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준의 반지하 방에는 새로운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의 노트북 화면을 가득 채운 엑셀 스프레드시트. '멤버 관리'라는 이름의 그 파일은 그의 죄악을 기록한 장부이자, 시시각각 그의 목을 조여오는 시한폭탄이었다. 그는 지급일이 30일 이내로 남은 셀들을 붉은색으로 칠했다. 화면은 온통 피처럼 붉은 경고로 가득 찼다. 신규 투자금 유입 속도보다 수익금 지급 요구의 증가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었다. 폰지 사기라는 자전거는 페달을 더 빨리, 더 세게 밟지 않으면 쓰러질 운명이었다. 그는 '불개미 군단'의 소액 투자금만으로는 한계에 봉착했음을 깨달았다. 더 큰돈, '고래'들을 낚아야만 했다. 그때, 그의 눈에 IT 전문 매체의 기사 헤드라인이 들어왔다.
'[단독] K-콘텐츠 분석 스타트업, 300억 원 시리즈 A 투자 유치 성공!'
민준의 머릿속에서 번개가 쳤다. 주식, 드라마, 영화… 결국 본질은 같았다. 사람들을 홀리는 '서사'를 파는 것. 그는 무릎을 쳤다. 주식의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가보다, K-콘텐츠의 성공을 예측하는 AI 기술 기업 대표가 훨씬 더 세련되고, 더 검증하기 어려운 사기였다. 그는 즉시 실행에 옮겼다.
투자금의 일부를 이용해 프리랜서 마켓에서 가명으로 웹 개발자와 디자이너를 고용했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잘나가는 AI 스타트업들의 웹사이트를 긁어모아 그들에게 던져주며 요구했다.
"최대한 전문적이고, 혁신적이며, 글로벌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주세요."
며칠 뒤, 디자이너가 보내온 시안을 확인한 순간 그는 소름이 돋았다.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거짓말이, 세련된 로고와 디자인을 입고 화면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실체가 없기에 더 완벽해 보이는 유령 회사, 'Next.AI'가 탄생했다.
다음은 투자 제안서였다. 그는 주말 내내 집이 아닌 PC방 구석 자리에서 20페이지짜리 파워포인트 파일을 만들었다. 그의 범죄를 위한 완벽한 알리바이이자 작업 공간이었다. 그는 해외 유명 컨설팅 회사의 보고서에서 '글로벌 반도체 시장 성장률' 그래프를 통째로 복사한 뒤, 제목만 '글로벌 OTT 콘텐츠 시장 성장률'로 바꿨다. 그는 이 제안서의 가장 핵심적인 페이지에, 아무도 알아챌 수 없는 시한폭탄을 심어두었다.
이제 이 제안서를 들고 갈 '고래'를 찾아야 했다. 그는 와인 모임에서 교환했던 명함첩을 뒤져, PR 에이전시 유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가장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를 연기했다.
"유 대표님, 저 페르소나 캐피탈의 김민준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극비리에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K-콘텐츠 산업 전체를 뒤흔들 AI 기반 분석 스타트업입니다. 본격적으로 실리콘밸리 자금을 유치하기 전에, 소수의 특별한 파트너들에게만 프리-시드 라운드를 오픈할 생각입니다. 대표님이 가장 먼저 생각나서 연락드렸습니다."
'극비리', 'AI', '실리콘밸리', '소수의 특별한 파트너'. 유 대표 같은 '연결자'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키워드들이었다. 그는 이 젊은이가 자신의 네트워크에 큰돈을 안겨줄 '황금 거위'가 될 수도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즉시 자신이 아는 개인 투자자 몇 명과의 미팅을 주선했다.
미팅은 '워크플렉스'의 회의실에서 열렸다. 민준은 지난번과 같은 '톰포드' 수트를 다시 대여해 입고 있었다. 투자자는 두 명. 부동산으로 돈을 번 50대 중견 사업가 박 사장과, 강남의 유명 병원장 아들인 30대 의사 최 원장이었다. 그들은 돈은 많았지만, 기술의 깊이까지 꿰뚫어 볼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들에게 투자는 수익률 게임인 동시에, 남들보다 앞서나간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교 활동이었다.
