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장: 열리는 문, 새로운 물결

by DrLeeHC

제19장: 열리는 문, 새로운 물결


두 면과 한 면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의 시작


그 해 가을이 깊어갈 무렵, 코트에는 아주 조용하지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네.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듯, 사람들의 마음을 적시는 변화였지.


어느 날 오후, 감씨가 처음으로 본무대가 아닌, 저 외로운 한 면짜리 공화국 코트로 건너왔어.

그의 발걸음은 여느 때처럼 당당하지 않았네.

오히려 망설임과 함께 조심스러움이 묻어나는 발걸음이었다네.

코트를 지배하던 '왕'이 스스로 '이단아'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지.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내 눈을 비볐어.

꿈이 아닌가 싶었다네.


그는 경기를 청하지 않았어.

라켓을 들지도 않았고, 평소처럼 훈수를 두지도 않았네.

그저 한정우에게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어.

그의 목소리에는 어색함과 함께, 그가 평생 쌓아 올린 자존심을 내려놓는 듯한 진심이 배어 있었다네.


"한정우 씨.

제가... 제가 좀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 두 손으로 치는 백핸드 말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 친구들처럼...

저렇게 즐겁게 테니스를 치는 법을 말입니다."


그의 입에서 '배운다'는 말이 나올 줄이야.


평생을 가르치고 군림하려던 자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이었지.


그의 목소리에는 지난 세월의 후회와, 새로운 것을 향한 희미한 갈증이 함께 묻어나는 듯했다네.


한정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어.

그의 얼굴에는 어떤 우월감도, 비웃음도 없었지.

그저 잔잔한 미소만이 떠올랐다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말이야.


그리고 '어울림의 마당' 사람들은 묵묵히 그에게 자리를 내어주었어.

아무도 놀라지 않았네.

그들은 이미 한정우의 '두 손 테니스'가 단순히 기술을 넘어선 '환대'와 '포용'의 철학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감씨가 어색하게 라켓을 고쳐 잡는 동안, 한정우는 그의 자세를 잡아주었어.


공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두 손으로 정성껏 밀어주는 감각을 가르쳤지.


그 모습은 마치 늙은 사냥개가 길 잃은 어린 양에게 낯선 길을 안내하는 것과 같았다고나 할까.


그날 이후, 두 면과 한 면을 가르던 보이지 않는 성벽은 완전히 허물어졌네.

마치 오랜 세월 쌓아 올린 견고한 담장이 무너져 내리듯, 코트의 풍경은 기적처럼 변했다네.


이제 사람들은 코트를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섞여서 운동을 했지.


기존 동호회 회원들이 3번 코트에서 초보자들에게 자세를 가르쳐주기도 했고, '어울림의 마당' 청년들이 1, 2번 코트에서 고수들과 어울려 경기를 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어.


코트에는 더 이상 '메인 코트'나 '외딴 코트'라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졌네.


그저 '우리들의 코트'만 남았을 뿐이었다네.


그들의 웃음소리는 이제 서로 다른 코트의 경계를 넘나들며, 아파트 전체를 감싸 안는 하모니가 되어 울려 퍼졌지.


한정우는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해줬어.

지가 아스날이라는 축구 팀을 무지 좋아한다더군.

그 팀의 모토가 'Victoria(빅토리아) Concordia (콘코르디아) Crescit(크레스치트 )'라나 뭐라나 ...

라틴어라는데 나야 알리가 없지..

자기는 그 말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지.

그래서 그 팀을 너무나 사랑하게 됐다고 하더구만


"영감님, 그게 말이죠, '승리는 조화 속에서 자라난다'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하모니, 그러니까 ... 음... 어울림... 속의 성장을 말하는 거죠.

이 코트도 결국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애길 들을 때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


그의 말이 맞았어.




새로운 세대가 코트의 주인이 되다, 그리고 잊혔던 즐거움의 재발견


코트의 권력은 이제 완벽하게 이동했다네.

아니 권력이라는 것이 사라졌다고 해야 더 맞는 말이겠군.

사람들은 더 이상 왕 노릇하던 패거리들과 공을 치고 싶어 하지 않았지.

