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선생님에게
일과 삶, 저울에 올려 균형을 이루는 삶이 중요한 가치가 된 요즘. 균형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도리어 올려야 할 추의 무게를 잊고 살았습니다. 인생이 무거워지는 게 싫어 가벼운 것들만 취사해 저울에 올렸는데 팀 활동 중 H선생님이 삶을 대하는 자세에 많은 귀감을 받고 그동안의 태도를 성찰하게 됐습니다.
전담간호사, 팀 활동 리더, 감염관리팀원, 가장, 엄마, 자부, 딸, 배우자, 제가 모르는 어떠한 것들...
주어진 역할마다 모습을 달리하며 살아가야 하기에 벅찰 수도 있지만, 선생님은 항상 웃으며 별일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별일 아니라고 말하면 별일인걸 알아 팀원이자 동료로서 도움을 드리고 싶었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변명에 미소로 답한 진실은 아마도 쓴소리의 손끝, 망설임의 떨림이었을 겁니다. 오롯이 힘듦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삶은 제게 슬픈 초상으로 느껴졌습니다.
웃음은 고됨을 숨기려는 하나의 방법이었을까요, 무거운 책임감의 추가 선생님의 입꼬리를 끌어내리던 5월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번아웃을 고백하셨습니다. 희생이 당연시되는 엄마로서, 희생이란 가치관이 방점인 직업으로서 살아내던 선생님의 시기에 권태와 피로가 몰려왔습니다. 누구에게나 권태는 오지만 선생님의 시간이 더 아프게 느껴진 건 본인을 태워가며 삶을 살아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서일 겁니다. 이제는 타버린 열정의 향기로 남아 은은하게 오래갈 수 있길 바랍니다. 이미 또 열정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만서도요.
무던히 자신의 길을 걷는 선생님 모습에서 초인의 뒷모습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홀로 모든 짐을 짊어지지 마시고 제게 나눠주시면 각고정려하여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올 한 해 최고의 리더를 만나 행복했습니다. 남은 반년도 잘 부탁드립니다.
-끌로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