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항생제의 탄생

매독, 전쟁, 규제의 역사

by 로리킴


"약학에도 아버지가 있다면"


대부분의 학문에는 '아버지'라는 수식이 붙습니다. 요즘 교과과정에 이 개념이 여전히 등장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졌던 이 말이 지금은 꽤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어떤 사람이 이룬 업적이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때 붙는 상징 같은 표현이 아닐까요? 마치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치듯 말이죠.


저는 20년 넘게 '약학'이라는 분야에 몸담아 왔지만, '약학의 아버지'에 대해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막 약학을 공부하려는 분들에게 저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바로, 매독 치료제를 개발한 과학자 폴 에를리히(Paul Ehrlich, 1854-1915)입니다.



"매독의 시작과 그 악몽"


매독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1500년대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전파되었다는 가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이 감염병은 성관계를 통해 옮으며, 감염된 뒤 약 3주 내 초기 증상은 보이지 않거나 있어도 금세 사라지는 특성이 있어 감염 사실을 인지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감염 후 5~12주가 지나면 전신에 열이 나고, 손등이나 발등을 중심으로 발진이 생깁니다. 이 시기의 분비물에는 매독균이 다량 포함되어 있어 감염력이 매우 강해집니다. 이때 적절한 치료, 특히 페니실린을 투여하지 않으면 병은 점점 더 심각한 단계로 진행됩니다.


100년 전만 해도 매독을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없어 병이 3기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극심한 두통이 동반되고, 장기 손상과 함께 뇌에 염증이 생기며 정신착란이나 신경계 이상이 나타납니다. 결국 외형까지 변형되기 시작해, 매독 환자임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대표적인 증상이 ‘코 붕괴’인데, 콧날이 함몰되고 콧구멍이 썩어 들어가며 코끝만 남은 기형적인 모습이 됩니다.


이런 외형을 복원하기 위한 방법으로, 팔의 피부를 떼어 코에 이식하는 수술이 시도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노 노즈 클럽'(No-Nosed Club)이라는, 매독으로 코를 잃은 사람들이 만든 모임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늘날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불과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매독은 그토록 무시무시한 병이었습니다.



"고통스러운 병보다 두려운 것"


매우 고통스러운 병이지만, 더 문제가 됐던 건 환자들이 감염 사실을 숨긴다는 점이었습니다. 증상이 다양하고 애매하니 매독을 감추기 쉬웠고, 성병이라는 특성 때문에 사회적인 낙인을 두려워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 업턴 싱클레어(Upton Sinclair, 1878-1968)의 '결함 상품'(Damaged Goods)입니다. 젊은 남자가 약혼녀를 두고 외도를 하다 매독에 걸립니다. 하지만 감염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생활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해 약혼녀에게 숨긴 채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습니다. 결국 그는 아내를 감염시키고, 갓 태어난 아기 역시 선천성 매독을 안고 태어나며, 아이를 돌보던 유모까지 감염됩니다. 자신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온 가족을 무너뜨린 셈입니다.


15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콜럼버스, 베토벤, 링컨, 고야 등 여러 역사적 인물들도 매독에 걸렸다는 의심을 받습니다. 명확한 진단 기록은 없지만, 증상과 기록을 토대로 가능성이 제기된 사례들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유럽 각국이 이 병의 이름을 서로의 탓으로 돌렸다는 사실입니다. 프랑스는 나폴리와의 전쟁 중 퍼졌다고 하여 ‘나폴리병’이라 불렀고, 이탈리아는 ‘프랑스병’이라 불렀습니다. 영국, 독일, 스페인도 매독을 ‘프랑스병’으로 지칭했고, 폴란드는 ‘독일병’, 터키는 ‘유럽병’, 네덜란드는 ‘스페인병’이라고 부르며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아시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매독을 ‘서양병’ 또는 ‘남만병’, ‘양매창’이라 불렀습니다. ‘매’라는 단어가 포함된 것은, 병이 진행되며 피부에 퍼지는 발진이 매화꽃처럼 생겼기 때문이라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매독은 단순한 질병을 넘어, 사회적 편견과 문화적 인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하나의 거울 같은 존재였습니다.


"치료가 아닌 고문 같은 치료"


항생제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매독을 '몸속에 쌓인 독기'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열을 내고 땀을 흘리면 병이 몸 밖으로 빠져나간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의학 지식으로는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진심이었습니다.


