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최기환과 그의 후배인 이진우 기자는 김민준의 오피스텔 불이 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차를 돌렸다.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뭔가 대단한 정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그냥 평범한 직장인들 술자리 같았습니다."
말 없이 창문을 열고 최기환은 어둠 속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빨갛게 타들어 가는 불빛이 그의 냉소적인 얼굴을 잠시 비췄다.
"원래 거대한 거짓말은 가장 사소하고, 하찮고, 진부한 진실들 앞에서 무너지는 거야."
그는 카메라 메모리 카드를 꺼내 노트북에 꽂았다. 화면에 방금 찍은 사진들이 떴다.
"이걸 봐. 저놈은 손목에 1억짜리 파텍 필립을 차고 있어. 그런데 평범한 중소기업 출신 동료들 앞에서 쩔쩔매다가, 가짜 전화 한 통에 줄행랑을 쳤지. 저건 자신감이 아니라 공포야. 성은 화려하게 지었지만, 성을 받치고 있는 땅이 썩어 있다는 증거지. 우리는 이제 저 땅을 파보기만 하면 돼. 대단한 걸 찾을 필요 없어. 그냥… 돌멩이, 지렁이, 썩은 나무뿌리 같은 것들만 찾아내면 알아서 무너져 내릴 거야."
다음 날 아침, 최기환의 탐사보도팀은 두 개의 팀으로 나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목표는 김민준의 '직장 생활'이라는 땅을 파는 것이었다.
이진우 기자는 전날 저녁 식사 자리에 있었던 김동현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기환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자신을 '김민준 대표의 성공 신화를 취재하는 기자'로 소개하며 상대의 경계심을 허물었다. 그는 '시냅스 알고리즘'이나 '투자 철학' 같은 것은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대신, 가장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들을 물었다.
"회사 다닐 때 점심은 주로 뭘 드셨는지, 동료들과 회식은 자주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하나만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동현은 어젯밤 민준이 보여준 부와 성공에 대한 질투심과, 동시에 자신이 그의 과거를 속속들이 안다는 우월감에 취해 있었다. 그는 별생각 없이, 기억나는 사실들을 술술 불기 시작했다.
"점심이요? 아, 그거 기억나네요. 맨날 돈 아낀다고 구내식당에서 제일 싼 6500원짜리 백반 코너만 이용했어요. 다른 메뉴는 비싸다고 쳐다도 안 봤죠. 회식은… 걔 술 진짜 못해요. 한번은 회식 때 소주 세 잔 마시고 필름이 끊겨서, 박성철 팀장님한테 거의 한 시간을 넘게 쌍욕 먹고… 아, 이건 기사에 쓰시면 안 됩니다! 하하."
이진우는 다른 동료 서너 명과 추가로 통화했고, '존재감 없던 계약직', '단순 리서치와 PPT 작성 업무' 등 민준의 과거를 회상하는 모두의 증언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했다.
오후가 되자, 최기환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는 이진우가 수집한 '직장인 김민준'에 대한 정보를 한쪽에 정리해두고, 그의 진짜 '뿌리'를 찾기 시작했다.
"진우야, 박성철 팀장이 그랬지. 김민준이 자기 팀 '계약직'이었다고. 그럼 회사에 입사 서류가 남아있을 거고, 거기엔 학력 사항이 반드시 기재되어 있을 거야. 박 팀장한테 다시 한번 연락해서, 그냥 기록 확인 차원이라고 둘러대고 어느 대학 나왔는지만 좀 알아봐 줘."
최기환의 예상대로, 박성철은 '한국경제일보' 기자의 재연락에 우쭐해하며, 인사팀의 직원을 통해 김민준의 출신 대학과 학과를 슬쩍 알아내 최기환에게 알려주었다. 서울의 명문대가 아닌, 한 지방대학교의 경영학과.
최기환은 즉시 그 대학의 웹사이트에 접속해 경영학과 교수진의 명단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는 김민준이 재학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는 나이 든 경제학 원론 교수의 연구실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최기환은 베테랑 기자 답게 정보를 직접 요구하는 대신, 교수의 학자적 양심을 자극하는 함정을 팠다.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한국경제일보 최기환 기자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교수님의 제자이신 페르소나 캐피탈의 김민준 대표에 대해 취재 중입니다. 저희가 취재한 바에 따르면, 김민준 대표가 재학 시절에 아주 명석한 학생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교수님의 경제학 원론 수업에서 아주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그때부터 투자의 재능을 보였다고 하던데요. 이 부분을 기사에 인용해도 괜찮을지, 사실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
수화기 너머의 노교수는 '김민준'이라는 이름을 한참 동안 기억해내지 못하다가, '명석한 학생'이라는 말에 반응했다.
"명석한 학생이요? 허허, 그런 학생이면 제가 기억할만할텐데… 기자님, 잠깐만요, 제가 기록을 좀 확인해보겠습니다… (잠시 후) 아, 김민준 학생… 전혀 아닙니다. 내 기록에 따르면, 이 학생은 내 경제학 원론 수업에서 학사 경고를 받을 뻔한 성적이었고, 결국 낙제해서 다음 해에 재수강을 했습니다. 평범 이하의 학생이었어요. 기사에 제 이름이 언급된다면, 이 부분은 명확히 해야겠습니다."
교수의 단호한 답변에 최기환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얼마 뒤 최기환의 사무실 화이트보드는 두 개의 세계로 완벽하게 나뉘었다.
왼쪽에는 [현재], 오른쪽에는 [진실] 이라고 적혀 있었다. 최기환은 추가로 얻은 정보를 오른쪽에 추가했다.
[현재]
시장에서 독학한 비범한 천재
고독한 미식가, 와인을 즐김
흔들림 없는 자신감을 가진 리더
'시냅스 알고리즘' 개발자
[진실]
존재감 없던 지방대 학생
경제학 원론 재수강
6500원짜리 백반 마니아
계약직, 잡무 담당
화이트보드 위의 두 세계는 같은 인물에 대한 설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 최기환은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깊숙이 기댔다. 그는 이제 김민준이라는 인물의 본질을 파악했다.
"이건… 지독한 자격지심이야. 자신의 과거를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한 남자의 처절한 발버둥이라고."
같은 시각, 김민준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화상 회의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과거가 사소한 진실들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있는 동안, 미래를 위한 거대한 거짓말을 쌓아 올리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화면 너머에는 파나마에 기반을 둔 법률 대리인이 있었다.
"Understood. Please send me the wire transfer details. We need to expedite this process."
(알겠습니다. 송금 정보를 보내주십시오.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해야 합니다.)
그는 통화를 끊고, 거액의 투자금이 들어있는 한소희 명의의 계좌에서 유령 회사 설립 자금 5만 달러를 해외로 송금하기 위해 뱅킹 앱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송금 버튼을 누르는 순간, 그의 요새는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19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