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볕이 드는 어느 창가에서 간호를 하며
Spinal tapping이란 요추천자로 요추지주막하강에 척수 바늘을 삽입해 뇌척수액을 받아내는 검사다. 받아낸 뇌척수액을 검사해 중추신경계 질환을 진단하고 그에 따른 치료를 할 수 있으며, 두개내압 측정 및 뇌척수압 상승 여부를 평가할 수 있다. 더 많은 시행 목적이 있겠지만 오늘 글의 핵심은 <중증외상센터> 백강혁 교수의 지도 편달이 아니므로 말을 줄이자... 요추전자를 수행할 때 간호사는 요추천자 시 척추 골간의 공간을 넓혀 의사가 바늘 진입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천자 후 검체를 받아내는 역할을 한다. 척추 골간의 공간을 넓히는 방법은 환자를 굽은 새우등 자세를 취하게 하는 것인데 그 자세로 바늘이 진입할 때까지 유지하고 천자가 되었다면 약간은 자세를 편하게 취할 수 있다. 검사 소요 시간은 일반적으로는 한 시간 내외나 길면 두 시간도 걸린다. 한 자세로 오랫동안 유지하는 건 검체를 받는 나도 힘든데, 하물며 몸 안에 정체 모를 가시가 자라 아픈 마음을 찌르고 밖에선 등에 서늘한 바늘을 꽂아 넣으려는 상황인 환자가 편히 누워 있을 수 있겠는가. 가끔 그들의 뒷모습에 위로를 바라는 초연함이 보인다.
'언젠가 그런 날'이었는데, 여러 번의 항암 과정으로 면역력이 낮아져 숨죽이고 기회를 엿보던 잠복 결핵이 활성화되어 여러 가지 검사를 받는 환자가 있었다. 그 검사 중 요추천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환자의 담당의사, 담당간호사가 시술에 관해 자세하게 설명하지만 보통 난 시술의가 오기 전 환자와 보호자한테 시행하는 검사 목적, 방법, 주의 사항에 대해 한 번 더 간단하게 얘기해 주는 편이다. 이때가 환자와 보호자와의 첫 대면의 순간이다. 첫인상은 3초 만에 결정된다는 흔해 빠진 얘기가 있듯 으레 이 순간 환자와 보호자가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려왔는지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어떤 보호자는 설명을 듣지도 않고 나가버리는가 하면 어떤 보호자는 환자에 대한 애정 어린 질문을 수없이 내뱉는다, 또 어떤 환자는 보호자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는가 하면 어떤 환자는 보호자에게 미안해 시술 동안 나가서 꽃이라도 보고 오라고 한다. '언젠가 그런 날'은 후자의 궤적을 그려나가는 부녀와의 만남이었다. 결핵은 공기로 전파되는 질병이라 환자는 음압이 유지되는 병실에 격리되어 치료받고 있었다. 병실 안 유기체는 아빠인 환자와 딸인 보호자 둘이 전부였고, 가끔 이방인들이 둘만의 공간에 들어와 환자를 치료하고 둘만을 남겨둔 채 도로 나갔다. 이방인인 내가 그 고요한 우주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달은 지구의 땀을 정성스레 닦아 주고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시술에 관해 설명을 하는 와중에도 딸의 손은 쉴 줄 몰랐다. 시술자가 요추천자를 하고 나서 나는 검체를 받기 위해 환자의 등을 바라보고 앉아 뇌척수액을 받기 시작했다. 환자의 앞에는 언제나 그렇듯 딸이 앉아있었다. 나도 딸과 마주 앉아있는 형국이었기에 딸이 내게 환자의 상태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하고 싶지만 시술 중인 내가 혹여 부담될까 말 못 하고 입만 달싹이는 게 보였다.
"나: 보호자분 궁금하신 거 저한테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다만 제가 환자분 상태에 대해 전부 아는 것은 아니라 아는 선에서 답변드릴게요."
"딸: 저... 아빠가 피검사를 나갔는데. 이번에 이러이러한 수치가 이상한 것 같아서요... 혹시 이 수치가 아빠의 병과 관련 있는 건가요? 논문을 찾아보니 상관없다고 하는 것 같기도 해서요..."
무참히 참패. 이 일을 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환자와 보호자는 이미 자기가 극복해야 할 병에서만큼은 백강혁 교수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 십 편의 논문, 최신 의료 동향까지 꿰찬 그들이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확신의 언어를 듣고 싶어서일지 않을까. 하지만 거짓말은 할 수 없어 "아이고... 그 수치가 병과 관련되어 있긴 한데 제가 그렇게 자세히까지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담당 간호사 선생님이나, 담당 교수님께서 더 자세히 알고 계실 거라 제가 나가면서 보호자분이 해당 사항 궁금해하신다고 전달해 드릴게요."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참 무지한 내가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딸은 그래도 감사하다며 환자의 땀을 쉴 새 없이 닦아 내고 있었다. 딸의 지극정성 한 효심을 보니 환자가 딸을 얼마나 사랑하고 예뻐했을지가 눈에 보인다고 말했다. 환자는 지금 자신의 상황으로 인해 창가 밖으로 보이는 만개한 벚꽃같이 예쁜 딸이 병실에만 있어야 하는 상황이 미안하고, 고맙고, 또 하염없이 미안하다는 말만 토해냈다. 아직 자기 눈에는 자그마한 딸이 본인이 없는 세상에 남겨지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며 목맨 목소리를 냈다. 분명 환자는 울고 있는데 흐르는 건 눈물이 아닌 땀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흘린 눈물로 눈물샘이 말라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기에 환자는 땀으로 슬픔을 흘리는구나. 딸은 아빠의 흐르는 슬픔을 알기에 묵묵히 아빠의 땀을 닦아 나가던 것이었구나.
무작위적인 시련 앞에 두 손을 맞잡은 부녀를 바라보며 어떤 말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나: 환자분 의료진들한테 어떤 말을 들을 때 가장 위로가 되시나요?"
"환자: 그냥 모든 것이 잘 되어간다고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냥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 것은 분명 아니기에 질문에 바로 답을 하지 못한 채 약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게 검사를 마무리했다. 물품을 정리하고 있는데 환자와 보호자가 오늘 시술도 잘 끝내주시고 얘기도 잘 들어주셔서 감사함을 표했다. 사실 난 그때까지도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그때 봄볕이 잘 드는 창가 너머로 벚꽃이 보여 "환자분, 내년 이 맘 때쯤에는 건강해져서 사랑하는 두 따님과 활짝 핀 벚꽃 길 산책할 수 있게 멀리서 바라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고요하고도 고요한 우주에서 조용히 퇴장했다. 저마다 위로를 받는 방식이 다르기에 모든 것이 다 잘 될것이라는 뜻이 닮길 수 있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대상과 함께하려는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이 가닿은 곳에 공감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오늘도 지구와 달이 행복하길 빌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