실제로 20세기 초에는 매독 환자에게 말라리아를 일부러 감염시키는 치료법도 사용됐습니다. 말라리아가 유발하는 고열로 매독균을 죽이려는 시도였죠. 이후 퀴닌을 투여해 말라리아를 치료하는 방식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사망률이 15%에 달할 만큼 매우 위험했습니다. 매독균은 고열에 약하긴 하지만, 42도 이상의 체온이 되어야 죽습니다. 그런데 인체는 42도 이상의 열을 견디지 못하고 장기가 손상되기 시작합니다. 말 그대로, 병을 고치려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치료였던 셈입니다.


오랫동안 매독 치료에 사용된 또 다른 방법은 수은이었습니다. 수은을 투여하면 땀과 소변이 많아지고 열이 오르니, 병이 빠져나간다고 여겼던 거죠. 수은은 당시 ‘치료의 상징’처럼 여겨졌지만, 실상은 치명적인 독성 물질이었습니다. 장기 손상, 신경계 장애, 피부 궤양, 치아 손실 등 심각한 부작용이 뒤따랐고, 매독보다 수은 중독으로 사망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수은은 오랫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됐습니다. 알약으로 삼키고, 시럽으로 마시고, 연고로 피부에 바르고, 주사로 맞기도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변기에 앉힌 채 수은 증기를 쐬게 하기도 했죠. 이러한 치료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기에 부자들만 받을 수 있었고, 가난한 환자들은 아예 치료를 포기하거나 민간요법에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이 아이러니를 비틀어 표현했습니다.


“밤에는 비너스, 낮에는 머큐리”

(Venus by night, Mercury by day)


밤에는 쾌락을 좇고, 낮에는 수은으로 고통받는 삶. 금성은 사랑과 쾌락, 수성은 수은(mercury)을 뜻하는 이 말속엔, 당시 매독이 가져온 고통과 사회적 현실이 모두 담겨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독성 치료법은 18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도 꾸준히 사용되었습니다. 페니실린이 등장하기 전까지, 그것이 최선이자 유일한 선택지였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법이 된 낙인, '성병'과 여성 통제의 역사"


매독이 단순한 질병을 넘어 사회 문제로 확산되자, 여러 나라에서는 이를 통제하기 위한 법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방향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무척이나 편향적이고 인권침해적인 방식이었습니다.

1864년, 영국은 '전염병법(The Contagious Diseases Act)’을 제정합니다. 이 법에 따라 경찰은 매춘부로 의심되는 여성들을 체포하고, 등록시킨 뒤 강제로 신체검사를 하고 격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성의 동의는 필요하지 않았고, 한번 등록되면 낙인은 평생 따라다녔습니다. 매독이라는 질병을 막는다는 명목 아래, 사회는 여성의 몸을 통제했습니다.

비슷한 방식은 미국에서도 시행됩니다. 1918년, ‘아메리칸 플랜(The American Plan)’이라는 이름으로 성병 예방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그 대상 역시 여성뿐이었습니다. 감염이 의심되는 여성은 영장도 없이 강제로 검사 되고, 격리 및 구금될 수 있었습니다. 감염 사실이 없더라도 “비도덕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법안은 남성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습니다. 여성 혼자서 성병을 옮길 수는 없는데도, 법은 늘 여성의 몸에만 주목했습니다. 특히 가난과 생계의 벼랑 끝에서 매춘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던 여성들은 이중으로 고통받았습니다. 사회는 그들을 구제하기는커녕, 다시 병원으로, 감옥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해골에 의상만 갖춘 빈곤한 여성이 두 신사에게 "저와 함께 올라가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라는 대사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같은 법률들은 심각한 인권침해로 여겨지며 철회됩니다. 영국은 1886년 전염병법을 폐지했고, 미국도 1950년대 들어 아메리칸 플랜을 공식적으로 중단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 수많은 여성들은 감시당하고, 낙인찍히고, 목소리를 잃은 채 살아가야 했습니다.



"현미경 아래 춤추던 균, 매독균"


매독 치료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바로 ‘매독균’의 발견에서 시작됩니다. 1905년,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 연구소에서 세균학자 프리츠 샤우딘(Fritz Schaudinn, 1871-1906)과 피부과 의사 에리히 호프만(Erich Hoffmann, 1868-1959)은 매독 환자의 피부에서 가늘고 긴 나선형의 세균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세균은 은색으로 빛나며, 미세하게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특징을 보였습니다.


