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진정한 가치

예술, 무슨 물건인가?-08

by 에코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나?”




"예술이요?

음... 예술은 예술이죠.”




“허.. 뭐 틀린 말도 아니네."




“하하. 갑작스럽게

질문을 하셔서 당황해서

그런 거고요,



선생님 말씀은

'예술의 가치나 효용'에 대해

물어보신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네. 저는 예술이란

'치유를 통한 휴식과 자유'

라고 생각합니다.”




“치유를 통한

휴식과 자유?"




“네, 몸과 마음,

즉 심신의 치유를

말합니다.



삶의 이분법적 갈등을

해소함으로써



마음이 끄달리지 않는

자유를 느끼는 거죠.



세상의 일들도

결국 이것을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업이든, 업무든,

생활이든, 또는 종교나

정치까지도



결국은 심신의 진정한

휴식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예술로 치유를 어떻게

한다는 거지?"




"좋은 감정뿐만 아니라

억눌린 감정이나 결핍을



작품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정신적 승화'를

이루는 거죠."




"응. 옛날 문인화가들도

너하고 같은 말을 했어.



그들은 예술을

'차물서의(借物抒意)'라

했지.



'사물을 빌려 뜻을

드러낸다'는 말인데,



대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이나 정신을

표현한다는 거야.



작가의 정신에는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고,



거기에

욕망이나 감정, 생각이

담겨서 표현될 때,



작품은

정체성이 드러나



진실하고 순수한 울림을

가질 수 있는 거고,



그걸 통해

작가는 자유로워지는 거지."




"아.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감성이란 별반

다를 게 없군요."




"그렇지.

그런데 마음속에 잠재된

욕망, 감정, 생각들이



그림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있나?"




"그 부분은...

모르겠습니다."




"카르마(karma)라고

들어봤지?"




'네.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불교에서는

인간은 존재 자체가

업덩어리라고 해.



몸과 마음 모두

업(業)으로 이루어진

거라고 하지.



기독교에서는

죄성(罪性)이나 죄인이라 하고.



업(業)은 결과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순환구조 자체여서



순환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가 관계 속에서

사라지는 유동적인 거야.



업은 나쁜 것만이

아니라, 좋은 것도

업이라 해



이것을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이라 불러."




"좋은 마음도 업이라고요?"




"그렇지. 예를 들어,

무언가를 기부하거나 도우면서

선업을 쌓으려 했는데,



그 결과를

기대하거나 보답을

바란다면



그 또한 업이 된다는 거지."




"음... 내가 도왔으면

상대도 도와줘야 하

거 아닌가요?"




"상대가

이미 고마워하는

마음을 전했다면 다

주고받은 거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했으니

뭔가 있겠지 하고



기대하거나 강요하면

그게 곧 업으로 남는 거지.



만일 뭔가 도우려 했는데

상대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겠어?



복 쌓을 기회를

놓치는 거잖아."




"아... 그러니까

기부했다거나 베풀었다는

생각조차도

업이 되는 거군요.



업의 작용이

간단치 않네요."




"그걸 무주상보시

(無住相布施)라 해.



준다는 생각 없이

하는 걸 말하지.



우리들의

직관은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분별심에 걸려서

잊은 거야."




"... 네. 그럼 업을 없애려면

어떻게 하면 되죠?"




"업은

없애는 게 아니라

마음의 문제니까,



그 실상, 즉

관계구조를 바로 보면

이해되고 풀리는 거야.



너는 예술가니까

그림으로 풀어내면

되는 거고."




"...."








"카르마는

부모로 받은 유전적인

업(DNA)과



생활 속에서 생긴

습관적 습(習),



즉 '업습(業習)'을 말해.



생활 중에 쌓인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어.



투도업(偸盜業).

사음업(邪淫業).

살생업(殺生業).



그림은 몸으로

표현하는 거니까 이것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지.



투도업은 엿보고

훔치고, 드러내고 감추는 걸

말하는데,



감정적으로는 탐욕,

결핍감, 비교심 등의

욕망에서 나와.



표현하고 싶은 것을

남을 의식해 잘 드러내지

못하면



선이나 색면이

힘이 없어 생동감이

떨어지게 되지.



반면에

과도하게 표현이 돼도

투도업에 걸렸다고 해.