그들의 권위는 이미 바닥에 떨어졌고, 그들의 테니스에서 '즐거움'이라는 진짜 가치가 사라진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대신, '어울림의 마당' 사람들과 한 게임이라도 더 하려고 줄을 섰네.

그들의 꾸준하고 아름다운 테니스, 그리고 상대를 배려하는 따뜻한 매너는 이제 수성 아파트 코트의 새로운 표준이 되었으니까.


진정한 가치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법이지.


예전의 패거리들은 이제,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자신들의 순서를 기다리거나, 새로운 세대에게 한 수 배우는 겸손한 학생들이 되었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해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어.


파리채 발리 대신 길고 부드러운 랠리를 배우며, 승패에 얽매이지 않는 테니스의 순수한 즐거움을 다시 맛본 게지.


그들은 권력을 잃었지만, 대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배움'의 즐거움과 '함께' 하는 기쁨을 되찾았을지도 모를 일이지.


마치 오랜 시간 굳게 닫혔던 서랍장이 열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보물이 다시 햇볕을 보는 것처럼 말이야.


코트는 이제 특정 소수의 놀이터가 아닌, 모두의 배움터이자 즐거움의 터전이 된 게야.


새로운 세대가 코트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과정은 놀라웠네.

어리숙했던 대학생은 이제 코트의 에이스가 되어, 처음 라켓을 든 이웃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었지.

젊은 부부는 자신들처럼 테니스에 서툴지만 열정 넘치는 가족들에게 먼저 다가가 함께 공을 쳤어.


그들은 한정우가 보여준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네.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 테니스를 대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법을 말이야.


코트에는 언제나 새로운 웃음소리가 피어났고, 그 웃음소리는 코트의 활기찬 미래를 예고하는 희망가처럼 들렸다네.


함께 땀 흘리며 다시 쓰는 규칙, 영원히 흐르는 강물처럼


얼마 뒤, 아파트 게시판의 낡은 '테니스장 이용 수칙'이 조용히 사라졌어.

마치 오랫동안 묵은 때를 벗겨내듯 말이야.


그 낡은 수칙은 고작 몇 줄 안 되는 문구로 이뤄져 있었지.

'입주민 카드 소지자만 코트 이용 가능' 이라며 사람을 가르고,

'공동주택관리법 어쩌고' 하며 복잡하고 알 수 없는 말로 지들 이익만 지키려 했던, 차갑고 배타적인 내용이었어.

누가 봐도 사람의 온기라곤 없었지.


그리고 그 자리에는, '우리들의 약속'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글이 붙었네.


그것은 관리사무소가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 아니었어.


코트를 이용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모여, 한정우를 중심으로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며 만든 것이었어.

그 안에는 길고 복잡한 법 조항 대신, 짧고 따뜻한 다짐만이 적혀 있었다네.


'초심자를 배려합니다.'

'승패보다 랠리의 즐거움을 소중히 합니다.'

'서로에게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코트의 흙먼지는 함께 치웁니다.'

'모두가 코트의 주인임을 잊지 않습니다.'


지키지 않을 명분만 가득했던 이전의 수칙과는 달랐어.


이것은 약속이었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다짐이었다네.

가장 좋은 규칙은 두꺼운 책이 아니라, 함께 땀 흘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지는 법이라는 걸, 나는 그때 다시 깨달았다네.


눈에 보이는 규정보다, 마음을 움직이는 가치가 더 오래가는 법이니까.


이제 코트는 성벽을 쌓아 지켜야 하는 왕국이 아니었네.


그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물이 흘러들어와야 하는 강물과도 같은 것이었지.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강물은 언제나 생명으로 가득한 법이니까.


왕 노릇을 하던 그 패거리들은 그 단순한 이치를 몰랐던 게야.


그들은 흐르는 물을 막으려 했고, 결국 자신들의 물줄기를 말려 버린 셈이지.


나는 벤치에 앉아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깊은 만족감에 젖었다네.


내 보온병 속 위스키는 이제 거의 비어 있었지만,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충만했어.


코트 위에서 펼쳐지는 젊은이들의 활기찬 랠리, 나이 든 이들의 너털웃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한정우의 묵묵한 노력.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듯했다네.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그 시대의 시작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늙은 이야기꾼에게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나.


코트의 이야기는 이제 진정으로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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