두 연구자는 이 세균에 ‘Spirochaeta pallida’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스피로케타’는 나선형 형태를, ‘팔리다’는 창백한 색(염색이 잘 되지 않는 특성)을 뜻합니다. 이후 20세기 초 재분류 과정을 거치며, 이 세균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Treponema pallidum(트레포네마 팔리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606번의 시도 끝에, 살바르산"


균을 발견했다면, 이제 남은 일은 ‘균을 죽이는 법’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다음 단계에서 등장한 인물이 폴 에를리히(Paul Ehrlich, 1854-1915)입니다. 그는 세균 염색 기술의 선구자이자, 현대 약물 설계 개념의 창시자 중 한 사람입니다. 에를리히는 “어떤 염료는 특정 세균에만 염색된다”는 사실에 착안해, “그 염료에 치료약을 붙이면 특정 세균만 선택적으로 공격하는 약을 만들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웁니다.


그는 염색약 성분에 비소(arsenic)를 결합한 수백 가지 화합물을 합성하며 실험을 거듭했고, 마침내 1907년, 606번째 실험 화합물에서 효과를 발견합니다. 이것이 바로 Compound 606입니다. 만약, 605번째 실험에서 포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이 약물의 치료 효과는 1909년, 에를리히 연구소에서 함께 일하던 일본인 과학자 히타 사하치로(秦佐八郎, Sahachiro Hata, 1873-1938)에 의해 입증됩니다. 그는 실험용 토끼에게 매독균을 주입한 뒤, 606번 화합물을 투여해 매독 증상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합니다. 과학이 마침내 매독과의 싸움에서 한 발 앞서 나가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이 약물은 1910년, 살바르산(Salvarsan)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출시됩니다. ‘구원의 비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살바르산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디자인된 약물’이었고, 매독 치료에 실질적인 효과를 보인 첫 번째 화학요법제였습니다.



"구원의 약이 되기까지, 집요했던 반복"


살바르산은 매독 치료의 획기적인 전환점이었고,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습니다. 인류는 처음으로, 이 질병 앞에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죠. 하지만 치료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살바르산에는 여전히 중대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 약물은 비소를 포함하고 있었고, 수용성이 낮아 정맥 주사하기 어려웠으며, 화학적으로 매우 불안정해 보관이 까다로웠습니다. 간 손상, 신장 기능 저하, 두통과 구토 같은 부작용도 빈번했습니다. 치료 효과는 분명했지만, 환자의 몸은 여전히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폴 에를리히(Paul Ehrlich)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한 ‘발견자’가 아니라, 더 나은 약을 찾아가는 ‘약물 개발자’이자 철학자였습니다. 에를리히는 살바르산 이후에도 수백 가지 실험을 이어갔고, 마침내 1911년, 914번째 화합물을 개발합니다. 이 약은 살바르산보다 독성이 낮고, 수용성이 높아 주사하기 훨씬 용이했습니다. 이 새로운 약물은 곧 ‘네오살바르산(Neosalvarsan)’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되며, 1912년 이후 살바르산을 대부분 대체하게 됩니다.


에를리히는 약물 부작용에 대한 보고를 직접 수집하고, 사망하는 1915년까지 이를 세심히 기록했습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그 과정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그 집요한 노력이 또 다른 연구로 이어졌고, 현대 약물 개발의 근간이 되는 사고방식을 남겼습니다.


만약 약학의 ‘아버지’를 한 명 꼽아야 한다면, "'미생물을 쏘는 마법의 탄환'이라는 자신만의 철학"을 실천한 폴 에를리히야말로 가장 적합한 인물일 것입니다. 이 개념은 현대 약학에서 말하는 '표적 치료제'의 시초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삶과 연구는 1940년 할리우드 영화 'The Magic Bullet'으로도 제작되며, 과학자의 집념을 알리는 계기가 됩니다. 그는 단지 병을 고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안전하고 정밀한 약물로의 진보를 추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치료제들도 진화를 거듭합니다. 1세대, 2세대, 3세대를 거쳐 점점 더 정교하고 부작용이 적은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런 흐름은 약 100년 전, 폴 에를리히가 처음 실현해 낸 약물 설계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느낍니다.

