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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는 법

담담한 줄 알았다.

by Vainox



27살에 암 판정을 받았다.


드디어 악몽 같은 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그 소식은 내게 사형선고가 아닌 생명줄 같았다.





다음 예약 일정을 잡은 뒤에 병원 밖으로 나왔다.

검사 항목과 순서가 빼곡히 적힌 종이는 병원 영수증과 함께 반으로 접어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정확한 치료 일정은 정밀 검사 후에 결정된다고 했다. 자동문이 열림과 동시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빠져나가고, 숨이 턱 막히는 무거운 바깥공기가 온몸을 덮쳐왔다. 안 그래도 피곤한 몸이 한없이 아래로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택시를 부르기엔 애매한 거리, 버스는 방향을 반대로 타 종착역까지 가버린 전적이 몇 번 있었기에 믿을 수 없다. 결국 덥고 습한 공기를 맞으며 지하철 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나마 간간이 부는 바람이 열기를 식혀주었다.


한창 업무시간 대의 평일이라 그런지 도로 위를 달리는 차는 많았어도 길거리를 걷는 사람은 적었다.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데도, 날아갈 생각은 않고 두 발로 피하는 비둘기가 보였다. 이해가지 않아서 어이없이 바라봤다. '...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다.' 그렇게 생각하고선 무겁게 쥐고 있던 폰을 들어 단축키를 눌렀다.


"어~ 우리 딸, 이 시간엔 웬일로 전화했어?"


스피커 너머로 평소보다 기분 좋아 보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응, 엄마. 저번에 말했던 조직검사... 결과 나와서."


"어.. 그거? 뭐라고 나왔는데? 괜찮은 거래?"


검사 결과를 말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꾹 다물렸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동안 막혀있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될 때까지 나 자신을 제대로 바라봐주지 않았다며, 마음이 눈물로 항의하고 있었다. 목이 메었다.


나는 길 한가운데에 선 채로, 서럽게 울고 말았다. 하늘이 내 체면만은 지켜주려는지, 근처에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코를 훌쩍이며 아픈 목을 겨우 쥐어짜 냈다.


"... 엄마, 나... 유방암 3기 말, 이래..."


엄마의 목소리는 울기 전의 나 만큼, 침착하고 태연하게 들려왔다.


"울지 마, 뚝. 괜찮아... 응? 일단 진정하자."


그리고 엄마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요즘 다 암 걸려,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대수롭게 생각하지 마."


위로인지,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현실을 말하려는 거였는지 모를 그 말은,

너무 차갑게 느껴졌었다는 걸.


엄마는 몰랐을 거다.


시간이 지나 조금 진정이 된 나는 다음 예약 날짜를 설명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건, 다음번 검사 때는 엄마가 있어 외롭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집에 가서 할 일이 산더미다. 어서 돌아가야지.'


지하철 역까지 남은 거리를 걸어가며 스마트폰 액정에 비친 내 얼굴을 살폈다. 속눈썹에 물기가 어렸지만 다행히 눈은 충혈되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기 전까진―


비참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연재 안내

현재 4화까지는 주 2회(화 7시, 일 5시) 연재 중입니다.

그 이후에는 매주 일요일 저녁, 정기 연재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함께 걸어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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