남의 콘셉트나

아이디어를 은밀히 차용하거나

베끼는 것이라든가.



혹은 유명작가의

문법을 자기화하지 못한 채

따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야.



모든 예술은

서로 간의 영향아래서

자라는 거지만,



문제는 자기의 것으로

소화했느냐 아니냐라고

할 수 있겠지.



사음업은

성적욕망의 문제인데,



왜곡된 성적행위

또는 쾌락적 집착 등을

말하고



감정적으로는

욕망, 외로움, 소유욕에서

비롯되지.



감각적 자극에 빠져

자극적 미학을 반복하거나



메시지 없이

성적 감정의 과잉에

빠지는 것 등이야.



하지만 사음업을

잘 드러내게 되면



화면이

유려하고 풍성해져서

윤택한 맛을 주게 돼.



성(性)은

'창조의 근원'이기도 해.



그러나 욕망이 나를

조정하면 그것은 업이 되고



욕망을 관조할 때

예술이 되는 거지.



살생업은

죽이고 살리는 문제인데



생명을 해치는 행위,

또는 존재를 부정하는

의도를 말해.



감정적으로는

미움, 분노, 증오, 경쟁심

배제심에서 비롯되지.



예술가는 자기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할 수 있는데,



그 부정이 미움에서

나오면 살업(殺業)이 되는 거고



지혜에서 나오면

고통을 벗어나는 창조가

이루어져서



자신을 살리고 남도 살리는

생업(生業)이 되는 거지.



다시 말해

자아의 죽음을 두려워 않는

예술가는



오히려 가장

큰 생명을 낳는다고

할 수 있어.



그림을 그릴 때,

액션이나 터치 등으로 화면을

기운생동하게 하면



살생업이 살리는 쪽으로

잘 표현이 된 거라 할 수 있고,



경계를

지나치게 예리하게 하거나

날카로움이 과해서



불편함을 준다면

살생업을 잘 풀어내지

못한 거라고 하겠지.



현실생활 중

타인과의 관계는



모두 이것들과

관련 있다고 할 수 있어.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면서 중요한 게

투도업이라고 할 수 있지.



인간관계의 출발이

투도업의 시작이니까.



세상만사

투도업때문에 일어났다

사라진다고 봐도 돼.



서로 간에

주고받는 문제.



자신을 드러내고

감추는 문제,



상대를 속이고 기만하는

문제 등에 따라



미움과 사랑이

생기고



결국에는

파국이나 죽음으로

이어지는 거지.



그래서

이 업들을 잘 바라보고

풀어내야 하는 거야."




"그럼 예술도

이 업들을 풀기 위한

수단이라는 건가요?"




"그렇고 말고.

예술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들이란



결국 자신의 업을

승화시키기 위한 거라고

할 수 있겠지."




"작품을 보면

작가의 업이 드러난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당연하지. 이 업들은

서로 간에 긴밀한 관련이

있어서



명확하게 나누기

힘들지만,



예술 행위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의 언행도



세 가지

카르마들이 한꺼번에 섞여

나오는 거라고 보면 돼."




"아. 그렇군요,

그럼 자신의 언행이나

작품을 보면



자신이

무슨 업에 걸렸는지도

알 수 있겠네요."




"그렇지. 사실

이런 것을 잘 모르더라도,



직관적으로 몸과 마음이

시원하고 자유롭다면



그림이 잘 된 거고

업 또한 풀린 거라고

보면 돼.



만일 그림이

풀리지 않는다면,



어떤 업에

걸렸나를 찾아보면 해결점을

알 수 있을 거야.



그래서

예술의 가치와

효용이란



자신의

카르마(Karma)를

유감없이 드러내,



예술적 승화를 이룸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회복한



'자유로운 존재
(Natural Being)'



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이것은

평소 남 눈치 보느라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지 못했던

분열된 존재가,



그것들을

표현해 냄으로써



자신의 결핍이

결국 상대비교에서

온 것임을 깨달아



비로소

충족된 존재가 되어



중도(中道)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어."




"말씀을 듣고 보니

그동안 눈치 보며

꺼내놓지 못한



업들을 꼭 드러내어

승화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차분하게

내면의식들을

돌아보면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작품,



'자유로운 존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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