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희는 하얀 피부를 가졌다. 그 피부만큼이나 마음도 편견 없이 하얗기만 하다.
안된 사정을 알면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고, 자신도 바빠 죽겠어도 짬을 내어 친구일을 봐준다.
어느 날, 거래처와의 통화를 엿듣던 사장이 통화를 마치자 또 잔소리를 한다.
"뭔 통화가 그리 길어요! 업무 얘기만 하지"
하고 돌아서서 나가버린다.
사람도 없는데 일처리를 빨리빨리 하라는 사장의 마음이야 알겠지만, 선희가 일을 펑크 낸 적은 없다.
동결된 박봉에도 회사와 결혼했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자신의 사업처럼 헌신해 왔다.
거래처와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가지고 일을 만드는 건 선희에겐 큰 기쁨이다.
그렇다고 상냥한 것만은 아니다. 옳다 생각하면 자기주장도 꽤 강한 편이라 사장이랑 맞짱 뜰 때도 있다.
사장은 이런 그녀가 넌덜머리 난다고, 제발 고분고분하게 네네 하기를 원한다.
선희는 어제 짱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이후 한결 가벼워졌다. 뭐라도 짱구를 돕고싶어서 아는 현장소장님을 따라 경험을 쌓아보라고 권한다.
일의 경험이 창작의 동기부여가 될 것이라고..
.
.
도착한 현장은 동대문에 있는 귀금속 가공 공장을 겸하는 빌라건물이다.
한때 우리나라는 귀금속 세공기술이 발달하고 호황을 누렸었다.
지금은 거대브랜드에게 시장을 많이 내주어서 규모가 많이 줄었다.
아래층은 여전히 보석세공 공장으로 활용하고, 사장내외는 위층으로 이사예정이다.
다락을 증축하여 실내에서 오가는 계단을 원하고 인테리어 분위기는 현재 있는 집과 같이 골드포인트가 있는 클래식한 인테리어를 원한다.
사장님은 패턴과 장식이 화려한 천장 디자인을 원했다.
현장소장은 짱구에게 천장디자인에 대한 일을 맡겨본다.
카피의 카피를 카피한 조악하고 근원을 알 수 없는 '한국식 클래식스타일'이 난무하다.
이에, 세상에서 화려한 디자인의 절정에 달했던 바로크디자인의 심장 로마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종교개혁 이후, 교황청은 그들의 권위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성당건축과 내부를 치장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고, 유명한 건축가와 예술가들을 불러들인다.
14~16세기 비례와 균형을 중시한 르네상스시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있다면, 화려하고 역동적인 17세기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조각가이자 건축가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있다.
17세기 로마, 보로미니는 이탈리아 북부 하도급 건축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시골 출신 보로미니는 일거리를 찾아 로마로 상경해서 성베드로 성당에서 건축잡부로 일하게 되었다.
건축 노무는 했지만 미술에 대한 열정만은 뒤지지 않아 휴식시간에도 드로잉에 열중하였다.
이를 눈여겨본 건축가 마데르노의 눈에 들었고 수석 건축가의 드로잉 조수로 발탁된다.
그런데 갑자기 마데르니가 사망하고 책임자로 천재적 조각가로 유명한 베르니니가 부임한다.
보로미니의 눈에는 그는 한량처럼 놀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후 성베드로 성당공사를 뒤로 하고 그만의 독자적인 길을 찾기 시작했다.
베르니니가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보여주기 시작한 것은 1638년에서부터였다.
산 콰트로 알레 폰타네라는 수도원 건설을 책임지게 되었다.
보로미니의 파사드는 곡선의 리듬감으로 충만하고, 화려한 디자인이지만 저렴한 재료를 사용했고, 구조적으로 완벽해서 별다른 장식 없이도 고상하고 완벽했다.
가난한 수도원장은 뜻밖의 결과에 너무나 만족했고, 사람들이 이 디자인을 감상하기 위해 멀리서부터 찾아왔다.
베르니니를 열렬히 지지했던 교황 우르바노스 8세가 죽고 새로 부임한 교황 인노첸트10세가 자리에 오르며 보로미니에게도 기회가 열려 대규모 공공작업을 주게 된다. 그러나 그는 내성적 성격으로 대인관계가 쉽지 않았다. 건축주를 만나 설득하고 노무자와 끊임없이 부딪혀야 하는 것이 건축가라는 직업인데, 왕정과 교황청 사이의 기류를 미묘하게 잘 읽어야 하는 위치에서 그는 점점 눈밖으로 밀려나게 된다.
금수저 집안의 화려한 사교술을 가진 라이벌 베르니니는 고집스러운 보로미니에게 답답함을 느끼는 교황의 틈을 파고들어 공공 프로젝트를 빼앗게 된다. 이것이 나보나 광장의 엄청난 4대 강 분수이다.
이후 교황청의 프로젝트는 베르니니가 독점하게 되고 보르미니의 일까지 빼앗아 설계를 변경하게 된다.
1667년 심신이 피폐해진 보로미니는 자살로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이후 라이벌 베르니니도 작품질이 현저히 낮아지고, 작품은 힘을 잃는다.
40년간 라이벌 관계였던 두 사람의 작품은 실제로 점점 닮아가기도 한다.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서로에게 삶의 원동력이자 예술혼의 원천으로 예술가를 극한으로 몰아치게 만들었다.
바로크 양식을 알리는 대표적 건축양식으로, 로마 콰트로 폰타네 광장에 접해 있는 보로미니와 베르니니의 두 성당을 비교하는 것은 큰 호강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