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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계절 03

그리고 시작된

by Vainox





처음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건 조용히 다가왔고,


크게 소용돌이치며

내 몸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았다.

나는 본래 나가기보다는 방에 있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평소보다 더 신선한 재료로 만들어진 건강식을 먹고, 간만의 여유에 리키와 함께 뒹굴거리며 예능 프로그램을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했다. 3년간 멀리했던 게으름과 취미들에 둘러싸인 채로 즐겁게 지냈다. 이 정도면 그다지 힘들지 않으니 할만하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그랬다.



제일 먼저 반응이 온 건 입 안이었다.

항암제의 약효가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수분이 적어지더니, 이내 텁텁해지기 시작했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입 안은 말라갔고 점점 미각을 잃어갔다. 음식을 먹으면 맛이 없는 수준이 아니다. 그야말로 무(無)의 맛이었다. 재료의 질감만 느껴지는 감각은 먹는 행위를 악몽으로 바꾸었다.


빵은 말 그대로 스펀지를 먹는 것 같았고, 두부는 지우개를 먹는 맛이었으며, 고기는 바짝 익혀먹어야 했기에 주방행주를 질겅질겅 씹는 것만 같았다.


코로나에 걸렸을 때도 이 정도로 미각이 사라지지 않았었다. 나는 암 한자가 단순히 속이 메스꺼운 이유 때문에 먹지 못하는 게 아님을 몸소 체화했다.


이전까지 먹는 일은 살아가는 기쁨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생존을 위한 의무처럼 느껴졌다. 나는 처음으로 살아있는 것사는 것이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입 안의 감각은 빠르게 무너졌고, 곧 이어지는 건 위장이었다.

겨우 욱여넣은 음식을 위장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밖으로 밀어냈다. 소화는 더디고, 채한 것처럼 뱃속이 더부룩하고 답답했다. 음식이 몸 안에서 천천히 부패하는 듯한 감각은, 마치 나 자신이 함께 썩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안 먹으면 괜찮았느냐 하면, 그건 더 최악이었다. 오히려 공복 상태가 더 위험했다. 위는 비어 있음에도 울렁거렸고, 끝내 위액이 나올 때까지 변기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간신히 위장을 통과한 음식조차 내 몸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는 일이 두려워졌고, 앉아 있는 것조차 버거워져 하루 종일 침대에 붙박여 지냈다.


먹어도 게워내고, 안 먹어도 토를 하는 통에 대체 어쩌라는 거지 싶었다. 내 몸인데 이해할 수가 없어서 짜증이 났다. 밥은 뉴*어로 때우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는 사이, 체중은 서서히 줄어들었다. 스트레스로 쪘던 살들이 줄줄이 빠져나갔고, 15kg이나 감량했다.


유일하게 좋았던 점이었다.




2주 차가 되자, 남아 있던 머리카락들이 타작한 낟알처럼 후드득 흘러내렸다.

그걸 보며 제일 처음 든 생각은 '만일 내 머리카락이 여전히 긴 상태였다면 처리가 곤란했을 것 같다'는 쓸데없는 걱정과 묘한 안도감이었다.


머리만 빠졌으면 다행이었을 거다. 그러나 얆아지고 예민해진 두피에 물집들이 잡혔다. 약의 부작용이었다. 맨머리로 베개를 베고 있는 것도 힘들어서, 나중에는 부드러운 스카프를 둘둘 두르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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