워너 브라더스에서 제작된 1940년 영화 포스터와 영화의 모델인 폴 에를리히 (히타 사치히로와 함께)


"크리스마스에 도착한 생명의 신약"


살바르산은 분명 획기적인 치료제였지만, 매독을 완전히 정복한 약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병이 심하게 진행된 3기 매독 환자에게는 거의 효과가 없었고, 여전히 많은 환자들이 고통 속에 방치되었습니다.


한편, 1900년대에 들어서며 세균학이 발전하고, 병원균에 대한 분류와 특성이 점차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세균 감염에 대한 위기의식은 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거치며 더욱 절실해졌습니다. 전선에서는 수많은 병사들이 총과 포탄보다, 외과 수술 뒤 세균 감염으로 죽어갔습니다. 당시 19세 의무병으로 참전한 독일 청년, 게르하르트 도마크(Gerhard Domagk, 1885-1964) 역시 그런 참혹한 현실을 직접 목격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도마크는 뮌스터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뒤, 1927년 바이엘(Bayer)에 입사합니다. 당시 바이엘은 거대 화학기업 IG 파르벤(IG Farben) 산하에 있었고, 수천 가지 염료 화합물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도마크는 이 방대한 염료 화합물들을 활용해, 항균 효과가 있는 염료를 찾는 연구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가 주목한 병원균은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연쇄상구균(Streptococcus)이었습니다. 특히, 부상이 심하고 위생이 열악한 야전에서 잘 감염되던 균입니다. 도마크는 수천 개의 염료 중, 붉은 ‘아조 염료(Azo dye)’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아조는 ‘아닐린(aniline)’ 화합물의 질소 원자 두 개가 이중결합으로 연결된 구조로, 이 양쪽에 서로 다른 작용기를 붙일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도마크는 무려 3,000개가 넘는 변형 화합물을 실험하며, 하나하나 항균 활성을 확인해 나갑니다.

수년간의 인내 끝에, 드디어 KL730이라는 시료가 쥐 실험(in vivo)에서 연쇄상구균 감염을 억제하는 효과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붉은색 염료로, 아직 이름도 붙지 않은 이 화합물이 인류 최초의 상용 항생제, 바로 설파제(Sulfa drug)의 전조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1932년 12월 24일, 독일 바이엘 연구소의 실험실에서는 크리스마스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감염 실험용 쥐가 연쇄상구균에 노출되었지만, 도마크가 개발한 신약 KL730을 투여하자 감염 증상 없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세균은 죽고, 숙주는 살아남는— 바로 이 순간, 진짜 항생제의 시대에 접어듭니다.


다음날인 1932년 12월 25일, 도마크는 곧바로 이 화합물의 특허를 신청합니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찾아온 이 발견은 ‘프론토실(Prontosil)’이라는 이름으로 1935년 공식 출시됩니다. 같은 해, 도마크는 자신의 실험 결과를 담은 논문을 독일어로 독일 학술지에 출판하며 학계에도 이 발견을 공식화합니다.


이 발견은 곧 전 세계로 퍼지며 폭발적인 반응을 이끕니다.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단순한 실험 결과가 아니라,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 ‘실화’들이었습니다.



"생존자들"


첫 번째 생존자: 도마크의 딸


1936년, 도마크의 어린 딸은 실수로 바늘에 손가락을 찔립니다. 상처는 곧 연쇄상구균에 감염되어 괴사 하기 시작하고, 의사는 손가락을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합니다. 도마크는 마지막 수단으로 본인이 개발한 붉은 약인 프론토실을 직접 투여합니다. 딸의 손가락은 이내 완전히 회복되었고, 딸은 아무런 후유증 없이 회복되었습니다. ‘프론토실은 내 딸을 살렸다’— 도마크는 이 말을 남기며 약물의 가치를 직접 증명합니다.


두 번째 생존자: 루스벨트가 살아났다!


같은 해, 프론토실은 미국으로도 건너갑니다.

1936년 12월,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차남인 '미국의 황태자'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주니어가 파티 후 부비동염(Sinusitis)에 걸립니다. 영부인과 당시 여자친구였던 뒤퐁가 상속녀 에델 뒤퐁의 밤샘 기도에도 고열과 통증이 계속되자, 영부인은 급히 유럽에서 들여온 프론토실을 아들에게 투여합니다.

