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씹히지 않는다.

아버지의 어금니 - 사리돈과 게보린

by 따뜻한시선



고통은 씹히지 않는다. 다만 몸 안에서 썩어간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 고통의 냄새, 하지만 다시 바라는 희망.



“사리돈 말고 게보린 두 알만 사와라. 소주 한 병하고.”

아버지는 사리돈 한 알을 팩에서 눌러 꺼내며 정호에게 말했다.

라디오에서는 선동열의 신인왕 수상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버지가 다이얼을 돌리자 ‘못 찾겠다 꾀꼬리’가 경쾌하게 튀어나왔다.


사리돈은 새하얀 얼굴에 납작하고 가벼웠다. 손가락으로 누르면 부서질 듯했고, 입에 넣으면 쓴맛이 혓바닥을 찔렀다. 게보린은 분홍빛이 돌았다. 통통한 삼각형이었고, 손에 쥐면 묵직한 기분이 들었다. 정호는 그것이 아버지의 고통의 뿌리까지 가닿는 듯하다고 느꼈다.


아버지는 치통을 달래기 위해 사리돈을 자주 먹었다. 값이 싸서였다. 게보린은 두 배쯤 비쌌다.

사리돈은 ‘값싼 고통’을, 게보린은 ‘값비싼 고통’을 견딜 때 먹는 약이었다.

아버지의 주머니엔 늘 사리돈 한 팩과 솔 담배 한 갑이 함께 있었다. 게보린은 아주 드물게, 견딜 수 없을 때만 등장했다.



아버지는 종종 동그란 손거울로 왼쪽 위 가장 안쪽 어금니를 들여다보았다. 치통이 시작된 후 생긴 버릇이었다. 찬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씹을 때 가끔 어금니가 아렸다. 어느 날부턴 이유도 없이 통증이 시작되었다. 거울로 비친 어금니는 멀쩡해 보였다. 불안한 마음은 조금 가라앉았다. 사리돈으로 고통을 눌렀다.




일흔이 된 할머니는 둘째 고모가 모셔갔다. 아버지와 두 아들은 산동네 더 높은 곳에 있는 셋방으로 이사했다.

고등학교 1학년인 두호는 수업료를 낼 수 없어 학교를 그만두었고, 국민학교 3학년인 정호는 4교시가 끝나면 운동장 가장자리를 서성였다.


900원에 쌀 한 되를 사면 세 식구가 하루를 먹었다. 쌀집 아주머니는 늘 되가 봉긋하게 넘치도록 쌀을 담아주었다. 하지만 넘치는 인정도 하루의 끼니를 채우진 못했다. 쌀 외상값이 쌓이며 염치의 한도를 넘었고, 어린 정호조차 쌀집 앞을 돌아서 가야 했다.

무열이 아저씨 구멍가게의 라면 외상대금만이 간신히 여유가 있었다.


아버지의 치통은 규칙과 불규칙이 함께였다. 규칙적인 통증은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씹을 때, 그리고 새벽녘 깊은 잠에 들 무렵 찾아왔다.

그래서 마실 때나 씹을 때는 오른쪽 어금니만 사용했고, 잠들기 전엔 늘 사리돈을 먹었다. 점차 통증의 리듬은 커졌고, 불규칙한 통증의 횟수도 늘었다. 거울로 들여다보니 잇몸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불규칙한 고통이 규칙적인 리듬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어금니가 흔들렸다. 거울로 보이는 어금니 주변은 벌겋게 부풀었고, 살갗 아래서 끈적한 고름이 올라오는 듯했다. 입을 헹궈도, 이를 닦아도, 고통의 고름 내는 단칸방에 가득 머물렀다.




아버지는 라면국물에 소주 한 병을 금방 비웠다. 게보린 두 알을 털어 넣었다. 동그랗고 단단한 베개를 목에 베고는 고개를 뒤로 꺾었다.


“뺀찌로 살짝 잡고 흔들흔들하다가, 내가 신호 주면 확 잡아 빼.”

아버지는 더는 익숙해지지 않는 통증을 뽑아버리기로 결심했다. 나눠서 겪어야 할 고통을 단 한 번만 견디면 끝날 것이라 희망했다.


아버지는 천장을 향해 입을 벌렸다. 두호는 왼손 검지를 아버지 입에 넣어 볼을 댕겼다. 라디오 뺀찌로 어금니를 어렵게 잡고, 아주 조심스럽게 양옆으로 흔들었다. 피고름이 새어 나왔다.


“조그마, 세게 흐드러.”

아버지는 목젖을 닫고, 피고름을 삼키지 않으려 애쓰며 힘겹게 말했다.


어금니는 조금씩 흔들리기는 하나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묵직한 통증은 뼈를 타고 올라왔다. 아버지는 사지에 힘을 주며 낮게 신음을 냈다.


“드오야. 뽀바.”

두호는 떨리는 오른손에 힘을 꽉 주며 뺀찌를 당겼다. 아버지의 머리가 베개에서 살짝 들렸다.


“으아아아!”

아버지는 비명과 함께 턱을 감싸며 바닥을 굴렀다.

정호는 그 모습을 입 벌린 채 바라보다 얼어붙었다.


하지만 어금니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썩은 뿌리는 꿈틀거리며 버티고 있었다.


아버지는 몸을 떨며 다시 누웠다.

“정호야. 정호야. 정호야!”

정호는 초점을 맞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먹먹하고 뿌연 어둠 속에서, 단칸방으로 툭 떨어진 것 같았다.


“정호야, 아버지 머리 좀 눌러. 두호야, 흔들다 다시 뽑아보자.”

뺀찌가 흔들릴 때마다 울리는 아버지의 비명, 그 사이에서 참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썩은 내.

정호는 그 고통의 시간에 영원히 갇힐까 봐 두려웠다.


반면, 두호의 손끝은 갑자기 머리부터 차가운 감각이 퍼져 나갔다.

검붉은 피고름 속, 점처럼 보이는 하얀 어금니가 선명했다.

모든 감각이 사라지고 오직 그 어금니만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낮은 울림도 들리지 않았고,

온몸으로 아버지의 머리를 누르는 정호도 보이지 않았다.



두호는 어금니를 뺀찌로 다시 잡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각목에 박힌 대못을 뽑듯 돌리며 당겼다.

뿌드득.

아버지는 다리를 심하게 떨며 마지막 고통을 쏟아냈다.


뺀찌 끝에는 어금니가 매달려 있었다.

거무죽죽한 뿌리 끝엔 실핏줄처럼 말라붙은 흔적이 남았다.

잇몸엔 시뻘건 구멍이 났고, 곧 피가 들이찼다.


고통을 덜어낸 아버지는 피고름을 게워냈다.

그리고 반쯤 녹은 분홍색 게보린을 토해냈다.

그 위로 떨어진 뜨거운 눈물이 분홍색으로 퍼졌다.




정호는 뺀찌에서 떨어진 어금니를 조심스럽게 손수건에 싸쥐었다.

할머니가 손바느질로 가장자리를 감아 만든 손수건이었다.

가만히 손수건을 매만졌다.


마당으로 나와 산동네 아래의 컴컴한 여수 시내를 바라보았다.


“까치야, 아부지 새 이빨 하나 주세요!”


찌든 고통의 냄새를 멀리 보내려는 듯, 정호는 썩은 이를 동네 아래로 멀리 던졌다.

저 멀리 스레트 지붕에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꾹 눌렀던 눈물이 목젖까지 차올랐다.

정호는 마당 난간을 꽉 쥐고 몸을 떨며 어둠 속으로 얼굴을 묻었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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