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 그때의 너에게 : 시간을 건너 쓰는 편지

26회. 퇴색해도 사라지지 않는

by 하오빛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낙엽을 밟고 싶은 마음에

아직 가을의 풋풋한 풍치가 남아 있는 곳을 찾아

벤치에 조용히 앉았다.


마치 나의 마음을 안 듯

귀뚜라미 한 마리가 반갑게 울어준다.


비록 익지 못한 채

제멋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떨어진 열매였지만,

그 모습 속에도

가을빛은 분명히 머물고 있었다.


가을 앞에 선 고목 하나,

이젠 가지만 앙상하게 남겨둔 채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묵묵히, 위엄 있게 서 있다.


한때 푸르름으로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던 나무였을 텐데,

지금은

마치 귀찮다는 듯

잎을 한 장, 또 한 장

조용히 내려놓고 있었다.


잡풀 위로 떨어진 낙엽들은

푸르던 빛을 잃고

이제는 주인을 잃은 듯

구석구석을 뒹군다.


그 낙엽을 바라보니

왠지 그 마음이

지금 나의 마음처럼 느껴져 괜스레 괴롭다.


잊히는 얼굴이

천천히 퇴색되어 가는 것처럼,

너의 빛도

조용히 사라지고 있구나.


지금의 나, 그때의 너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그때의 너야,


가을이란 계절은

이별의 말을 고요하게 전하는 방식으로

자연을 바꾸어 놓곤 하지.


익지 못한 열매도,

떨어진 잎도,

그저 지나쳐버릴 수 있는 것들이지만

너는 거기서

멈춰 서서 마음을 보았구나.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한때 푸르던 그 고목처럼,

너도 어느 시절

빛나던 날이 있었지.


이제는 조금 지쳐

조용히 마음을 내려놓고 싶었던 순간이었을지도 몰라.


그런 너의 마음이

낙엽 속에서, 고목 속에서

조용히 들려오더라.


그래서 지금의 나는

네가 그 계절을 사랑했고,

그 변화 속에서도

스스로를 놓지 않으려 했음을 알아.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이유기도하고


참 다정하고,

참 단단했던 너야.


하오빛 라디오 청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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