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스페인 독감과 코로나19

루시를 찾아서: 동토 속의 바이러스, 집념의 시간

by 로리킴

"스페인 독감과 코로나19, 두 판데믹의 다른 응답"


2019년,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100년 전 유행했던 스페인 독감이 다시금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한 세기라는 시간 차를 두고 또 한 번 전 세계적인 팬데믹이 발생했지만, 인류의 대응 방식은 그만큼 크게 달라졌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스페인 독감의 주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바이러스의 정체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대응했으며, 어떤 과정을 통해 진실에 다가갔는지 살펴본다면, 앞으로 다가올 팬데믹에는 보다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스페인 독감의 이야기를 시작해보고자 합니다.



"억울한 그 이름, '스페인 독감'"


코로나19 초기 ‘우한 바이러스’라는 표현이 논란이 되었듯, ‘스페인 독감’이라는 명칭도 실상과 다릅니다. 특정 지역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남길 우려가 있어, 현재는 발생 연도를 붙여 ‘COVID-19’ 혹은 ‘코로나19’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명명 방식의 배경에는 스페인 독감(Spanish flu)의 사례가 있습니다. 스페인은 이 병의 근원지나 피해가 가장 컸던 국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이 붙으며 스페인에서 시작된 병이라는 오해가 생겼습니다. 실제로는 1차 세계대전 중 다른 참전국들이 언론 보도를 엄격히 통제한 반면, 참전하지 않았던 스페인에서는 독감에 대한 자유로운 언론 보도와 연구가 이루어졌기에, 결국 ‘오명’을 뒤집어쓴 셈입니다.


스페인 독감의 진짜 기원은 미국입니다. 정확히 누가 첫 환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 캔자스주의 포트 라이리(Fort Riley)가 시작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18년 3월 4일 첫 환자가 보고된 이후 단 3주 만에 1,000명이 감염되고 38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1918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적으로 5,000만 명 이상이 스페인 독감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이는 빠른 전파 속도와 높은 치사율을 보여주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미국 내에서만 약 67만 5천 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4년간 이어진 남북전쟁 사망자 수와 필적하는 수치입니다.

스페인독감.001.jpeg (좌) 포트 라이리의 모습과 (우) 죽음의 배라고 불리던, 미국에서 유럽으로 파병됐던 수송선

물론 우리나라도 이 재앙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록에 따르면, ‘무오년 독감’이라 불렸던 이 병으로 조선인 절반가량이 독감에 걸렸고, 100명 중 2명이 사망했다는 통계가 남아 있습니다. 빼앗긴 들녘을 휩쓸듯 전파된 바이러스 앞에서, 절망 속에서, 우리는 1919년의 만세운동을 외쳤습니다.



"언론의 침묵, 공포의 확산"


포트 라이리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신병을 유럽으로 파견하기 위해 미국에 설치된 신병 훈련 캠프였습니다. 비좁은 막사에 젊은 병사들이 집단 생활을 하면서 감염 피해가 더욱 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독감은 일반 감기와는 완전히 달랐는데, ‘3일 열’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3일 만에 체온이 급격히 상승하고 4일째에 사망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미국은 400만 명의 육군을 유럽에 파병했는데, 이 중 100만 명 이상이 이미 스페인 독감에 감염되어 있었고, 3만 명 이상은 전쟁터가 아닌 독감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군병원은 환자로 넘쳐났고, 민간 병원으로 감염이 확산되면서 스페인 독감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당시가 전시 상황이었기에 정확한 피해 보도는 제한되었습니다. 전쟁 사기 유지와 사회 불안 억제를 위해 부정적인 소식은 검열되었고, 이를 어긴 언론사는 20년간 출판 금지라는 중형을 받기도 했습니다. 언론의 부재와 질병 관리의 부실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는 치사율이 한때 20~40%까지 치솟았습니다. 봄에 시작된 바이러스는 가을에 변이 바이러스가 2차로 유행하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뉴욕에서 근무하던 한 의사는 “중환자실에 있던 환자들이 다음 날 아침 모두 사망해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유언비어와 헛된 희망들"


