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과 현실, 그 어딘가에서
“매화는 많이 피워 내고 오셨나요, 대왕님?”
“그래 매화틀이 가득 차서 혼났다. 내가 변소에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네가 말한 ‘감각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다’란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더구나. 그리고 오감에도 층위가 있다는 말도 어느 정도 이해는 했다. 다만 다시 본질적인 물음을 할 수밖에 없구나. 네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주장한 시각적 정보를 자의로 차단한 채 거리로 나가 생을 마감한 너의 죽음은 도리어 읍소하기 전보다 더욱 무거운 죄가 되었다. 시각이 중요한 것을 알면서 어떻게 그런 기각 막힌 짓을 할 수 있었지?"
“드디어 대왕님께서 제 얘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셨군요. 그럼 이제부터 제가 불가항력적으로 ‘그렇게’밖에 할 수 없던 이유에 대해 말씀 올리겠습니다. 방금 염라께 현실의 오감을 차단한 채 게임에서의 감각만 느낄 수 있는 가상현실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기억하시나요? 내가 게임을 하고 있다는 자각을 할 수 없다면, 어디가 현실인지 대왕께서는 알 수 있을까요?"
“마치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지’에 대한 장자의 호접지몽이 생각나는구나. 나의 모든 감각이 현실이라 말하는 ‘여기’를,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을 현실이라 믿겠지. 그리고 현실이라 믿은 그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겠지."
"대왕님 제 삶의 모토가 어니스트 허밍웨이의 작품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인물인 '노인'입니다. 노인은 고된 현실이 세상의 진실한 단 하나의 세계라고 생각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노인에겐 진실한 현실의 구분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앞에 놓인 고난과 역경의 계단을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뿐이었죠. 어떠한 상황에도 노인은 계단을 오를 것이고 노인은 그렇게 초인이 될 것입니다. 저도 노인처럼 현실의 구분과 상관없이 초인이 되는 것을 제 삶의 방향으로 삼았습니다. 그런 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를 이렇게 만든 조물주가 원망스러울 뿐입니다.”
“그래, 네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백여 년 전에 잠깐 스쳐갔던 색목인 친구인 니체를 떠오르게 하는구나. 모든 사람이 그 친구처럼 살았으면 나도 폐업한 저승에서 씨나락이나 까먹고 있었을 텐데... 어쨌든 너의 마음가짐은 알았다. 그렇다면 그런 태도를 가지고 도로 한가운데 뛰어든 연유는 무엇이냐. 왜 자꾸 애꿎은 너의 신을 탓하는 것이냐 ”
“좋습니다. 이제부터 말씀드릴 얘기가 길고 긴 제 변명에 최종장입니다. 부디 제가 말한 바가 길을 잃지 않고 대왕님께 도달하길 바랍니다. 염라께서는 요즘 학계에서 유명한 시뮬레이션 이론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알다마다. 저번에 어떤 괴짜가 놀라워하는 표정으로 내 앞에서 ‘와... 저승도 실제로 존재하는 거면 진짜 이 세계는 시뮬레이션일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이 정도 세계관을 구성할 거면 컴퓨터의 성능이 플랑크 시간과 플랑크 길이가 적어도…”라며 1시간을 쉬지 않고 주절거렸는데 그 친구 이름이 개도? 괘도? 아무튼 특이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내 시뮬레이션 이론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지. 시뮬레이션 이론은 ‘세계는 어떤 컴퓨터의 연산된 가상이다.’라는 핵심을 골자로 하는 이론이지”
“맞습니다. 시뮬레이션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의식마저도 컴퓨터의 연산으로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순간마저 어떤 것으로 계산된 가상이라면 지금을 살아가는 나는 의미가 없는 걸까요? 저는 당당히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가상현실이든, 영원회귀든, 이데아든 무엇이든 상관없이 다원적인 세계에서 다원적인 조건이 제시된 상태 그대로인 ‘나’로 살아가면 됩니다. 현실과 아닌 것이라는 이분법적 틀에서 벗어나 하나의 뭉뜨그려진 오브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비전 캔슬링을 했을 때 대왕님께서 생각하시는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가상현실에 하나의 오브제로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래 너의 말이 직관적이진 않지만 어느 정도 받아들여진다. 다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비전 캔슬링을 했다고 해서 다른 감각마저 차단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가령 네가 비전캔슬링 중이더라도 어딘가에 부딪히면 촉각을 통해 전방섬엽과 배측전방대상피질에서 고통을 느낄 터인데 그럴 때면 현실이 자각되지 않더냐?”
