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때 동료였던 간호사 K양을 위한 판결

'간호사 우'라고 네이버에 검색하면 '간호사 우울증'이 자동완성됩니다.

by 끌로드


네이버 검색창에 '간호사 우'까지만 검색하면, '간호사 우울증'이라는 자동 완성된 키워드가 검색창에 뜬다. 간호사라는 직업에 대한 애정이 있는 나로서는 용납이 되지 않아 다른 직업들도 검색해봤는데 간호사를 제외한 그 어떤 직업도 해당 키워드가 자동 검색되지 않았다. '간호사 우울증'을 검색창에 입력하니 스크롤을 한참 내려도 게시글 마지막에 도달할 수 없었다. 그만큼 많은 간호사들이 하루하루 힘들게 버틴다는 반증이겠지. 현재를 잘 살아가고 있다 갑자기 간호사 우울증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 이유는 얼마 전 지인 결혼식에서 일 년 전에 퇴사한 옛 직장 동료 'K'를 우연히 만나서이다.

K와 식장을 나와 조용한 가게에 들러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미화된 과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K가 문득 “나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 우울증이 심했어. 약도 먹고 많이 힘들었어.”라고 입가에 미소를 띠며 얘기했다. K는 늘 그렇게 힘들어도 미소를 뗬던 것 같다. 백열전구처럼 스위치가 켜져 있을 때면 환한 미소로 항상 주위를 밝게 비춰주던 K였다.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 전원이 차단된 K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럴 때 그녀는 작열 후 꺼진 필라멘트처럼 표정에 웃음기는 와해되어 희미한 미소만이 점멸하곤 했다.

“간호사로 일하면서 사람과의 관계가 많이 힘들었어.”K가 조용히 고백했다. 간호사는 감정 노동자, 소통하는 자, 조율자이기에 사람과의 갈등은 간호사와 불가분 하다. 평생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큰 갈등 없이 살아온 K에게 병원은 미지의 정글과 다름없었다. 사람과의 갈등으로 자신이 20년간 세워온 방어벽들이 하나, 둘씩 무너지다 마지막 남은 방어막인 '자애심'마저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애심이 사라지자 심연에 차곡차곡 묻어둔 불안, 권태, 우울, 걱정, 근심들이 스멀스멀 K를 좀 먹어 갔다고 했다. 피폐한 나날이 이어지던 날 출근길에 '그냥 차에 치여서 입원하고 싶다. 그럼 출근 안 할 텐데'라고 구체적인 생각을 했다 한다. 그땐 이 생각이 우울증 증상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차에 치이는 공상을 수십 번쯤 반복하고 있을 때 문득 하늘에서 빗방울이 내려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빗방울은 내 두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턱 끝에 맺힌 눈물이 되어 대지로 낙하해 산산이 부서졌다. 흩어지는 내 작은 것들을 바라보며 한 동안 그렇게 우둑허니 서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정신과 상담을 받았다. 상담을 받으며 사회적 지지체계니 회복 탄력성이니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아니했었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확실한 것은 텅 빈 공허 안에 모순적이게도 가득 들어찬 불안과 우울은 세로토닌을 정밀히 조절해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우울은 먹이 화선지에 퍼지듯 느리지만 명확하게 삶을 적셔나갔으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막연함으로 점철된 허무주의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허물어 나갔다. 환자의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키는 '파수꾼'의 삶과 죽음의 경계는 누가 지켜주는가. 제 역할 못 하는 파수꾼 시절 꾹꾹 눌러쓴 나만의 독백 중 일부를 발췌했다.


20대 중반의 나이, 철없고 겁 없던 시절의 단단한 패기로 외피를 두른 나. 걱정과 설렘이라는 양가감정을 앉고 부서에 첫 발을 딛다. 그리고 좌절. 누군가의 말마따나 단단할수록 쉽게 부서진다고 했던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감정들이 모습을 달리하며 외피를 뚫고 들어와 단전에 깊이 쌓여가고 있었다. 단전이 꽉 막혀 한 없이 답답한 상태. 그 맘 때쯤은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취업 전과 같은 양의 밥을 먹고, 같은 강도의 운동을 하고 같은 시간의 잠을 잤다. 체중이 5kg이 빠졌다. 그래서 입사 전과 같은 사람을 만나고, 같은 위로를 받고, 같은 사랑을 받았다. 불면증이 생겼다. 무엇인가는 계속해서 단전에 쌓여갔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눅진한 늪을 무던히 한 걸음씩 내디뎌온 내가 미련한 초인이지 않나 싶어”

