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느끼는 감상(鑑賞)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내가 느낀 감정이란, '불편함'에 가깝다.
1부 「채식주의자」에서 2부 「몽고반점」, 그리고 3부 「나무 불꽃」까지. 계속해서 시점이 바뀌지만, 그 중심에는 늘 '영혜'가 있다. '남편'과 '형부'는 그녀의 배경을 알지 못하기에 ─ 아니, 어쩌면 알려 하지 않았기에 ─ 그들의 시선에선 그녀가 왜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 건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기어코 '꽃'을 그리고는, 경계를 넘는 그 순간,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욕망의 충족, 하나뿐이다. 왜 그녀가 '꽃'이 그려져 있다는 것, 그 이유 하나만으로 몸을 허락한 것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가 그녀를 만난 것은, 애초부터 '몽고반점'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었다. 아니, 그녀는 사실 '식물'이 되고 싶었다. 폭력에 저항하지 못한 채 살아온 그녀였기에, 실은 본인의 내면에도 폭력성을 가진 '맹수'가 살고 있다는 그 사실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을 테다. 구역질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누군가에게 상처 입는 폭력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택했다. '동물'로 살아간다는 것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것이었기에, '식물'이 되기로 했다. 불꽃은 이미 오래전 사그라졌다.
그렇다면 나는 왜 지금 '불편함'을 느끼는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내가 그동안 '영혜'라는 인물을, 그의 '남편'이 그랬듯이, 망가진 시계나 가전제품처럼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곤, 마음 깊은 곳에서 혐오의 감정이 흘러나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제멋대로 달려 나가기만 하는 현실에 지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떠올리는 '인혜'에게서 한때 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기 때문일까. 지금의 이 감정을,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
한강, 『채식주의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