1918년 가을이 되면서 손 씻기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마스크 착용이 점차 의무화되는 등 초기의 민간 방역 조치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와 함께 각종 유언비어와 검증되지 않은 민간요법도 확산되었습니다. 코에 위스키를 바르면 낫는다는 이야기, 고용량의 아스피린을 복용하면 효과가 있다는 주장(실제로는 고용량 아스피린으로 인해 사망한 사례가 많았습니다), 퀴닌이 특효약이라는 믿음 등이 널리 퍼졌고, ‘독감 대응 우유’나 ‘특별 추출물’과 같은 의심스러운 제품들이 시장에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스페인 독감을 일으키는 ‘독감균’을 발견했다는 과학적 보고도 나왔지만, 당시에는 미생물학이 막 발전하던 시기였고, 이는 결국 잘못된 주장으로 판명됩니다. 당시는 현미경 기술의 발달로 현미경에서 관찰할 수 있는 세균(bacteria)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던 시대였고, 바이러스라는 존재를 인식하기도 전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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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독감의 폭풍이 지나간 후, 1935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현미경으로는 보이지 않던 ‘바이러스’라는 존재가 실체를 드러냅니다. 이 새로운 병원체는 스스로 증식하지 못하며, 반드시 다른 생물의 세포 안에서만 증식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후 바이러스 연구는 빠르게 진전을 보입니다. 대표적으로, 닭의 수정란에 바이러스를 접종해 배양하는 기술이 개발되며, 바이러스를 '배양'할 수 있게 됩니다.



"얼어붙은 증거를 찾아서: 과학자의 집념"


다시 찾아올지 모를 팬데믹에 대비하기 위해 1918년 인류를 휩쓸었던 그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정체를 정확히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 중요한 질문을 향해 첫 발을 내디딘 인물이 바로 요한 훌틴(Johan Hultin, 1924–2022)이었습니다. 1950년대, 스웨덴 출신의 대학생이던 훌틴은 미국 아이오와로 건너가 박사과정을 밟던 중 감염성 질환에 관한 연구를 시작합니다. 1951년 당시 27세였던 그는 1918년 스페인 독감 희생자들이 알래스카의 영구동토층에 매장되어 있다는 정보를 듣고, 북극에 가까운 외딴 마을인 브레빅 미션(Brevig Mission)으로 직접 향합니다. 이곳은 1918년 당시 80명의 주민 중 72명이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 비극의 장소였습니다.

스페인독감.001.jpeg 27세의 요한 훌틴과 70대의 모습

알래스카 현지에서 훌틴은 57구의 시신을 찾아냈지만, 기대했던 만큼 폐 조직 샘플을 얻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영구동토층 지역이라 사체 보존에 유리할 것이라 판단했지만, 실제로는 땅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조직이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고, 당대의 기술로는 바이러스를 분리하거나 배양하는 데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브레빅 미션은 약 400명이 거주하던 작은 마을이었으며, 훌틴은 시신을 최대한 정중하게 다루었습니다. 조사 후에는 직접 추도식을 거행하고, 새 관을 마련해 재매장하는 등 주민들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페인독감.001.jpeg 알래스카 미션 지방의 풍경과 1951년 훌틴의 팀

시간이 흐르고,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도 ‘그 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히려는 과학계의 노력은 계속됩니다. 특히 분자생물학의 눈부신 발전은 이 연구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옵니다. 1993년, 노벨상을 수상한 PCR(중합효소 연쇄반응) 기술이 등장하면서, 생물체가 살아 있지 않아도 극소량의 DNA 혹은 RNA만으로도 유전 정보를 증폭하고 분석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립니다. 이 강력한 도구를 들고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추적하기 시작한 인물이 바로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바이러스 병리학자, 제프리 토벤버거(Jeffery Taubenberger, 1961~)였습니다.