과거를 회상하며 말하는 K의 얼굴에 처음 입사했을 때 순수했던 그녀의 환한 미소가 담겨있었다. 시간이 지나 많이 희석된 그때의 감정은 K가 수많은 선택들 사이 어떤 결정을 내려도 곱다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자양분이 된 것 같다. K와의 대화를 마치고 가게를 나섰다. '오늘 재밌었어. 병원 동기를 만나는 건 그 시절 나를 마주해야 해서 힘들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재밌고 행복했던 기억들만 떠오르네. 다음에 또 만나자. 안녕, 고마웠어' 다시금 환한 미소를 보이며 K가 말했다. 뒤돌아 가는 K의 뒷모습에서 경쾌하고 찬란한 빛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K에 대해서 얘기하다 갑자기 '나'로 주인공이 바뀌니 글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사실 앞에 기술한 모든 글은 K가 말한 경험담에 내가 겪은 얘기를 잘 버무려서 만든 수필과 소설의 사이에 있는 글이다. 내용은 전부 사실이나 어디서부터 K경험이고 어디서부터 내 경험인지는 눈치껏 넘어가면 감사할 것 같다. 이렇게 글을 구성한 이유는 특정 간호사만이 우울을 겪는 게 아니라 어떤 간호사(K라 칭하는)라도 불안과 우울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싶었다. 후성유전학적 관점에 따라 우울증이 잘 이환되는 DNA가 있지만 그 개체를 둘러싼 환경이 괜찮다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낮아진다고 한다. 반대로 비뚤어진 환경은 우울증 걸리게 하기도 한다. 병원이라는 환경에서 간호사 직업을 택해 일하는 순간 우울은 필연적으로 우리 삶에 다가온다. 고통받는 환자를 간호하는 우리, 지옥 같은 인수인계 시간, 타 직종과의 대립, 야간근무 및 교대근무, 감당 못 할 업무량 등 간호사를 택하면서 수반되는 고됨은 누구든 우울증에 걸릴 수 있게 한다. 다만 저마다의 삶을 지탱해 온 방식으로 버틸 뿐이다. 버티고 버티다 도저히 견뎌낼 수 없을 때, 그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너의 마음은 불안과 우울로 가득 차 발 디딜 공간도 없을 거야. 그러니 울어도 돼. 눈물은 떨어져 대지를 젖게 하고 스며든 눈물은 꽃이 되어 너를 기쁘게 해 줄 거야. 네가 불안과 우울로 피워 낸 꽃은 한땐 가시가 자라 널 아프게 하겠지만 떨어진 눈물만큼 더 아름답게 너를 다시금 피워낼 거야. 그러니 목놓아 울어도 돼'

먹물이 깊게 스며든 화선지에 나비가 날아들어 꽃이 될 순 없다. 다만 누군가의 따뜻한 한 마디, 오롯이 견뎌내 오던 시간, 낭만적 허무주의는 화선지의 크기를 키워 우울의 농담을 옅게 만든다. 어쩌면 삶이란 마음속 화선지를 키워나가는 과정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한다. 막연함이란 안개가 자욱한 도로에서 삶의 목적으로 향하는 길엔 에덴의 뱀이 선악과로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하지만 우린 아담과 이브가 아니다. 잘못된 길을 택해도 괜찮다. 처음 가시밭길을 걸을 땐 날 선 가시들이 내 몸에 박히지만 그 길을 다시 돌아 나갈 땐 이미 가시 빠진 장미만이 가득하기에 음미하며 갈림길로 돌아 나가면 된다. 그리고 갈림길 앞에 서서 행복으로 향하는 표지판을 읽고 새로운 여정을 떠나자. 아무렴 또 잘못된 길이면 어떤가, 이미 우린 삶을 즐기는 법을 배우지 않았나.

하루하루 불안과 권태, 안정과 행복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우리에게 판결 내린다.


-판결-

이 세상 모든 간호사 'K'에 대한 판결을 내린다. K는 앞으로 불안과 우울, 권태의 그늘에서 벗어나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사랑과 행복만이 가득할 것이며 또한......

keyword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