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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계절 01

입원, 그리고 첫 바늘

by Vainox


가을의 도입에 들어선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햇살은 부드러웠고, 바람은 살갗을 간질였다.


그러나 내 몸은 풍요의 계절을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


그 해의 가을은,

나에겐 차가운 주삿바늘로 시작된


낯선 고통의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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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암세포 크기를 줄인 뒤에 수술을 받기로 했다.

수술 전 12번, 수술 후 6번. 그렇게 총 18회의 항암치료가 예정되었다. 다행인지, 아닌지. 내가 다니는 병원은 약을 투여할 때마다 2박 3일씩 입원이 가능했다. 다만, 당시 코로나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라 입원할 때마다 PCR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제일 최악이기는 했다. 최소 18번은 코를 쑤셔야 했으니까.


케모포트를 심는 시술도 진행했다. 항암을 할수록 혈관이 가늘어진다기에, 양손이 자유로워서 훨씬 편하다는 말에 결정한 일이었다. 부분 마취를 하기는 했지만 시술할 때의 감각은 썩 좋지는 않았다. 긴 관이 몸속을 지나가는 감각과 다소 투박했던 진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불쾌함을 견뎌낸 덕분에 이후 항암 하는 과정 동안 몸이 훨씬 편하긴 했다.


날짜가 다가오고, 준비가 더해질수록 내 마음은 두려움과 호기심이 교차했다. 나의 기억에서 살아오며 병원에 입원해 본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 자체가 묘한 호기심과 설렘을 불러일으켰다. 반면,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보던 암 환자의 치료과정을 이제 내가 직접 겪게 된다는 현실은 서늘한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입원 당일, 수속을 밟고 병실을 배정받았다. 나는 여러 명이 한 방에 있는 다인실보다는, 샤워를 편하게 할 수 있는 1인실을 선택했다. 갖고 있던 보험들을 모두 적용해서 거의 무료로 넓고 조용한 병실을 쓸 수 있었다. 누군가는 혼자 있으면 심심하지 않냐고 질문했다. 그러나 나에겐 명확한 이유가 존재했다. 우선, 엄마가 다니던 직장의 배려 덕분에 엄마 또한 2박 3일 동안 함께 머무를 수 있었다. 또한 타인과 공간을 나누며 쏟아질 동정 어린 시선과 불필요한 질문들을 애초에 마주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이건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그때의 나는 지칠 대로 지쳐있었기에 타인의 사소한 감정이라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입원실이 있는 층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1인실만 있어서인지 비어 있는 방도 있었고, 분주하게 오가는 간호사나 사람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내가 알던 북적이고 시끄러운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가 주는 평온함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바로 병실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1인 실이 궁금했던 나는 빨리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전에 걸쳐야 할 여러 가지 절차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몸무게를 재고, 코로나 검사 결과 문자도 보여줘야 했고, 환자 식별 번호가 있는 종이 띠도 손목에 차야했다. 얇은 재질의 질긴 띠는 놀이공원 자유이용권 같지도 했다. 어색함 속에서 발견한 유일한 익숙함이어서, 그 감각이 오히려 낯설게 다가왔다.


모든 준비를 마친 뒤에야 배정받은 병실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놓여있던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병실을 둘러봤다. 침대와 맞은편 벽 쪽에는 세면대와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보호자용 침대는 일반 병실보다 훨씬 폭신한 소파형이었다. 엄마와 나는 1인실에 대한 품평회를 열었다. 역시 돈을 쓰면 다르다며 웃었다. 넓어서 쾌적하고 좋다, 보호자용 침대는 그나마 덜 불편하겠다 등등. 그러고 누워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간호사분이 혈압을 재러 왔고, 결과는 환자인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매우 건강한 혈압 수치였다.


항암 약을 조제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했다. 그동안 먼저 맞아야 할 주사와 수액이 있다면서 케모포트에 바늘을 꽂았다. 나의 몸에 따끔한 느낌 하나와 함께 첫 항암이 시작되었다. 긴 링거 바늘을 팔에 꽂을 때보다 훨씬 간단하고 덜 불편했다. 문제는 고정용 테이프였다. 피부에 알레르기 반응이 생기면서 바로 거즈와 종이테이프로 교체했다. 종이 반창고는 피부에 들뜨듯 붙었고, 자꾸 간질간질했다. 투명 테이프보다 헐거워 보여 혹시나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되어서 조심조심 움직였다.


주사는 졸라덱스라는 항 호르몬제였다. 생식 세포 또한 분열이 빠른 탓에 항암제의 공격대상이라서, 그걸 최대한 줄이기 위해 맞는 주사였다. 나는 그 엄청난 위용에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 또한 저게 주삿바늘이냐며 놀랐다.


농담이 아니고 바늘 두께가 2mm는 되어 보였다.

불행 중 다행인지, 간호사분이 주사를 잘 놔줘서 크게 아프지는 않았다.


그러나 알 수 있었다.

그 한 번의 찌름으로 내 몸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계절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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