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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지는 나보다 드러나는 나

판단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결국, 자기 자신을 마주하기 때문

by 정수필

많은 사람들이 남들이 뭐라 할까 봐 행동을 멈춘다.

하지만 정말 그게 이유일까?
나는 오히려, 판단보다 투명해짐이 무섭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판단보다 투명해지는 것이다


과거 나는 영화광이었다.
2년 동안 320편의 영화를 봤다.
이틀에 한 편 꼴이었다.


스크린 속 인물들의 대사, 조명, 침묵까지 몰입했다.
그런데 영화를 많이 볼수록

어느 순간부터 나만의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났다.


자주 속삭였다.

“저 장면에서 나라면 이렇게 썼을 텐데...”


그래서 실제로 시나리오를 써봤다.
그런데 쓰는 일보다 멈추는 일이 더 많았다.
그 이유가 내가 쓰는 문장들이 너무 내 이야기 같고
너무 나를 드러내는 것 같아서.


그때 깨달았다.
나를 막는 건 투명해지는 두려움이었다.


판단은 외부의 시선이지만 투명함은 내면의 노출이다.


우리는 흔히 남들이 뭐라 할까 봐 멈춘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다르다.


사람들이 나를 보게 되는 순간이 두려운 거다.
판단은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던 부분이 비춰질 때
그건 벌거 벗은 기분이다.


창작은 결국 나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행위다.
내 문장, 내 세계, 내 감정이
스크린처럼 펼쳐지는 것.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한 권의 책보다
1페이지의 진심을 쓰기가 더 어렵다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이 이해됐다.


판단의 두려움은 자기 인식의 두려움이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나는 남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못 하겠다."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 때문일 때가 많다.


남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다시 보게 된다.

그 순간의 고통이 두려운 거다.


나는 글을 쓰며 내 안의 여러 나를 마주했다.
감정이 과장된 나, 도망치는 나, 인정받고 싶은 나.
그중 어느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두려워하는 건

보여지는 나보다 드러나는 나다.

판단은 외부의 소음이지만
투명함은 내면의 울림이다.


거울의 법칙


나는 종종 영화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저렇게까지 솔직하게 시나리오를 써는가?"
그 말 안엔 진심이 숨어 있었다.
나는 아직 그렇게 솔직할 용기가 없다.


남을 판단하는 건

결국 내 투명함의 한계선을 보여주는 일이다.

내가 타인의 솔직함을 불편해할수록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감추고 있다는 뜻이다.


투명함은 연습이다.


지금은 안다.
투명함은 타고난 성향이 아니다.
조금씩 매일 연습하는 결과다.


하루에 한 문장이라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써보는 것.
한 줄이라도 완벽하지 않은 문장을 세상에 내보내는 것.


그게 쌓이면 어느 순간

보여지는 두려움보다 감추는 피로감이 커진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투명해진다.


완벽함보다 투명함을 선택하라.


완벽한 시나리오는 사람을 감탄하게 한다.
하지만 투명한 시나리오는 사람을 멈추게 한다.


"이건 내 이야기 같아."

그 한마디가 진짜 설득이다.


완벽함은 매끄럽지만 차갑다.
투명함은 불완전하지만 따뜻하다.
그리고 따뜻한 건 오래 남는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쓴다.


이제는 지우지 않는다.
오글거려도, 진지해도, 허술해도.


판단을 피하려 하지 말고

투명함을 연습한다.
투명해질수록 덜 완벽해지고
덜 완벽해질수록 더 인간적이 된다.


인간적인 건

이상하게도 가장 강력한 설득이다.



사람들은 남의 판단이 두려운 것보다

그 판단을 통해 자기 진심이 들킬까 봐 두려운 거다.


판단은 외부의 시선이지만

투명함은 내면의 정직함이다.


그래서 진짜 용기는

투명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투명해지는 순간, 우리는 남이 설계한 인생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버전을 쓴다."

- 정각(正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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