인하시지 않으시나요. 차에 치이는 파열음, 몸의 조각에서 흘러나오는 피 비린내, 살을 찢고 튀어나온 슬개골의 서슬 퍼런 딱딱함 등, 다른 오감으로도 충분히 확인하실 수 있으셨을 텐데요. 염라께선 인간에게 감각으로 지각된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간과하시는 것 같습니다. 결국 제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입자가 아니라 제 머릿속에서 지각된 하나의 상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사바세계의 상을 단 한 번이라도 본 순간 우린 '구상'의 지옥에서 죽을 때까지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것을 보니 역시 내게 온 이유가 있구나. 넌 내가 관장하는 발설지옥(拔舌地獄)에서 죄를 뉘치거라."
"대왕님이 ‘불'처럼 분노하신 이유는 알겠습니다. 다만 제 억울한 얘기 잠시만 들어주세요. 방금 전 말하려다 못한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 합니다. 구상의 지옥이라 표현함은 인간의 오감이 감각신경을 타고 올라 특정 뇌 부위에 도달하고 개인적으로 지각된 것을 표현할 때 항상 시각적 표현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히사이시조- summer>를 듣고 나면 사람들은 '파도가 치는 듯하다.', '어릴 적 친구들과 공놀이하던 때가 생각이 난다.'와 같이 남들에게 내가 느낀 것을 시각적 표현으로 얘기할 때처럼 말이죠. 후각이라고 다를까요. 향수의 탑, 미들, 베이스 노트를 구성하는 재료들을 보세요. 대중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어떻게 적혀있나요. 머스크, 백합, 아이리스, 바닐라, 우드 등 시각적인 표현으로 되어있죠. 청량하다, 달콤하다, 촉촉하다 와 같이 표현할 수도 있지만 결국 그 단어를 쫓아가다 보면 구상과 맞닿을 겁니다. 촉각, 미각이라고 다를까요.
시각을 제외한 촉각, 미각, 청각, 후각은 전부 추상적입니다. 일부 추상화가들은 본인들의 그림이 추상화라 부르지만, 전 그것마저 미적 구상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시각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 캔슬링을 통해 제가 이 지옥에 떨어진 것 자체가 억울합니다."
"이상한 말을 정성스레 하는구나. 오감이 어떻고, 지각이 어떻고는 중요하지 않다. 각각 제 나름의 쓰임이 다른 것 아니겠느냐. 비전 캔슬링을 했으면 앞이 보이지 않으니 조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 네가 말한 내용은 너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들이라고 모두 사고가 나느냐. 오히려 더 조심하기 위해 시각 장애인 보조견, 흰지팡이 등을 이용한다. 너는 그저 너의 부주의로 인해 사고가 난 것을 남에게 돌리기 급급하구나."
"염라께서는 저승계 얼리어답터시니 가상현실을 아실 거라 믿습니다. 염라께서 옆 동네 변성대왕과 가상현실에서 게임 한판 하신다고 생각해 봅시다. 근데 이 가상현실을 이뤄주는 게임기가 약간 특이합니다. 어떠한 조건이 맞으면 현실의 오감을 전부 차단하고 게임 안에서의 오감만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일정한 뇌파를 조작해서겠지만, 게임 안에서는 정말 이곳이 현실인지 상상인지 알 수 없습니다. 자 이제 게임 안에 들어온 변성대왕을 봅시다. 아이고... 어떡하죠. 게임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있고 모두가 변성대왕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염라께서는 진짜 단 하나의 변성대왕을 골라내야 하는데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내 어차피 지옥 갈 너의 장난에 맞춰주마. 당연히 변성대왕과 나 단 둘만 알고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캐릭터가 진짜 변성대왕 아니겠냐."
"그 둘만 알고 있는 사실이란 무엇인가요?"
"뭐 세상은 단 하나다 같은 불변의 진리부터 시작해 변성과 단 둘만 아는 얘기, 둘이 하던 게임, 둘이 먹던 음식, 둘이 듣던 음악과 같이 둘만 했던 특정 행위들이겠지."
"염라께선 그러한 사실을 떠올릴 때, 그때 느꼈던 청각이던, 촉각이던 상관없이 표상으로 된 순간의 시각적 이미지가 떠오르시진 않나요?"
"그런 것 같긴 하구나."
"흔히 된장찌개를 맛보고 '아 초등학생 시절 먹던 어머니의 손맛이 생각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된장찌개를 먹던 맛, 냄새 이런 건 발화되고 휘발됩니다. 다만 그때의 기억은 명확하진 않지만 어쨌든 구상적인 표상으로 남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얘기할 때 시각적으로 기억나는 얘기를 하게 되는 겁니다. 다른 감각은 휘발성이 크거든요. 그리고 방금 말씀하신 '세상은 단 하나다.'라는 말씀도 '세상'과, '하나'라는 단어에서 마저도 시각적 이미지가 바로 떠오르는 것처럼요. 여기서 저는 한 가지 의심을 하게 됐습니다. 선천적 시각장애인들은 꿈속에서 어떤 이미지를 보게 되는 것일까요."
"그야 시각적 자극이 없었으니 당연히 다른 감각으로 꿈을 꿀 듯싶은데. "
"맞습니다. 선천적 시각장애인들은 꿈속에서 무엇인가 '구상적'인 이미지를 보았다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비장애인과 비교했을 때 미각, 청각, 후각, 촉각으로 꿈을 꾸는 경향성이 크다고 말합니다. 우린 꿈을 꿀 때 바다라는 시각적 정보를 보지 바다의 짠맛을 느낀 적은 거의 없었을 것이고 생그러운 꽃을 보는 이미지는 있지만 그 꽃에서 꽃 내음이 나는 꿈은 일생을 살아도 드물 것입니다. 선천적 시각 장애인들은 꿈에서 향기를 맡고, 달콤함을 느끼고, 바람 부는 소리를 듣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추억을 얘기할 때도 시각적 정보를 통해 서로 공감적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다른 감각 정보로 통해 얻은 지각된 경험을 나눌 뿐이죠. 또한 일부 정신분석학적 해석에서 악몽은 생존을 위한 자기 방어기제라고 합니다. 악몽은 미래에 다가올 충격적인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구상해 정신적 충격을 완화시켜 줄 수도 있고 자신의 PTSD를 무의식에서 드러내 불안과 공포를 벗어나게 도와준다고 합니다. 이런 악몽마저 선천적 시각 장애인들은 시각을 제외한 감각으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생존을 위한 측면에서 꿈을 들여다봤을 때 비장애인들이 시각적 구상으로 악몽이 더 많이 제작되는 것은 무의식에서 마저 생존을 위해 더 많이 쓰이는 감각은 ‘시각’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각 장애인과 비 장애인이 꾸는 꿈의 경향성으로 보아 감각에는 층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결국 오감을 전부 지각할 수 있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시각적 정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꿈(무의식)마저 오감을 통해 의식한 감각들로만 만들어진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인간은 ‘내 감각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비트겐슈타인을 오마주 하며 너만의 아포리즘을 만드는 것을 보니 얘기가 꽤 길어질 것 같구나. 내 잠시 화장실을 다녀올 테니 다음화에서 이어나가자. 다만 다음화에서 내가 설득되지 않는다면 괘씸죄를 추가하여 그 새치혀를 더욱 길게 뽑아버릴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