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자 끝
"젊은 나이라.. 나도 아니길 바랐는데, 이건... 암이네요."
책상 옆에 앉아있던 나를 보며, 머뭇거리던 의사가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이상할 정도로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치료받아야죠, 뭐.
...... 그럼, 회사도 퇴사할 수 있나요?"
가만히 숨만 쉬어도 피로가 쌓이는 계절, 여름의 습한 더위는 해를 거듭할수록 짙어졌다.
아무리 자도 졸음은 가시지 않았고, 빈혈이라도 생긴 건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길을 걷다가도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시야가 암전 되고,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여름이라 그런가, 기력이 쇠했나 보다...'
보양식도 챙겨 먹었다. 닭백숙에 더위 회복에 좋다는 수박 주스까지. 그래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야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시간은 밤 11시. 자고 난 뒤에도 바로 출근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자취방 의자에 툭, 주저앉았다. 일단 쉬어야겠다. 스마트폰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어, 엄마... 나 이제 퇴근해서. 근데 나, 진짜로 퇴사할까 봐."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 부드럽게 타일렀다. 요즘 경기도 안 좋은데, 그냥 계속 다니면 안 되겠냐고.
"야근은 다른 회사도 다 해. 특히, 네가 다니는 업계는 원래 그래."
"...... 알았어, 일단 끊어. 이제 씻으려구."
'하지만'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그냥 침잠했다. 몇 번을 말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을 테니까.
엄마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무턱대고 퇴사한 뒤에 이직을 쉽게 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래도, 매일같이 야근을 1년 가까이 시키는 회사는 흔치 않잖아.' 속으로 불평했다. 긴 한숨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가슴 한쪽은 왜 이렇게 욱신 거리는 건지. 불편한 감각이 피곤한 몸을 괴롭히니, 짜증 섞인 표정으로 아픈 곳을 만졌다.
'... 어?'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예전에 한 방송에서 봤던 유방암 진단 장면이 떠올랐다. 가슴에 멍울 같은 게 만져지면 병원에 가라는 유명 사회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함께 재생되었다.
'설마 아니겠지. 그래도 몸에 이상은 있는 거니... 병원은 가야겠다.'
잘하면 연차각이다. 조금 힘이난 나는, 다시 스마트폰을 들어 병원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틀 뒤, 병원 특유의 소독약과 환자 냄새로 가득한 진료 대기실에 앉았다. 얼마나 기다려야 될지 가늠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꽤 규모가 있는 종합병원이라 그런가, 건강검진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하지만 주로 보이는 건 가슴에 병이 있어서 치료받으러 온 환자들이었는데, 대부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다.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다.
지루한 대기 시간이 길어질수록 쏟아져오는 졸음을 쫓기 위해 SNS 앱을 실행했다.
언제나처럼 사람들의 일상과 생각들, 그리고 귀여운 반려동물 사진까지. 다양한 삶의 모습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으로 스크롤을 내리면 내릴수록, 중독성 있는 짧은 음과 함께 새로운 글이 갱신되었다. 웃기거나 재미있는 글에는 하트도 찍고, 나도 간단하게 글을 올렸다. 주변의 소음이 무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질때 쯤― 드디어 내 이름이 호명됐다.
"다음 환자분, 들어오세요."
감정 없는 직원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조심스럽게 진료실의 문을 열었다.
의사 선생님은 생각보다 젊었고, 대기실에 걸려있던 사진보다 훨씬 예뻤다. 부드러운 인상의 모습에 긴장했던 몸도 풀리는 듯했다. 혹시 이 글을 보시게 된다면... 기분 나쁘진 않으셨으면 좋겠다.
간단한 진찰 후에, 의사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일단 나이도 아직 젊고, 그러니까... 조직검사를 해봐야 더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질문을 하거나 불안한 게 정상이겠지만, 내 유일한 걱정은 '맘모톰 검사가 많이 아프진 않을까' 뿐이었다.
진료실을 나와 안내받은 탈의실로 향했다. 상의를 갈아입고 다시 영겁 같은 시간이 지났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귓가에 내 이름 석자만큼은 너무나도 잘 들렸다. 떨구기 직전인 소지품을 챙겨서 검사실로 들어갔다.
작고 어두운 방 안에는 옅은 주황빛이 깔려있었다. 침대에 누워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니, 맘모톰에 대한 걱정이 사라질 만큼 편안한 분위기였다. 대신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이런 방에서 자면, 정말 푹 잘 수 있겠다.'
곧 안쪽 문이 열리고, 검사를 전문으로 하는 분이 들어왔다. 보조 간호사로 보이는 분들의 지시에 맞춰 몸도 살짝 들었다가 한쪽 팔도 위로 쭉 뻗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분위기라 그런지 느슨해졌던 몸이 다시 긴장했다. 발가락 끝을 교차하며 살짝 꼼지락거렸다. 전문가의 부산한 몸짓 뒤로 기다란 막대 같은 무언가가 언뜻 비췄다. 이내 검사기계가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눈을 꼭 감았다.
탕-, 하고 강하게 튕기는 소리가 몇 번 울린 뒤에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오른쪽 가슴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끌어안은 채, 검사실의 아늑한 분위기에서 벗어났다. 대기실에 있던 것보다 훨씬 편해 보이는 의자에 앉아서 지혈했다. 목에 걸린 타이머가 울리고 나서야 나는 병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피곤하다, 얼렁 집에 가서 쉬어야지.'
내 머릿속은
이게 전부였다.
검사 결과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틀 정도 지났을 때쯤, 예약시간에 맞춰 병원으로 향했다. 여전히 지옥 같은 야근에 시달리고 있던 나는 소중한 연차를 병원 가는데 써야 한다는 아쉬움 반, 그래도 쉴 수 있다는 기쁨 반으로 병원 대기실에 앉았다. 병원의 풍경은 저번과 별 다르지 않았다. 곧 내 차례가 오면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검사 결과가 어떨지 이제야 조금 궁금해졌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채 의사 선생님의 말을 기다렸다.
"젊은 나이라.. 나도 아니길 바랐는데..."
책상 옆에 앉아있던 나를 보며, 의사 선생님이 머뭇거렸다. 짧은 한숨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묻어있었다.
그리고 더 미뤄서 좋을 것 없다는 듯, 검사 결과가 나온 화면을 띄우며 말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암이네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이상할 정도로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미소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요? 치료받아야죠, 뭐.
...... 그럼, 회사도 퇴사할 수 있나요?"
만 나이 스물일곱,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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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4화까지는 주 2회(화 7시, 일 5시)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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