“대왕님께서 말한 그 사안이 제가 계속해서 창조주의 잘못이라 말하는 이유입니다. 인간의 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뇌는 수동적으로 지각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편집해 나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왕님께서 제게 호통을 치시며 앞에 있는 탁상을 손으로 내려쳤다고 가정해 봅시다. 감각이 반응되는 순서는 촉각-청각-시각 순이지만 대왕님께서는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 손과 탁상이 만나서 나는 소리, 그리고 그 장면을 보는 시각이 모두 한 번에 지각될 것입니다. 더 쉬운 예로는 손가락으로 발가락을 만져보시면 됩니다. 발가락과 손가락에서 올라오는 감각의 시간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는 하나의 사건으로 처리해 동시에 느껴지게 만듭니다. 또한 뇌는 하나의 예측모델을 통해 판단을 합니다. 가령 아르침볼도의 그림은 과일과 채소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린 사람의 얼굴 현상을 보게 됩니다. 인간은 실제로 지각하는 것보다 이미 만들어진 예측모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렇듯 뇌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완벽하지 않은 뇌는 오감 중 시각을 통해 많은 부분을 교정하는데 그중에서도 저는 기형적으로 시각적 감각이 발달해 있습니다. 그래서 비전캔슬링을 했을 때 시각적으로 지각된 구상들이 현실감 있게 다가왔고 현실과 가상이 흐릿한 상태에서 아까 말했듯이 오브제로서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 실제 현실에서의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이 뇌로 들어온다 한들 제 뇌는 시각적 감각에 의존해 다른 감각들의 지각도 가상현실에 일부로 느껴버렸습니다. 이것이 제가 조물주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예민한 시각적 감각을 느끼는 인간이 삶의 방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져서 발생한 사건이다 이거군. 그런데 이건 조물주의 책임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대부분의 인간은 네가 말한 대로 구상의 지옥, 즉 시각적 정보에 의지한 채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비전캔슬링을 해도 너처럼 행동했을까? 그런 사람은 없었지. 그래서 너만 내게 오게 된 거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비전캔슬링을 통해 본 시각적 세계가 가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기에 현실에서의 육체와 가상의 정보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지. 그래서 이건 인간의 뇌 혹은 지각 체계에 대한 문제로 보기보다 제조사의 부적절한 주의사항 안내와 개인의 확고한 신념이 강하게 응집되어 발생한 사건이라 판명한다. 공상과학 영화를 보면 통속에 들어가 가상현실로 들어가는 장면을 본 적 있지? 가상현실과 실제 현실에서의 공유하고 있는 뇌는 하나이므로 현실의 육체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지. 제조사에서는 비전 캔슬링을 할 때 꼭 갇힌 방에서 사용하거나 혹은 몸을 고정하고 사용하라는 주의사항을 안내했어야 했다. 또한 비전캔슬링은 시각적 감각을 조작하는 것이므로 시각적 정보에 예민한 사람들에도 주의하는 경고문을 제작했어야 했다. 그렇게만 했어도 네가 나를 이렇게 빨리 보러 오는 일 은 없었겠지. 다만 그런 주의사항이 없더라도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가상현실에서 벌어지는 일과 현실에서 겪는 일을 구분할 수 있지. 넌 가상과 현실에서 주어지는 정보를 너의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한 것이고 어떻게 보면 너의 확증편향적 해석으로 인해 사고가 난 것도 일부 맞다. 바로 발설지옥으로 보내기에는 사안이 복잡하구나... 단순히 자살로 끝날뻔한 사건이었으나 이번 사건은 앞으로 쏟아질 가상현실에 대한 문제점을 집어 볼 수 있는 귀중한 문제였다. 일단 내 머리가 아프니 이쯤 두어야겠다. 49일 재판을 다 받고 마지막 태산대왕에게 염라대왕과의 단판승부를 끝내고 오겠다고 말하고 다시 내게 와라. 그때까지 내가 본질에 대해 파악해 보마. 일단 너의 새치혀는 오롯이 네가 가지고 가거라."
-염라대왕 발설지옥편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