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1915년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사범학교에 갈 수 없게 되자 교사의 꿈을 포기했다.
정 명예회장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 차례 가출을 시도했으나 아버지에게 번번이 붙들려 실패했다. 그는 마지막 가출에서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서울로 상경해 1931년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 취직했다.
3년여 만에 그는 쌀가게를 인수하고 ‘경일상회’라는 간판을 걸고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가게는 1939년 일제가 전시체제령을 내리면서 문을 닫게 됐다. 이후 1940년 자동차 정비업체 ‘아도서비스’를 인수했으나 이마저도 1943년 일제가 종로의 일진공작소와 강제 합병시키면서 문을 닫았다.
정 명예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자동차 수리공장을 다시 시작했고, 이때 붙인 이름이 ‘현대자동차공업사’다. 1947년에는 건설업체 ‘현대토건사’를 세워 3년 후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합병했다. 현대건설의 모체가 탄생한 순간이다. 1967년 현대차를 설립하고,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맡아 수출입국의 대동맥을 만들어냈다.
이후 현대건설은 크게 성장하면서 한국의 경제성장을 주도했고 국내 최대 대기업을 이끌게 된 정 명예회장은 대표적인 입지전적 기업가로 국내외에 이름을 널리 알렸다. 어려운 과제에 부딪쳤을 때 임직원들에게 “이봐, 해보기는 했어?”라고 되물었다는 정 명예회장의 불굴의 의지는 지금껏 회자되는 명언이다.
조선소가 없는 상태에서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 리바노스로부터 유조선 2척 건조 계약을 따내고 이를 바탕으로 영국 차관을 얻어 울산에 조선소를 짓는 동시에 주문받은 유조선을 건조한 일화도 유명하다. 1998년에는 ‘소 판 돈’을 상징하는 소 1001마리를 이끌고 북한을 방문하는 귀향 행사를 갖는 등 남북 교류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고 정주영 회장 일대기 중>
우연히 일을 하다 보면 재벌집 구경을 할 때가 있다.
높은 담장에 차 4~5대는 둘만한 차고가 있고, 일하는 아주머니 2명이 항상 주방을 관리하신다.
대문을 이용하기보단 주로 차고에서 들어가는 지하 현관문을 이용하거나 주차장에서 올라가면 현관문이 있곤 하다. 생활의 불편을 개선하는 디자인을 요구할 때가 있는데, 그중 특이한 점은 청소하기 쉬운 구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이 항상 상주하므로 그들에게 시키면 그만이지 싶은데, 주말에는 직접 마당에 물청소를 한다거나 구석구석 분해하여 청소를 직접 하기도 한다. 회장님이 중요한 일에 신경 쓰시지, 뭐 이런 쪼잔한 일에 신경을 쓰실까 하지만 자신이 직접 접하는 곳에 대해서는 상당한 애정과 민감도를 가지고 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안전과 유지관리 용이'라는 실용적 정신이 바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