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살. 3학년 9반. 크래용:듣고 있을 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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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GOLDRAGON 곡:SUNO
우리 가족은 강아지를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어떤 가족은 여행을 좋아하고, 어떤 가족은 음악을 사랑한다지만, 우리 가족의 중심에는 언제나 강아지가 있었다.
내게 강아지란 존재는 초등학교 시절, 집 앞마당에서 같이 뛰놀던 믹스견 '비비'로부터 시작됐다. 그 뒤로도 내 삶을 스쳐간 강아지들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존재했고, 그 기억은 여전히 내 마음 어딘가에 남아 따뜻한 미소를 만들어낸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혼 전, 무려 세 마리의 마르티스견을 키웠다.
그러니 결혼하고 함께 반려견을 맞이하는 일은 어떤 고민도 필요 없었다. 그건 우리 부부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결혼 전부터 자녀 계획도 나눴다.
"한 명만 낳고, 그 아이에게 집중해서 모든 사랑을 주자."
현명하고 효율적인 계획 같았고, 현실적으로도 최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니, 계획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컸다.
딸은 형제자매가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했고, 혼자인 자신을 문득 외로워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우리도 조금씩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즈음, 잠시 공백이 있었던 반려견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다시 흘러나왔다.
그날은 그냥 마트를 다녀오던 평범한 날이었다.
"잠깐만 들렀다 가볼까?" 무심코 들어간 동네의 대형 펫샵.
처음엔 진짜 '그저 보기만 하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를 본 순간, 우리 모두는 숨을 삼켰다.
작은 몸집, 반짝이는 눈망울, 너무나도 차분하고 조용하게 우리를 올려다보는 그 눈빛.
딸아이와 내가 동시에 '얘다' 싶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마음을 모두 빼앗겨버렸다.
이름은 내가 붙여줬다. '크래용'.
색색의 감정을 채워줄 것만 같은 이름이었다. 딸아이는 강아지를 실제로 가까이 접한 건 처음이었다.
처음엔 조금 무서워하기도 했다. 손끝만 겨우 댄 채, 뒤로 살짝 물러서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잠깐'이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딸아이는 크래용을 꼭 껴안고는 한시도 놓아주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크래용'은 우리 딸에게 단순한 강아지가 아니라 형제 같은 존재가 되었다.
같이 자라며, 같이 뒹굴고, 같이 잠들었다.
어쩌면, 둘은 같은 시기를 함께 통과한 또래 친구 같았을지도 모른다.
'크래용'은 웰시코기란 견종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평생 아꼈던 바로 그 견종. 혹시 그 왕실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받은 걸까?
'크래용'은 자라면서 점점 더 당당해지고, 얌전해지며, 무엇보다 스스로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산책을 나가면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있는 듯 없는듯한 짧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사람들 있는 곳으로 자신을 일부러 끌고 가듯 걸었다. 누가 "어머~ 예쁘다~" 한마디라도 하면, 이 녀석은 주저 없이 자기 몸을 내주었다.
"관심받고 싶어요? 그런 건 나한테 맡기세요." 그런 표정이었다. 한 번은 가족 여행으로 반려견 동반이 가능한 글램핑장을 찾았다. 바비큐를 하기 위해 장작불을 피우고, 아내와 딸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나는 불 옆에서 땀을 흘리며 고기를 구웠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크래용'이 없다.
"얘 어디 갔지? 또 사고 쳤나 봐!" 모두가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려놓고, 이름을 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글램핑장에는 오솔길처럼 한 줄기 길이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지나야 만 개수대나 화장실로 갈 수 있었다. 그 오솔길 초입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뭔가 불안한 마음에 뛰어가보니...
그 한복판에, '크래용'이 앉아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평소보다 더 반듯하게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그 짧디 짧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아유~ 너 어디서 왔니~", "얘 좀 봐~ 너무 이뻐~ 왜 이렇게 얌전해~"
불러도 못 들은 척. 그 관심을 즐기고 있었다. 진정한 '관종'이었다. 웃기고도, 어이없고도, 사랑스러운.
그렇게 유쾌했던 '크래용'은, 어떤 날은 또 너무 의젓하고 다정했다. 딸이 감기 몸살로 몇 날 며칠을 앓았을 때였다. 우리는 맞벌이라 집을 자주 비웠고, 할머니가 잠깐씩 와서 봐주셨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참 신기하더라. '크래용'이 하루 종일 애 옆에 앉아서 꼼짝도 안 해."
