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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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GOLDRAGON 곡:SUNO
그 집에는 마당이 있었다.
마당 옆으로 화단이 있었고, 계절마다 다르게 꽃이 피고 졌다.
집 한켠엔 커다란 대추나무가 우뚝 서 있었고, 철이 되면 우리는 그 대추를 따 먹으며 가을을 느꼈다.
화단 옆에는 지금은 보기 힘든 장독대가 있었고, 엄마는 장을 담그거나 김치를 묻어두셨다.
엄청 큰 편은 아니었지만, 그 마당은 우리의 사계절을 품은 작은 세계였다.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초등학교 앞에서 그 시절 낯선 아저씨가 팔던 박스 안에 병아리를 50원에 사 와 방 안에서 애지중지 이뻐하며 꼭 너를 '닭'까지 키워주리라 이름까지 지어주며 맹세했지만 허무하게도 단 하루 만에 죽어버렸다.
작고 노란 생명이 내 손바닥 위에서 식어갈 때, 어린 나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화단 한 켠에 작은 무덤을 만들어 묻어주고, 며칠 동안은 무덤 앞에서 말도 걸고, 기도 해줬던 그때에는 어린 마음으로도 생명이라는 것이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처음 배웠던 순간이었다.
엄마는 가정의 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 재택부업을 하셨다.
일명 '와루바시'라 불리는 나무젓가락 포장이었다.
엄마는 반쯤 강제로 나와 누나들을 동원하셨는데, 일정량을 마치고 나면 늘 노동의 대가로 짜장면이란 특식포상을 내리셨다.
짜장면을 먹기 위해, 우리는 땀을 빼고 온몸을 비틀며 나무젓가락을 비닐에 넣고 고무줄로 묶고, 상자에 담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리 하기 싫고 억지로 시키던 엄마가 원망스럽기까지 했었는지.
하지만, 짜장면 한 그릇이면 다 잊혀졌고, 그 고단함은 결국 '그 또한 우리 가족만의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겨울이 오면 골목 끝쪽의 높은 언덕은 눈썰매장이 되었다.
어디서 주워왔는지도 모를 큰 플라스틱 조각이나 쌀포대를 타고 긴 비탈길을 미끄러져 내려오던 기억. 손발은 얼고 엉덩이는 까졌지만, 골목에는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함박눈이 내리던 날,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던 옆집의 태권도를 같이 다녔던 형과 눈싸움을 하며 겨울을 즐겼고,
새벽이면 연탄불을 갈기 위해 엄마가 나를 깨웠다.
"네가 후레시 좀 비춰줘야 돼."
그 말 한마디에 칼바람 부는 새벽, 나는 손전등을 들고 엄마를 따라 주방으로 연결된 뒷문의 좁은 철계단을 내려갔다. 그 컴컴한 연탄광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엄마는 어둡기도 했지만, 아마도 무서우셔서 나를 깨웠던 것 같기도 하다.(그런데 엄마는 연탄광에서 심심찮게 발견되었던 강아지? 만한 쥐들을 연탄집게나 슬리퍼로 때려잡으셨던 기억이 스쳐간다. 그때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누나들과의 기억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날, 중학생이 된 큰누나만을 위해 부모님은 큰맘 먹고 핑크색 ‘마이마이’를 사주셨다.
그 시절엔 누구나 가지고 싶었던 휴대용 미니 카세트.
작은누나와 나는 시기와 질투에 휩싸여 심술도 부렸었지만, 어느새 셋이 함께 방에 앉아 그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가수 이문세씨가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라디오 방송을 거의매일 듣곤 했다.
작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사연을 들으며 웃고, 울고, 잠들었다.
그때의 방송기술력은 지금과 달리 부족했을지 몰라도, 그 음악들은 우리 형제들의 감성을 묶어주는 끈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이층집과 함께한 동네에서의 행복했던 시간들은 흘렀고, 어느새 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치룬 첫 시험을 반에서 '5등'(참고로 그당시에는 한 반에 대략 52명 정도였음)을 했을 때 부모님께 선물로 받은 16비트 컴퓨터.
그날 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 기분을 지금도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컴퓨터를 바라보며 밤을 새웠고, 화면이 켜지지도 않은 상태에서도 그냥 마냥 좋았다.
부모님은 그 작은 성취를 진심으로 기뻐해 주셨고, 고생 많았다며 등을 두드려 주셨다.
그것은 단지 성적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나'를 인정해 주는 부모님의 방식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엄마, 아버지는 안방 하나에 내가 껴서 함께 자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방 한쪽을 막아 작은 미닫이문을 달아 '내 방'을 만들어 주셨다.
문은 허술했고, 방이라 하기도 애매했고, 바퀴벌레와의 동침도 피할 수 없었지만,
그 공간은 내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독립'이었다. 그방? 마저도 둘이 같이 방을 쓰던 누나들은 부러워했었다.
물론, 크고 작은 사고도 있었다.
어느 날엔가는 누나들 방에서 놀다가 이불장에서 뛰어내려 책상 모서리에 왼쪽 눈썹쪽을 부딪혔다.
조금만 빗나가 눈으로 떨어졌더라면 실명할 수도 있었던 지금까지도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있는 큰 사고였다.
피가 철철 흘러서 아버지가 날 등에 업고 오밤중에 병원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있다.
그때 누나들은 내가 장난치는 줄 알고 깔깔 웃다가, 피가 분수처럼 흐르던 나를 본 후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하게 옆에 있던 걸레로 내 얼굴을 덮어 지혈을 해줬다.
그 놀람, 울음, 허둥지둥... 그 모든 것이 지금은 그리운 기억이 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그 이층 집은 내 인생의 가장 진한 감정이 고스란히 스며든 공간이었다.
친구들은 우리 집을 부러워했지만, 부모님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집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잦은 사건 사고, 치안 불안, 그리고 점점 어려워진 집안의 경제 상황이 맞물리며
결국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해, 우리는 아랫동네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는 그 골목의 그리움과 기억에 다시 한번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곳은 재개발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마당도, 병아리를 묻어주었던 화단도, 대추나무도, 눈썰매를 타던 비탈길도 모두 사라졌고,
이젠 아파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기억이란, 추억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또는 아픈 기억이 있을지언정,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를 다독이듯 좋은 장면만 남겨둔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라 부른다.
나는 이 글을 쓰며 혼자 여러 번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무서웠던 기억조차 따뜻하게 떠오르고, 울던 날조차 아름답게 그려진다.
누군가 그랬다.
'치열한 현재의 삶을 살아가다 가끔씩 예전을 떠올리는 건, 그 시절의 사람들이나 장소의 그리움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때의 '나'를 그리워하는 것'이라고.
오늘 밤도, 잠들기 전 그 시절을 떠올려 보려 한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러다 보면 어쩌면 다시, 난 꿈속에서 그 골목을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353-22호'를 지나 골목어귀에 서있는 그때의 나를 향해. 그리고 나를 꼭 안아주며 말할 것이다.
"고마워. 소중한 추억들을 고이 간직해 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