제프리 토벤버거는 미국 국방부 산하 병리학 기록보관소(AFIP)에 보관되어 있던 1918년 독감 사망자의 폐 조직 샘플에서 연구를 시작합니다. 이 샘플들은 당시 미군 군병원에서 사망한 환자들의 폐 조직으로, 포르말린에 고정되고 파라핀으로 밀봉된 상태로 수십 년간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이 보존 방식은 조직 구조를 보존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유전 물질인 RNA나 DNA를 온전히 보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토벤버거는 PCR 기술을 이용해, 이 손상된 조직 속에 일부 남아 있던 바이러스 RNA 서열을 증폭하는 데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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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렇게 확보한 유전 정보를 바탕으로, 1918년 인류를 휩쓸었던 독감 바이러스의 일부 유전자 서열을 최초로 복원합니다. 이 성과는 1997년 세계적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되며,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당시 밝혀낸 바이러스 서열은 전체 15,000염기쌍 규모의 인플루엔자 유전체 중 약 150~160염기쌍 정도로, 비록 제한된 양이었지만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특유의 유전자 서명이 명확히 드러나 있었습니다. 마침내, 1918년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팬데믹의 정체가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였다는 단서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나 토벤버거의 연구에도 비판은 존재했습니다. 샘플이 80년 넘게 포르말린 처리된 조직에서 추출된 것이기에, 그 안의 핵산이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었고, 분석된 유전자 조각이 과연 실제 1918년 당시의 바이러스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더구나 전체 유전체가 아닌, 매우 짧은 조각들만 분석한 결과였기에, 정보의 양이 지나치게 부족하다는 우려도 따랐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한동안 연구 현장을 떠나 있었던 요한 훌틴이 다시 등장합니다. 1997년, 토벤버거의 논문을 접한 훌틴은 즉시 그에게 이메일을 보냅니다. 그 내용은 간결하지만 결정적인 제안이었습니다. "제가 1951년에 찾았던 알래스카의 브레빅 미션, 그곳이라면 아직도 바이러스를 온전한 상태로 보존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다시 가보겠습니다."



"루시와의 만남"


토벤버거는 요한 훌틴의 제안에 즉각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훌틴은 더 간절했습니다. 이메일을 주고받은 바로 다음 주, 훌틴은 알래스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1951년, 27세의 청년으로 영구동토층을 처음 찾았던 훌틴은 이번에는 73세의 노학자로서 다시 한 번 북극의 냉기 속으로 향한 것이었습니다.

스페인독감.001.jpeg 72세에 알래스카 미션을 다시 찾은 훌틴

훌틴은 이미 마을 원로들과 깊은 신뢰를 쌓아두었고, 묘지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었으며, 현장 작업에 필요한 경험과 준비가 모두 갖춰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원주민들을 수소문하여 1918년 당시 사망자 중 체격이 크고 비만했던 여성의 묘를 찾습니다. 체지방이 많은 시신일수록 폐 조직이 냉동 상태로 잘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과학적 판단에 따른 선택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루시(Lucy)라고 직접 이름을 붙인 여성의 시신에서 폐 조직 샘플을 채취하는 데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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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라는 이름은 과학사에서 생명 연구의 전환점을 가져온 존재에 부여되는 상징적인 이름입니다. 인류 진화의 전환점을 보여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화석도 ‘루시’라 불렸고, 2014년 뤽 베송 감독의 영화 '루시' 또한 인간 지능의 진화를 모티프로 삼았습니다. 이 알래스카의 루시 역시 바이러스 진화와 감염병 과학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온 존재로 기억될 만합니다.


훌틴은 훗날 이 여정을 “내 인생 최고의 마무리 과학 여행" 이라고 회고합니다.


비만한 조직에는 포화지방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포화지방은 녹는점(고체>액체가 되는 그 온도)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온도가 높아져도 쉽게 녹지 않고 고체 상태를 유지합니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루시의 폐 조직은 녹지 않은 지방층에 덮인 채로 더욱 잘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알래스카의 차가운 땅과 포화지방의 물리적 특성이 만나, 1918년의 바이러스가 거의 80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1f926d2e-b57e-4022-bdad-8fb339b7ef5c.png 빽빽하게 채워진 포화지방산 (왼쪽)

루시에게서 채취한 샘플은 제프리 토벤버거의 연구실로 보내졌고, 이후 수년간의 정밀 분석 끝에 2005년, 마침내 1918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전체 유전체 복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유전자 서열이 모두 밝혀진 순간, 과학자들은 이 정보를 토대로 당시와 유사한 특성과 병원성을 지닌 활성 바이러스를 실험실에서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20세기 초 인류를 휩쓸었던 팬데믹의 실체가, 마침내 생명과학의 언어로 복원된 것입니다.

스페인독감.001.jpeg 되살아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


"과거에서 배운다는 것"


팬데믹은 주기적으로 인류를 시험해왔고, 그 파급력은 점차 커지며 발생 주기 또한 짧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2019년 코로나19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신속한 대응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바이러스의 정체는 신속히 밝혀졌고, 언론은 피해 상황을 실시간으로 공유했으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협력하여 대책을 세웠습니다. 빠른 백신 개발과 방역 전략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인류가 위기 속에서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요한 훌틴과 제프리 토벤버거처럼 수십 년에 걸친 집념과 끈기로 과거의 진실을 파헤친 과학자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팬데믹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지만, 과거를 철저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미래를 지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과학적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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