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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살아가야지

그럼에도 세상은 굴러가니까.

by Vainox







방금 나의 인생에 큰 충격이 가해졌는데, 세상은 놀랍도록 평화로웠다.


마치 개인의 비극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바퀴가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는 소리를 제외하면 적막이 깔려있었다. 늘 사람들로 빽빽하던 칸이 지금은 한산했다. 지하철 한 칸을 통째로 빌린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텅 빈 고요 속에 앉아서 멍하니 창 밖으로 시선을 뒀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처럼, 머릿속 생각들도 쉼 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웃기게도― 나는 내 생명의 안위보다 앞으로의 현실적인 삶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


'퇴사하면 실업급여는 받을 수 있나? 항암 하면서 회사 다니라고 붙잡으면... 어떡하지? 뭘 어째, 그래도 튀어야지. 그보다, 자취하고 있는 전셋집은 계약 쫑내야 하나? 아 씨... 계약 파기는 아까운데.'


위기의 순간을 감지한 촉이 생각의 늪에 빠진 나를 건져냈다. 하마터면 한 정거장 더 갈 뻔했다. 감사합니다, 조상님. 문이 닫히기 전에 겨우 내릴 수 있었다.




가파른 3층 계단을 힘겹게 오른 탓에 현관문 앞에서 숨을 가볍게 몰아쉬었다. 이 집은 다 좋았지만 딱 하나, 계단이 문제였다. 누군가는 운동된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하겠지만, 선천적으로 관절이 약한 나에게는 이만한 독이 없다. 숨을 고르며 잠시 고개를 들었다. 내게 닥친 비극이 무색할 정도로 푸르른 하늘이...

... 왠지 모르게 미웠다.


문을 열면 제일 먼저 반기는 건 고요한―

이 아니라, 하얀 털 뭉치. 리키였다. 나의 아홉 살, 혼날 때만 눈치 빠른 말썽꾸러기.


리키는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 마냥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내 마음을 붙들고 온종일 늘어지던 우울이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역시 3층짜리 계단을 감수하고 이 집을 선택한 보람이 있었다.


가방은 대충 신발장 앞에 떨궜다. 신발 또한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리키한테 다가갔다.


"리키, 왜 그런 표정이야!? 어? 내가 이 시간에 온 게 신기해?"


리키는 반려인의 이른 등장이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는지, 내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이쪽으로 뛰어왔다. 나는 그대로 리키를 쓰다듬다가 품에 꼭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보드라운 털 사이로 미약하게 남아있는 샴푸 냄새가 맡아졌다. 품 안에 가득 안기는 하얀 몸뚱이는 좋아서 어쩔 줄 모른 채, 낑낑 거리며 조그맣게 들썩였다. 나는 한동안 거실에 웅크리고 앉아서 이 사랑스러운 평화를 만끽했다. 아주 잠시, 내가 이 녀석보다 먼저 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남은 가족이 있으니 걱정은 금방 사라졌다. 그래도 지금은 살아있는 내가 안아주고 있으니까. 나의 마음이 더 무겁게 가라앉지 않도록 가만히 읊조렸다. 만일 시간이 지나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리키는 아주 밝게 살아줬으면 좋겠다.




몸은 피곤하고, 가슴은 여전히 욱신거렸다. 하지만 할 일은 태산이었다.

우선 본가에 가져갈 짐을 여행 가방에 가볍게 꾸렸다. 리키의 애착 장난감도 잊지 않았다. 미디어에서 반려견이 먼저 아픈 곳을 알아차려, 치료를 제 때 받은 주인의 일화가 나오곤 하던데. 리키의 표정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기만 했다. 그래도 그 모습이 오히려 힘이 되었다.


회사에 간단히 사정을 전하고, 고용 복지 공단에 전화를 걸었다.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 결과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젠장. 치료가 끝나고 일을 할 수 있는 몸상태여야 받을 수 있단다. 실업급여 기한을 연장하려면 필요한 서류가 따로 있다고 했다. 안내를 받고 전화를 끊었다.


보험사에 제출할 서류도 따로 정리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암 보험을 미리 들어두었다는 사실이다. 안 그래도 보험료가 부담되어 해지를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요긴하게 쓰일 것 같았다.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이렇게 증명될 줄은 몰랐다. 되도록 알고 싶지 않은 방식이었다.


얼추 정리를 마친 뒤, 침대 위에 대자로 뻗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이제 회사 일만 정리하면 끝이 난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연재 안내

이후에는 매주 일요일 저녁 7시, 정기 연재로 돌아갑니다.

함께 걸어가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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