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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의 초록

오늘을 기념하며 적어 내려간 그날들의 기록

by 끌로드

늦여름, 녹음 아래로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뜨거웠던 여름날부터 시작된 나의 구애가 수줍은 너의 마음에 가닿은 계절. 그맘때쯤 우리의 온도는 한 여름만큼이나 뜨거웠다.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말마따나 그 시절 나의 시간은 너라는 변수로 인해 흐르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시야에 없다고 네가 사라지는 게 아닌데 나는 매 헤어짐마다 유배의 형벌을 견뎌 내야 했다. 형벌을 견디기 힘들었던 우린 버스와 지하철이 끊기길 속으로 바라며 아슬아슬한 시간의 곡예를 즐겼고 그렇게 쓴 택시비와 대리비만 한해 연봉이었지 아마…

우린 비슷하면서도 달랐기에 편안한 차이에서 오는 새로움을 즐겼다. 색이 다른 우리가 만나 오늘까지 함께할 수 있었던 건 너의 밝음이 항상 우리 관계를 향해 비추고 있어서이지 않을까.


인생을 음미해야 한다며 불안과 권태마저 꼭꼭 씹어 삼킨 내게 그럴 필요 없다며 따뜻한 마음으로 우울의 겹을 벗겨준 너였다.

소년 때부터 몸에 베인 이기적 이타심으로 하루하루 눈치 보며 살아가던 내게 그럴 필요 없다며 소중함의 가치를 다시 세워준 너였다.

소비에 인색한 내게 그럴 필요 없다며 유럽여행이라는 큰 결정을 옆에서 응원해 세계의 지평을 넓혀준 너였다.

‘그럴 필요 없어’라는 말은 인생에서 큰 위로가 되었다. 가끔은 ‘왜 그렇게 하는 거야’라던지 ‘이해가 안 되네’라는 약간은 의문을 가질 때가 있지만 그것마저 나를 사랑해서 나오는 관심의 언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어의 조각들은 하루, 한 달, 일 년 그렇게 차곡차곡 모여 너를 만나기 전보다 괜찮은 나를 만들었다.


그럼 나는 네게 어떤 존재였을까? 단단한 거목이 되어 네게 아늑한 품이 되어주고 싶었는데 우리 관계는 정반대였던 것 같다. 열렬한 사랑은 외려 지독한 내 존재를 꺼냈다.

남들에겐 내면의 가시를 숨기고 선택적으로 네게 돋쳐 안아주는 네 마음을 찔렀다.

쏟아 뱉는 말에 '악의'가 없다고 믿으며 네게 감정을 배설했다.

원래 나는 그런 사람이라는 이기적인 태도로 너를 지치게 했다.

너와 나는 다른 거라고, 틀린 건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저질러버린 언행의 파편들은 네 배려의 둑을 두드렸고 못내 둑은 쩌억. 그리고 그 사이로 사랑이 새어 나왔다. 흘러나온 사랑은 서리가 되어 차갑게 너의 마음을 식혀갔고 이러다 우리의 계절에도 겨울이 오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타오르던 사랑은 그렇게 갈무리를 하는 듯하다가... 다시 겨울에서 여름으로.


순환하는 계절 아래 우리는 나아가며 또다시 여름을 맞는다. 이제 여름은 우리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지만 달라질 건 없다. 다만 과거의 우리는 과거의 우리로 남겨두기로 마음을 먹으며 그들과 현재의 우리를 비교하지 않기로 했다. 발산하는 관계는 마무리 짓고 다음으로 넘어갈 차례. 맹렬히 타던 장작이 꺼져야 본연의 향이 공간을 채우듯 태워 버린 내 과거의 사랑을 뒤로한 채 이제는 본연의 사랑을 하기로 했다. 본질적 사랑을 위한 시작은 후회는 바위에 새기고 배려는 모래에 새기는 작업이다. 새겨진 후회는 네가 원하지 않는 모습들의 집합체. 기록된 오답지를 보며 관계의 해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배려는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이므로 대가를 바라지 않기로 했다. 너울진 파도에 쓸려 내려갈 수 있게 모래 위에 배려를 새겨 잠깐의 자기만족으로 끝내기로 했다. 반대로 너의 배려는 나의 후회와 같이 바위 위에 새겨 오랫동안 간직하기로 했다.


너와 나는 다르다. 앞으로 너의 다름을 배우고 다름 안에 너의 배려와 사랑을 느껴보려 한다. 지금까지 내 사랑의 방식으로 너에게 애정을 쏟았다면 오늘부턴 네 애정의 방식으로 사랑을 보여주고 싶다. 길고 긴 여정을 이렇게 한 걸음씩 발맞춰 가다 보면 우리의 커튼콜에 남는 마지막 관객이 서로가 될 것이라 믿는다.

오늘도, 내일도 모든 날이 열정의 초록 중 한 장면이 되길 바라며 편지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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