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는
회색빛 세상에 여러 가지 색이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게 칠해진 색 또한
찬란하지는 않았다.
정밀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이었다.
엄마와 함께 병원 대기실에 앉아서 언제나와 똑같은 병원 풍경을 둘러봤다. 예전엔 무심히 지나쳤던 환자들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였다. 암 환자가 많은 병원이라 그런가, 수척한 얼굴의 사람들이 비슷한 모자를 쓴 채 앉아있었다.
‘나도 모자를 하나 사둬야 하나... 아, 동생한테 저런 모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거나 뺏어야겠다.’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며 의자에 기대앉았다. 엄마는 옆에서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었다. 같은 모양 세 개 이상을 맞추면 사라지면서 점수가 쌓이는 게임이었다. 오늘도 여전히 사람이 많은 날이어서, 엄마의 옆에서 훈수를 두며 시간을 보냈다. 그것마저 지루해져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지던 차에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정확한 결과가 나온 덕에 암이 어디까지 퍼져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의사는 임파선까지 전이가 되었지만, 특이한 케이스로 림프전이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치료에 필요한 약물 종류와 함께 청구되는 비용 차이를 설명했다. 지금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제일 저렴한 약이 1회에 200만 원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효과가 가장 좋다고 알려진 종류는 보험 급여가 불가능해서 1200만 원까지 올랐다. 물론 그 중간 단계도 있었다. 약물 한 두 개가 비급여라서 총 500인가 600이었을 거다.
당연히 값이 저렴할수록 재발률이 높았다. 15%에서 최대로는 5%까지 줄었다. 산정특례나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건강보험이 있다지만, 가난한 사람은 정말로 최소한의 치료를 받는 것이며, 그마저도 암 치료의 경우엔 최저로 나가는 금액 또한 만만치 않음을 실감했다. 나중에 엄마에게 말했더니, 그래서 옛날에는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암에 걸리면 ‘기둥뿌리 뽑힌다’는 말을 했단다. 나는 보장이 탄탄한 보험이 있어서 중간 가격 짜리 치료를 받기로 했다. 이때까지 밝게 말하던 엄마는 더 이상 참지 못했는지 눈물을 흘리셨다.
“많이 힘들지는 않을까요..”
나는 그제야 엄마가 내 상태에 대해 생각보다 더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 또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남들 앞에서 울지 않으려는 성향은 엄마를 닮았나 보다.
그 밖의 치료 일정이나 유전자 검사 결과는 따로 이어졌다. 유전자 검사 결과는 내가 회사에 대한 안 좋은 편견만 더하게 만들었다. 유전으로 암에 걸렸을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스트레스를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는 거지. 그래도 다행히 나는 HER-2 양성이라서 표적항암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나는 암에도 종류가 있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그렇게 첫 항암 일정은 한 달 뒤로 정해졌다.
가발은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안 하려고 했다. 하지만 언제나 주변이 극성이다. 언젠간 쓸 수도 있다는 말과 엄마의 완강한 권유에 못 이겨, 결국 130만 원이나 주고 맞춤 가발을 하나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쓴 횟수가 총 5번도 안 되는데, 역시 괜히 장만했나 싶다. 나처럼 집에 있기 좋아하고 나갈 일이 별로 없다면 신중히 고려해 보길 바란다. 물론, 그런 일이 아예 안 생기는 게 제일 좋다.
아무튼, 다 커서 삭발을 한 경험은 꽤 신선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머리카락은 쭉 어깨 아래의 길이를 유지해 왔었는데, 한 순간에 싹 밀리니까 고개가 돌아가는 움직임이 가볍고 수월했다. 게다가 여름이어서 그런지 더 시원했다. 머리를 감고 나면 10분은 걸리던 드라이 시간이 30초로 줄었다. 외모에 대해 정말 하나도 신경 안 썼다면 계속 삭발로 살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론 이 말을 들으면 20대부터 탈모로 고생하던 내 지인이 서운해할지도 모르겠다.
그 밖의 많은 준비를 하면서도 정작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아직 항암 치료도 시작하기 전이었고, 몸 상태도 멀쩡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미리부터 마음고생을 시작했다. 집에 있는 음식을 하나하나 살펴보고, 과일도 비싸고 신선한 것만 골라서 장을 봐왔다. 조금이라도 시들거나 짓무른 음식은 내 입에 들어오길 허락되지 않았다. 만일 병원 영양사가 “몸에 좋다는 거 찾아서 먹지 마세요. 잘못 먹으면 오히려 해로워요.”라는 안내를 하지 않았다면, 항암에 좋다는 영양 식품들을 잔뜩 사 왔을 기세였다. 유튜브 재생 알고리즘에는 암 투병과 항암에 대한 동영상들로 가득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안 사실이지만, 엄마는 내가 죽으면 어쩌나 여동생과 함께 나 몰래 한참을 울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