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장: 작가의 마지막 책임
1. 깨어진 결혼, 무너진 자부심 (차지원의 완전한 절망)
세상은,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차지원의 집 안은, 깊은 바닷속처럼, 고요했다.
그녀는 지난 며칠간, 세상과 자신을 분리했다.
두꺼운 암막 커튼은, 한낮의 태양마저 희미한 회색빛으로 걸러냈고, 그녀는 모든 전화기의 전원을 꺼두었다.
인터넷은, 그녀에게 더 이상 지식의 창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영혼을 물어뜯는 수만 마리의 하이에나가 우글거리는, 거대한 아프리카의 평원이었다.
그녀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용기가 없었다.
그녀의 시간은, 부서진 시계처럼,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소파에 누워, 몇 시간이고, 천장의 무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먹는 것을 잊었다.
그녀는, 자는 것을 잊었다.
그녀는, 생각하는 법마저, 잊어버리려 애썼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녀의 실패를 증명하는 증거물처럼 보였다.
서재를 가득 채운 책들은, 현실 앞에서 무력했던 그녀의 지성을 조롱했다.
벽에 걸린 아스날 머플러는, ‘조화’를 믿었던 그녀의 순진함을 비웃었다.
그리고 남편 김민준.
그는, 이 모든 비극의 가장 가까운 목격자이자, 그녀의 마지막 남은 인간적인 연결 고리였다.
하지만 그 연결 고리는, 이미 썩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는, 며칠째, 아내를 피해 다녔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일상을 망가뜨린 원흉이라는 듯, 짜증 섞인 한숨과, 비난이 담긴 침묵으로 그녀를 대했다.
그는 며칠 전 저녁, ‘클로이’라는 여자를 만나고 온 뒤부터,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그의 눈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기이한 희망과, 초조한 비밀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그는, 아내가 아닌, 다른 세상을 보고 있었다.
차지원은, 그 모든 것을 느꼈지만, 아무것도 물을 힘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이 끔찍한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날 저녁, 김민준은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케이크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뜬금없어서, 오히려 불길한, 사죄의 제물처럼 보였다.
“자기야.”
그가, 어색한 미소로 그녀를 불렀다.
“많이 힘들지.
우리, 오늘 저녁엔, 아무 생각 말고, 그냥 TV나 보면서 케이크 먹자.
응?”
그의 갑작스러운 친절이, 낯설었다.
하지만 차지원은,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주 잠시라도, 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는, 어쩌면 이것이, 남편이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화해의 신호일지도 모른다고, 애써 믿고 싶었다.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하지만 그들의 몸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협곡이 존재하고 있었다.
김민준은,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그리고, 마치 우연인 것처럼, 한 종합편성채널의 저녁 메인 뉴스에 채널을 멈췄다.
“네, 오늘 저녁 가장 뜨거운 소식으로, 시작합니다.”
앵커의 비장한 목소리가, 거실의 침묵을 갈랐다.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미래 설계자들’ 음모론의, 충격적인 진실이, 마침내 수면 위로 드러났습니다.
저희 한국일보는, 이 모든 사건이, 정론일보 이수연 기자의, 치밀한 계획 아래 조작된, 희대의 사기극이었음을, 단독으로 확인했습니다.”
차지원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조작?'
'사기극?'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화면이, 바뀌었다.
앵커는, 이 모든 진실을 밝혀줄, 용기 있는 증인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첫 번째 증인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김민준이었다.
자신의 남편.
지금, 바로 그녀의 옆에 앉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화면 속의 김민준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의 배경은, 그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그 낡은 미술학원 교실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절망으로 떨리고 있었다.
“저는… 괴물이었습니다.
저는, 제 아내를, 제 손으로 직접 지옥에 밀어 넣었습니다.”
차지원은,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진짜 김민준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오직 화면 속의, 눈물 흘리는 자기 자신만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 속의 김민준이, 말을 이었다.
“‘클로이’라는 이름의 그 여자… 정론일보 이수연 기자는, 저의 초라한 자존심을 이용했습니다.
그녀는, 저의 예술을 칭찬하며, 저를 후원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의 과거 상처를, ‘표절’이라는 끔찍한 거짓말로 둔갑시키도록, 저를 유도하고, 또 협박했습니다.
그녀는, 제 아내의 일기장까지, 저에게서 훔쳐 갔습니다.
모든 것은, 그녀가 만들어낸, 거대한 사기극이었습니다.”
차지원의 뇌가, 정지했다.
일기장.