결과는 또 한 번 기적적이었습니다. 루스벨트 주니어는 곧 회복되었고, 당시 간호를 맡았던 에델 뒤퐁과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비록 이후 네 번의 결혼을 더 하긴 하지만요.)

대통령의 아들을 살린 약이라는 타이틀은 곧 미국 전역에 프론토실의 이름을 알리는 강력한 힘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생존자: 처칠


1938년,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모로코 방문 중 포도상구균에 감염되어 중이염과 폐렴으로 상태가 급격히 악화됩니다. 생명까지 위태로웠던 그에게 의료진은 프론토실을 투여했고, 처칠은 곧 회복됩니다.

그는 훗날, “이 빨간약이 나를 구했다”며 프론토실의 효능을 인정했습니다.



"억눌린 노벨상"


이 획기적인 발견으로 도마크는 1939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됩니다. 그러나, 당시 나치 독일 정권은 자국민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했고, 도마크는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웨덴에게 너무 공손했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체포되기까지 합니다. 그는 결국 수상을 강제로 포기해야 했고, 노벨상은 2차 대전 이후인 1947년에서야 메달과 증서가 수여됩니다. 늦게 받은 상이었지만, 그의 연구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프론토실은 설파제(Sulfonamide)의 계열에 속하며, 이후 설파피리딘, 설파메톡사졸 등으로 발전해 현대 항생제 개발의 결정적 단초가 됩니다.



"프론토실에 숨겨진 진짜 주인공"


프론토실은 분명 새로운 항생제였지만, 기묘한 미스터리 하나를 안고 있었습니다. KL730, 즉 프론토실은 생체 내에서는 효과적으로 연쇄상구균을 죽였지만, 정작 페트리디쉬 안, 실험실 배양 환경에서는 아무런 항균 효과를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이상한 현상은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연구는 빠르게 이어졌습니다. 도마크의 실험이 사기라는 의심도 제기되던 그때, 이 미스터리의 실마리를 푼 결정적인 연구가 프랑스에서 발표됩니다.


1935년, 프랑스 파스퇴르 연구소(Pasteur Institute)는 도마크의 프론토실 실험을 검토한 후, 결정적인 논문을 발표합니다. 그들은 “프론토실의 약효는 붉은 염료(아조기, -N=N-)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붙어 있는 ‘설폰아마이드’ 작용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놓습니다.


즉, 프론토실이 몸속에 들어가면, 간에서 대사 되어 염료 성분은 분리되고, 설폰아마이드만 남게 되고,

실제로 항균 작용을 하는 것은 바로 이 설폰아마이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아조 염료가 전혀 필요 없고, 설폰아마이드 단독으로도 약효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뒤이어 1936년, 영국의 연구팀도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실험을 발표합니다.

그들은 순수한 설폰아마이드가 실험실 배양 접시(in vitro)에서도 연쇄상구균을 성공적으로 죽일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 프론토실을 과량 주사한 뒤, 그 동물의 혈액을 배양 접시에 뿌리자 병원균이 사멸하는 현상을 관찰합니다.


이 결과는 프론토실의 ‘진짜 정체’를 드러낸 결정적 증거였습니다. 약효를 발휘한 것은 염색약이 아니라, 설파제 성분이었던 것입니다. 즉, 프론토실 자체는 시험관에서는 무력했지만, 몸속에서 설폰아마이드가 분리된 상태의 ‘활성 대사체(active metabolite)’는 시험관 안에서도 세균을 죽일 수 있었던 겁니다.


이로써 프론토실의 미스터리는 풀립니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프론토실의 붉은 염료는 오히려 쓸모없는 장식에 가깝고, 실제로 항생 작용을 했던 건 바로 그 하얀색 설폰아마이드 가루, 즉 ‘설파제’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프론토실은 전구체(pre-drug)였고, 그 활성 대사물이 진짜 주역이었던 셈이죠.


이 사실은 현대 약물학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프로드럭(prodrug)’ 개념의 시초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이 사건은 약리학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인체 내에서 약이 어떻게 대사되고, 어떤 형태로 작용하는지를 연구하는 ‘약물 대사학 (pharmacokinetics)’의 시초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는 제약 산업 전반에 “약의 구조를 분해해 본질을 파악하자”는 접근을 유도했고, 설파제 계열의 수많은 약들이 이후 빠르게 개발되며 현대 항생제 시대의 문을 열게 됩니다.