우리가 없는 시간. 녀석은 딸 옆을 지키는 조용한 병동의 간호사를 자처하였다.
사료를 먹으러 가거나 용변을 볼 때만 자리를 비우고, 다시 딸 옆으로 와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건 본능이었을까, 아니면 마음이었을까. 그저 말없이, 묵묵하게, 다정하게.
그렇게 매일매일의 추억을 만들어나가던 어느 날, 제 몫의 밥그릇은 항상 깨끗이 비웠던 녀석이 사료를 반쯤 남겼다. 그리고 바닥에는 토한 흔적이 있었다.
"얘 또 까탈 부리네. 소화가 안 된 거니 크래용~?" 가볍게 웃으며 평소처럼 병원에 갔다.
늘 우리를 반겨주던 원장님의 표정이, 이상하게 굳어 있었다. 난 눈치가 빠른 편이다. 하지만, 그때만큼은 제발 아니길 바랐다. "암이에요." 설마 했던 그 한 마디가 가슴을 '쿵'하며 쳤고 뇌리 속에 박혔다.
다리 짧은 견종에게 종종 생긴다는 병. 치료를 시도해 볼 수는 있지만 예후가 안 좋아 기대하기 어렵고, 비용도 많이 비싸고, 치료 과정이 고통스럽단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보내는 게 맞다는 건가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선생님의 대답은 조용하고 단호했다. "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겁니다. 최대한 많이 사랑해 주세요."
남은 시간은 약 한 달.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넋 나간 사람처럼 망연자실했다. 그런데 '크래용'은, 이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밝고 명랑했다. 그 해맑음이, 더 아팠다.
우린 '크래용'과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했다. 최선을 다해 좋은 시간을 보내야 했고 또 그렇게 했다.
수의사선생님 이야기처럼 한 달이 다 지난 일주일정도 남겨두고 급격히 녀석의 목이 부어오르며 걷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자신의 죽음을 마치 아는 것처럼 비틀거리며 구석만을 찾아다녔다.
누군가 그랬다. 반려견들은 함께한 주인에게 자신의 마지막을 보이고 싶지 않아 구석만 찾아다니다가 홀로 가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다라고.
그날은 유독 이상하게도 구석만 찾아다니던 녀석이 거실소파에 앉아있는 내 앞에 힘없이 엎드려있었다.
직감적으로 느낌이 왔다. 방 안에 있던 딸을 급히 불렀고, 우리는 '크래용' 앞에 나란히 앉았다.
힘겹게 몸을 움직이려 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몸을 일으키려던 녀석은 다리에 힘이 없어 다시 엎어진 후 고개만 두어 번 힘겹게 들어 나와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푹하고 쓰러뜨렸다.
그게 나와 딸에게 한 마지막 인사였다. "가지 마~ 나 두고 가지 말라고~~ 아앙~" 딸이 울었다. 나 역시도...
우린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잘 가. 사랑했어. 정말 많이...' 난 눈을 감겨주었고, '크래용'은 빠르게 몸은 굳어갔고 식어갔다.
그렇게 우리와 6년밖에 함께하지 못한 '크래용'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 이후로 한동안 우리 가족은 서로가 '크래용'이란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금기어가 되었다.
그 우울한 시간의 터널을 우리 가족은 아주 한참이 지난 후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
'크래용'을 떠나보낸 후로 지금은 우리 가족과 함께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장모닥스훈트란 견종인 '심바'와 6년간 함께하고 있다.
지금은 어느덧 중학생이 되어버린 딸아이를 제일 잘 따르고 딸아이 역시 가장 사랑을 듬뿍 주는 사이다.
'심바'와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함께하려 한다. 그럼에도 가끔씩은 '크래용'이 떠오를 때가 있다.
딸아이도 뜬금없이 "오늘따라 크래용 보고 싶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난 '심바'에게 말한다. "너 이전에 크래용 이란 형이 있었어. 그 사랑 다 받고 있으니 넌 건강하게 '크래용' 몫까지 다 살아야 해~"라고.
때로는 한 생명이 우리 삶에 스며들어,
하루하루를 더 깊고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생명이 떠난 뒤에도
우리는 그 사랑을 안고 살아간다.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남겨진 기억은 오래오래 우리의 마음을 지켜준다.
그 사랑이 또 다른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아낸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