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원리
4월 초, 중간고사를 앞두고 학생들은 눈에 띄게 바빠지게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의 경우 많은 과목을 듣다보니 요즘은 고3보다도 내신 준비가 더 바쁘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고전과 윤리는 중간고사를 치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에게는 그나마 마음을 편히 먹을 수 있는 시간인 것 같았다.
오늘의 주제는 ‘공리주의’이다. 유명한 사상인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의 원리를 중심으로 윤리적 기준을 세우고자 했다. 공리주의에 대한 구절을 읽고, 가장 큰 공리주의에 대한 비판인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해도 괜찮은가?’에 대해 질문했다. 공리주의라면 그 결과로 최대 다수의 행복을 증진시킨다면 소수의 불이익도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시험에 준비에 지친 아이들을 위해 영화 요약을 틀어주며 딜레마 상황을 제시했다. 틀어준 영화는 ‘아이 인 더 스카이’. 예전에 나온 영화지만, 윤리적 딜레마를 잘 표현했다. 영화 속에서 군인들은 쇼핑몰 테러를 준비하는 테러리스트를 발견한다. 이들을 폭격하면 최소 100명의 민간인 희생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들이 숨어있는 민가 근처에 무고한 소녀 ‘알리야’가 빵을 팔고 있다. 이 상황에서 군인들은 폭격을 해야 할까? 폭격을 하면 테러를 막을 수 있지만 무고한 소녀가 죽고, 폭격을 하지 않으면 민간인을 대상으로 테러가 발생해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폭격을 해야 해? 말아야 해?” 이 질문에 다양한 입장이 나왔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거 같아요. 여러 명이 죽는 것보다 폭격을 하는 게 맞아요.”, “소녀가 죽지 않게 위력이 약한 폭탄은 없나요?”, 등등 소녀가 안타깝지만 대부분은 폭격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공리주의의 입장과 동일하게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다.
학생들의 주장에 공감이 되었다. 직관적으로 판단해도 단 한명을 위해 여럿을 희생시키는 것은 불합리한 선택인 것 같다. 평소에 어떤 선택을 내릴 때도 소수보다는 다수를 더 우선적으로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모두들 뭔가 이런 선택에 대해 찝찝함, 불편함을 느낀다. 그 이유는 다수를 위한 선택이 합리적이라고는 보통 생각하지만,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공리주의의 입장에는 뭔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누구나 사회에서 소수자가 될 수 있고, 나의 희생으로 모두의 행복이 증진된다면 그것은 다른 모두에겐 좋은 일이지만 나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정말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보았을까? 공리주의자 벤담이 거리의 부랑자들을 한 곳의 시설을 모아 관리하자고 주장한 것은 유명하다. 이 주장이 마치 거리의 부랑자들의 자유를 희생시켜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키고자 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사실 이들의 거주와 자립을 도와주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비판을 피할 수 없긴 하다.) 또 다른 공리주의자 밀은 공리주의자와 동시에 자유주의자로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정당화하진 않았을 것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이야 말로 장기적으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누군가의 희생은 불가피할 때가 있다. 나도 담임을 하면서 학급에서 소수의 의견을 묵살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소수의 희생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소수의 희생을 기억하고 다음 상황이나 다른 기회에서 그들을 고려하는 방향이 바람직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