"전쟁 속 하얀가루, 설파제"


비싸고, 붉은 염료로 옷과 피부를 물들이던 프론토실과 달리, 설파제(sulfonamide)는 값싸고 흔히 구할 수 있는 약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곧 수많은 제약사들이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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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yal Society of ChemistryRSC AdvancesFebruary 20133(20)DOI:10.1039/c3ra22290j


전 세계 제약사들은 설폰아마이드의 기본 구조에 조금씩 변형을 준 다양한 설파 항생제를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이제 누구든, 어디서든, 더 쉽게 만들 수 있고, 더 싸게 공급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 하얀 가루는 2차 세계대전의 전장을 바꾸는 결정적인 무기가 됩니다.


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은 모두 작은 알약통이나 드레싱 가루, 또는 파우더 제형으로 된 설파제를 지급받았습니다. 적의 칼에 베이거나 총탄 파편이 살을 찢었을 때, 병사들은 즉시 상처에 하얀 설파제 가루를 뿌렸습니다. 당시 야전에서 상처 감염은 곧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였고, 설파제는 이 감염을 사전에 막아주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오늘날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부상병에게 흩날리는 하얀 가루를 본다면, 그 대부분은 설파제가 살포되는 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이러니한 진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연합군의 수많은 생명을 살린 설파제의 원조가 바로 나치 독일 진영의 IG 파르벤(IG Farben)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프론토실의 개발도, 설폰아마이드 구조의 실용화도 모두 독일 바이엘(Bayer)과 그 모회사인 IG 파르벤의 연구진이 만들어낸 것이었죠. 이 기업은 나치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대표적인 군수, 화학 기업입니다.


즉, 연합국 병사들을 살린 ‘하얀 생명의 가루’는 적국에서 태어난 셈입니다. 전쟁은 잔혹했지만, 그 속에서 태어난 약 하나는 국경을 넘고 이념을 넘어 많은 생명을 살리는 데 쓰였습니다.



"설파제의 그림자에서 태어난 FDA"


설파제는 기적의 치료제였지만,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부비동염처럼 어린이에게도 흔한 질환에서는 약물의 제형 문제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설파제는 물에 잘 녹지 않았고, 시럽 형태로 만들기 위해 용해도가 높은 용매가 필요했습니다.


1937년, 미국의 한 제약사는 설파제를 다이에틸렌글라이콜(Diethylene glycol)에 녹여

‘설파제 엘릭서(Sulfanilamide Elixir)’라는 제품을 출시합니다. 문제는 이 다이에틸렌글라이콜이 독성이 강한 산업용 화학물질이었으며, 오늘날에는 부동액 성분으로 잘 알려져있다는 점입니다.


당시에는 이 용매가 사람에게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어떠한 독성 평가나 승인 절차 없이 유통퇴었습니다. 그 결과, 이 제품을 복용한 107명이 사망했고, 대부분은 어린아이였습니다.


하지만 이 제약사는 법적 제재를 받지 않았습니다. 당시엔 안전성 검증에 대한 법적 기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엘릭서’라는 단어에 알코올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단지 라벨 위반 벌금만 부과됐을 뿐입니다. '엘릭서'라는 용어는 알코올 함유 제품에만 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미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마침내 1938년, ‘식품·의약품·화장품법(FD&C Act)’이 제정됩니다. 이 법은 의약품을 판매하기 전, 안전성을 반드시 입증해야 한다는 최초의 규제였고, 훗날 FDA(미국 식품의약국)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오늘날의 의약품은 임상 1상, 2상, 3상이라는 철저한 검증과 절차를 거쳐야만 세상에 나올 수 있습니다.



"여전히 찾고 있는 마법의 탄환"


항생제는 인류의 수명 연장과 관련하여 가장 큰 역할을 한 주인공입니다. 항생제가 없던 시절에는 부비동염만으로도 사망하는 수순이 당연했지만 요즘은 폐렴까지도 감기 정도로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오늘 얘기드린 살바르산, 설파제 모두 여러분께는 친숙하지 않은 항생제일 겁니다. 세균은 진화하고 있고, 내성을 계속 발현하고 있기 때문에 인류는 계속해서 다른 항생제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세균,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우리는 손해도 보지만 늘 이겨왔고, 지금도 많은 과학자들이 이기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마법의 탄환(Magic Bullet)’


이를 찾기 위한 여정은 100년 전 폴 에를리히가 시작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여정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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