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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밤에

눈이 내렸다

by Vainox


괴로운 계절 안에서도 웃을 일은 생겼다.


그건 특별한 사건은 아니었지만

한없이 암흑 같던 시간 속을 버티게 해 준


따스한 빛이었다.




9월 말부터 시작된 항암은 어느덧 해를 넘겨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몸은 야위어가며, 그만큼 내 안의 영혼이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3주마다 나와 함께 서울로 올라오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엄마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점점 지쳐 보였다.


그렇다고 혼자 지방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 일은 나에게 무리였다. 항암 중의 체력 문제도 있었지만, 코로나 유행이 한창이던 시기라 감염 위험을 최대한 피해야 했다. 엄마가 알고 지내던 분의 친척이 암 투병 중 코로나에 걸려 끝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는, 몸을 더더욱 사려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넓은 병실은 엄마와 나뿐이라서 편하긴 했지만, 조금 쌀쌀하기도 했다.

히터의 온도를 아무리 올려도 차가운 시멘트 석조물에 베인 차가운 냉기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예민해져 있던 나는 털모자와 조끼를 입고, 담요를 둘러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잠 못 들고 뒤척이던 밤, 창문 밖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밝은 보라색으로 빛났으며, 눈은 가로등 빛에 물들어 따뜻한 주황색이었다. 병실 안에만 있던 나는 엄마에게 바람 좀 쐴 겸 밖으로 나가보자고 했다. 그날따라 병실 한편에 놓여있던 휠체어 의자가 눈에 띄었다.


"엄마, 나 저거 타고 나가도 돼?"


엄마는 흔쾌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 한 번 타봐."


담요를 덮고, 모자를 눌러쓴 채 나는 휠체어에 몸을 실었다. 그 느낌은 놀이기구에 탄 아이처럼 왠지 즐거웠다. 병실 문을 밀고 나가 복도를 지난 뒤, 1층 로비를 지나 주차장으로 나왔다. 지금 나에게 허락된 유일한 바깥 공간이었다. 공기는 생각보다 차가웠지만, 정체된 공간에만 있던 나에겐 신선한 자유였다.


우리는 주차장 안을 몇 바퀴 돌았다. 한 번은 빠르게 달리기도 했다. 차가운 바람은 얼굴을 스치고, 눈송이는 담요 위로 내려앉았다. 나는 떨어질까 봐 휠체어 팔걸이를 꽉 잡았지만 입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병자라는 사실도, 내일 다시 약을 맞아야 한다는 현실도 모두 눈 속에 묻힌 것 같았다.


차가운 겨울은, 내 기억 속 따뜻한 추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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