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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성 쌓기: 도움은 일방이 아닌 쌍방입니다.

3부-나로 살아가기

by 기도집주인딸

중학교 2학년이 되면 혼자서 뭐든 척척 해내야 하는 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다 컸으니까 뭐든 혼자 해야지.”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여전히 혼자 못 하는 게 많았다.

예를 들어, 과자봉지를 뜯는 일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매일 한 번씩은 꼭 매점에 가는 중학생 나에게 봉지 뜯기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친구들은 ‘쫙’ 하고 한 번에 뜯어내는데, 나는 꼭 모서리만 뜯기거나 과자 반이 바닥에 떨어졌다. 결국 옆자리 친구에게 봉지를 건네며 말했다. “좀 뜯어줄래?” 친구가 한 번에 ‘쫙’ 하고 성공하면, 부러움 반 고마움 반 미안함 반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반이 아니라 3분의 2이지만 저렇게 쓰면 너무 T 같기래 편의상 반이라고 적었다.)

또 음료수 병 따기이다. (뚜껑에 왜 그렇게 힘을 줘서 잠그는 걸까? 제조사에게 묻고 싶다.) 손바닥이 빨개지도록 힘을 줘도 꿈쩍도 안 하는 뚜껑을 보고 있으면, 내 체력과 손 힘의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땐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부탁한다. “이거 좀 열어줄 수 있어?” 그러면 그 사람은 별일 아니라는 듯 ‘툭’ 하고 열어준다. 마치 내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라는 듯이.

그리고 무거운 교과서를 드는 학기 초가 떠오른다. (가뜩이나 학기 초라 우울한데.) 사회, 과학, 영어, 수학, 국어, 미술, 심지어 체육(이건 학생으로서 말하는 건데 미술과 체육 교과서는 아주 심각한 종이 낭비인 듯하다.)등 다양한 교과서를 받아 자리로 가야 한다. 그땐 정말 누군가가 “한 두권 들어줄까?” 하고 물어보길 기다린다.

이런 순간들이 계속 쌓이면서 나는 하나를 인정하게 됐다. 그래, 나는 혼자 못 하는 게 있다.

물론, 이런 부탁을 하면서 처음엔 마음이 불편했다. 괜히 민폐 같고, 내가 못나 보일까 봐 걱정됐다. 하지만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도움을 받는다는 건 단순히 ‘못 해서’가 아니라, 서로 기대고 살아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중요한 건, 나는 받기만 하지 않는다는 거다. 물론 과자봉지나 병뚜껑을 열어주는 건 못해도, 다른 방식으로 도울 수 있다. 예를 들어, 공부를 같이 하면서 모르는 문제를 설명해 준다든지, 고민을 들어준다든지. 누군가 내게 “고마워”라고 말하면, 그 순간만큼은 내가 무거운 가방을 들어준 것보다 더 뿌듯하다.

이렇게 도움을 주고받다 보면, 편리함보다 더 큰 게 생긴다. 바로 관계다. 내가 병뚜껑을 못 열어서 도움을 받았을 때, 단순히 ‘편하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마음속에 두게 된다. 나를 도와준 따뜻함이 오래 남고, 그 사람이 웃으면서 건네준 한마디가 하루를 버티게 한다.

중2가 되면 친구 관계가 예전보다 복잡해진다.(그냥 친하다에서, 잘 맞는 친구, 말만 하는 친구, 비밀을 나누는 친구로 갈라지는 시기다.) 그런데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는 조금 다르다. 뭔가 ‘하나의 팀’ 같은 느낌이 생긴다. 서로가 서로를 챙기고, 작은 부탁도 기꺼이 들어주는 사이. 그 안에서는 내가 부족해도 괜찮고, 그 사람이 부족해도 괜찮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이런 관계를 더 만들고 싶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 큰 시련이 올 수도 있다. 시험 실패, 꿈의 좌절, 예상치 못한 어려움. 그때도 지금처럼 누군가 내 옆에 서서, 무거운 가방 대신 들어주거나, 마음의 짐을 잠시 나눠 들어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있다면, 나도 내 최선의 사랑을 줄 것이다. (사랑이라 해서 거창할 필요는 없다. 그 사람이 웃을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주면 된다.)

결국,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내가 못 하는 일을 인정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걸 통해 나는 사람들과 더 가까워지고, 마음을 나눌 기회를 얻는다.

그러니까 앞으로 무슨 일이 와도 괜찮다. 나 혼자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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