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장: 해질녘의 질문, 그리고 녹슨 왕관의 무게

by DrLeeHC

제18장: 해질녘의 질문, 그리고 녹슨 왕관의 무게


벤치로 다가오는 그림자, 침묵의 전조


며칠이 지난 해질녘이었네.

코트에는 이제 몇 사람 남지 않았고, 나는 마지막 남은 위스키로 목을 축이며 하루를 정리하고 있었지.

해는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코트의 붉은 흙은 황금빛으로 물들었어.

낮의 뜨겁던 활기는 잦아들고, 바람마저 고요한 숨을 고르는 시간이었다네.


그때였어.

내 옆으로 익숙한 그림자 하나가 길게 드리워진 것을 보았네.

나는 고개를 들었지.

왕 노릇하던 패거리들의 우두머리, 감씨였네.

그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지만, 그 모습은 어딘가 초라하고 지쳐 보였다네.


한때 코트의 왕처럼 군림하던 그의 어깨는 이제, 여느 힘없는 늙은이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지.

오히려 더 무거운 짐을 진 듯 축 늘어져 있었어.

그의 등은 구부정했고, 걸음걸이마저 힘이 없었다네.


그는 한참을 내 옆에서 머뭇거렸어.

마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혹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의 눈빛은 갈 곳을 잃고 허공을 헤매는 듯했다네.


한때는 오만함과 독기로 가득했던 그 눈빛에서, 이제는 깊은 회한과 알 수 없는 불안감만이 읽혔어.


그는 벤치에 앉지도 못하고 그저 내 옆에 서서, 저 멀리 3번 코트에서 라켓을 정리하는 한정우의 뒷모습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네.

그의 침묵은 코트의 고요함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어.

그 침묵 속에는 지난 세월 그가 저지른 모든 오만과 독선이 담겨 있는 듯했지.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침묵을 받아주었다네.

늙은 이야기꾼은 때로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위스키 한 모금이 목을 타고 넘어갔어.


쌉쌀한 위스키 맛 속에서, 나는 그의 복잡한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네.


왕의 무너진 자존심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마침내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고, 마치 모래알 섞인 듯 거칠었다네.

시선은 여전히 저 멀리, 홀로 장비를 정리하는 한정우를 향해 있었지.

그의 눈빛에는 간절함과 함께, 지울 수 없는 번민이 깃들어 있었어.


"서 영감님."


그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평소의 호령과는 너무나 달랐어.

굴욕감마저 느껴지는 나지막한 목소리였다네.


"평생을 여기서 공을 치셨으니, 뭐든 저보다 잘 아시겠지요."


나는 그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어.

그저 위스키 잔을 한번 기울일 뿐이었지.

그는 내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듯, 다시 말을 이었어.


"저 친구들처럼 치려면...

아니, 저렇게... 저렇게 즐겁게 테니스를 치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제가… 제가 무얼 잘못했기에, 이렇게 모든 게 변해버린 겁니까?"


그의 질문은 테니스 기술에 대한 것이 아니었어.

자신의 백핸드가 약해서 지는 걸 묻는 게 아니었다네.

그건 지난 세월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한 패배자의 처절한 물음이었지.


자신이 평생을 바쳐 지키려 했던 왕국이 무너지고, 자신이 경멸했던 방식이 승리하는 현실 앞에서, 그는 길을 잃은 듯 보였다네.


그의 눈에는, 승리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자의 뒤늦은 후회가 가득했어.

지난 세월 그가 내쳤던 박 사장의 얼굴, 젊은이들의 실망했던 뒷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텅 비어 스산해진 메인 코트의 적막함이 그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했다네.


그의 목소리는 갈수록 작아졌고, 마지막 질문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길을 묻는 어조였다네.


코트의 왕이, 가장 낮은 자세로 도움을 구하는 순간이었지.


나는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네.


그 속에서 빛나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어둠 속에 갇힌 작은 등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는 인간의 고뇌만이 보였어.


그의 질문은 비단 테니스 코트만의 문제가 아니었지.


그것은 우리네 삶 속에서 늘 마주하는, '무엇이 진짜 가치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었다네.



가장 낮은 자세로 건넨 백기, 그리고 새로운 희망의 여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대신, 그가 바라보고 있는 한정우 쪽을 똑같이 바라봐 주었지.

나의 시선은 그에게 '답은 저기에 있다'고 말하려 했네.


그것으로 충분했어.


감씨의 그 질문은, 한정우의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


상대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하수의 승리야.

진정 강한 자는 물리적인 힘으로 상대를 누르는 것이 아니었지.

상대가 스스로 걸어와, 당신의 방식이 옳았음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고수의 승리지.


한정우는 칼 한번 휘두르지 않고, 말 한마디 크게 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진심과 묵묵한 행동으로 감씨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그의 마음속에 깊은 파문을 일으킨 게야.


감씨는 더 이상 묻지 않았네.

그는 나의 시선을 따라 다시 한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어.

한낮의 햇살이 마지막 힘을 다해 코트를 비추는 해질녘,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경멸하고 무시했던 한 사내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바라볼 뿐이었어.


그 모습은 마치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은 배가 멀리서 등대 불빛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보였다네.


그의 어깨는 더욱 축 처졌고, 고개를 떨구는 모습은 마치 세상의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진 듯했다네.


그것은 그가 내건, 가장 낮은 자세의 백기였네.

항복 선언이었지.


늙은 왕이 마침내 자신의 왕관을 내려놓는 순간이었다네.


그 순간, 나는 위스키 한 잔을 단숨에 비웠어.


쌉쌀하면서도 희망적인, 알 수 없는 깊은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네.


코트 위에는 승자의 여운과 패자의 그림자만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나는 그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시작의 작은 불씨를 보았다네.


어쩌면 감씨의 그 처절한 질문이,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새로운 바람을 들여오는 첫걸음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 말이야.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는, 그런 희망.

그날의 해질녘은 유난히 길고, 그 여운은 깊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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