민준은 연습한 대로 자신감 넘치게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는 '파라미터 최적화', '자연어 처리', '예측 정확도 98.7%' 같은 단어들이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발표가 끝나자, 최 원장이 먼저 부드럽게 질문을 던졌다.
"설명 잘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술은 사실상 글로벌 콘텐츠 제작 시장 전체로 봐도 무방할까요?"
"정확하십니다. 저희는 국내 시장을 테스트베드로 삼아, 내년 하반기에는 북미 시장을 직접 공략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이에 질세라 박 사장이 날카로운 척 질문을 던졌다.
"설명은 잘 들었습니다, 김 대표님. 그래서 이 모든 분석의 핵심 엔진이 뭡니까? 다른 회사들과 차별화되는 원천 기술이 뭐냐는 겁니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민준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는 이 허무맹랑한 쇼에 참여한 관객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준비한 폭탄을 터뜨렸다.
"좋은 질문입니다. 저희의 핵심 차별점은, 업계 표준의 딥러닝 모델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MIT에서 개발되어 학계에만 알려진 '빅데이터 기반의 시냅스 알고리즘'의 국내 독점 라이선스를 확보하고, 이를 K-콘텐츠에 맞게 개량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시냅스 알고리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가 지어낸 단어였다. 회의실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박 사장과 최 원장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여기서 "그게 뭡니까?"라고 묻는 순간, 자신은 이 첨단 기술의 흐름을 놓친 무식한 투자자가 된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젊은 의사 최 원장이었다. 그는 무시당하기 싫다는 방어기제로 아는 척을 시작했다.
"아, 시냅스 알고리즘! 그거라면 저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원래 뇌신경과학 연구에 쓰이던 모델 아니었습니까? 논문에서 본 기억이 나는군요. 그걸 콘텐츠 분석에 적용할 생각을 하다니… 그야말로 혁명적이군요."
부동산 사업가 박 사장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젊은 의사가 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는 황급히 대화에 끼어들었다. "맞아, 맞아. 나도 들어봤지. 그 라이선스를 확보하기가 그렇게 어렵다던데… 대단하시군요, 김 대표님."
블러핑은 대성공이었다. 미팅이 끝나고, 투자자들은 '긍정적으로 검토 후 연락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회의실에 홀로 남은 민준은 다리가 풀려 의자에 주저앉았다. 빌려 입은 비싼 수트가 땀으로 축축했다.
그날 저녁, 민준이 반지하 방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을 때 유 대표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김 대표님, 오늘 반응 아주 좋았어요. 두 분 다 투자 의향 확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오늘 참석했던 최 원장께서, IT 전문지에 친한 기자가 있는데 김 대표님과 ‘Next.AI'에 대한 단독 기사를 내주고 싶어 한다네요. 신생 스타트업에게는 엄청난 기회일 텐데, 인터뷰 진행해 보시겠어요?'
민준은 퉁퉁 불은 면발을 씹으며 이메일을 응시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언론 인터뷰. 그가 꿈에 그리던 '공식적인 인정'이자, 그의 사기극을 대중에게 공표하는 무대였다. 그는 위험과 보상 사이에서 갈등했다. 기사가 나가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기사가 나간다면, 그의 통장에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돈이 쌓일 것이다. 백 사장의 빚을 갚고, 이 지긋지긋한 반지하를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뇌리에 청담동 레스토랑에서 자신을 유령 취급하던 전 여자친구의 얼굴과, 아버지의 멱살을 잡던 취객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무력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생각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이 지하실에서 평생 썩어 없어지느니, 화려한 사기꾼으로 잠시나마 빛나다 감옥에서 썩는 게 낫지 않을까.
그는 결심했다.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썼다.
'물론입니다. 더없는 영광이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이제 정말로 돌아갈 수 없었다.
[9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