그녀가, 대학원 시절, 그 끔찍한 일을 겪고 나서, 자신의 모든 고통과 상처를 기록했던, 단 한 번도 남에게 보여준 적 없었던, 그녀 영혼의 가장 내밀한 기록.
김민준은, 그것을, 이수연에게 넘겼던 것이다.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이수연에게 당한, 그 잔인한 표절 의혹 공격의 출처가, 바로 자신의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를, 자신의 남편이, 적의 손에 쥐어진 칼로 만들어, 자신의 심장을 찌르게 했다는 사실을.
그녀의 눈앞에서, 세상의 모든 색깔이, 사라지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노진석 교수와, 박형사가, 차례로 등장하여, 이수연이 어떻게 자신들을 회유하고 협박했는지를, 눈물로 ‘증언’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한, 하나의 연극이었다.
그리고 그 연극의 대본은, 이수연의 몰락이었다.
차지원은, 이제 알 것 같았다.
이것은, 진실이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더 거대한 권력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판을 정리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이수연이라는, 너무 위험해진 장기 말을, 체스판 위에서 치워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 자신의 남편은, 그들의 새로운 연극을 위한, 가장 유용한 소품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뉴스가, 끝났다.
화면 속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화려한 자동차 광고가 시작되고 있었다.
김민준은, 천천히, 리모컨으로 TV를 껐다.
거실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것은, 시체가 가득한 전쟁터의, 그런 종류의 침묵이었다.
차지원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편을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마치, 오래된 무덤 속에서, 바람이 새어 나오는 소리 같았다.
“왜.”
그녀가 물었다.
그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이었다.
김민준은, 그녀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는, 바닥을 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당신을 지키고 싶었어.
이수연, 그 여자는 괴물이야.
그 여자가, 당신을 완전히 망가뜨리기 전에, 내가 먼저,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만 했어.
이게, 최선이었어.
우리를 위한.”
그의 변명은, 너무나 비겁해서, 오히려 투명하게, 그의 진짜 욕망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 아내를 팔아넘긴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성공과,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아내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긴 것이다.
차지원은, 소파에서, 아주 천천히, 낡은 인형처럼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남편 김민준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이제 그녀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 놓여 있지만, 그녀의 시선에는 더 이상 포착되지 않는, 투명한 유령과도 같았다.
그의 숨소리, 그의 당황한 움직임,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려는 비겁한 변명의 첫 음절.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의식이라는 이름의 두꺼운 유리 벽을, 뚫고 들어오지 못했다.
차지원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서재로 향했다.
그녀의 등 뒤로, 김민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필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지원아…”
하지만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서재의 문을 닫고, 잠갔다.
그녀는, 자신의 요새 안으로, 아니, 자신의 무덤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철컥.’
그녀는, 문고리를 돌려, 문을 잠갔다.
그것은, 바깥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무덤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마지막 의식이었다.
그녀는, 책상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창조주로서의 죄책감.
그녀는, 괴물을 만들었다.
지식인으로서의 절망.
그녀의 지성은, 무력했다.
이상주의자로서의 환멸.
그녀의 신념은, 파괴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 개인으로서의 고립감.
그녀의 마지막 보루였던, 사랑과 신뢰마저, 가장 추악한 방식으로, 배신당했다.
그녀에게는, 이제, 정말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의 귀에, 거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이 들려왔다.
김민준이, TV 채널을 돌리는 소리.
그가,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
그가, 소파 위에서, 몸을 뒤척이는 소리.
그는, 아직 저곳에 있었다.
그녀의 집.
그들의 집.
아니,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의 집이 아닌.
그녀는, 지난 10년의 결혼 생활을 떠올렸다.
그의 재능을 믿었던 순간들.
그의 열등감을, 위로했던 밤들.
그의 불안을, 다독였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이제는 거대한 기만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사랑을, 신뢰를, 그리고 가장 내밀한 고백이었던 그녀의 일기장까지, 모두 적에게 팔아넘겼다.
자신의 성공이라는, 그 초라한 대가를 위해서.
그녀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 단단하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슬픔은, 이미 오래전에, 그 임계점을 넘어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모든 것이 파괴된 뒤에 찾아오는, 텅 빈 공허와, 그 공허 속에서 피어나는, 서늘한 평온뿐이었다.
그녀는, 이제,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그녀를 이 세상과 연결하고 있던, 마지막 끈마저, 그녀의 손으로 직접, 끊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책상 의자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
바로 그 순간, 그녀의 내면에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명예도, 사랑도, 미래도.
그녀를 얽매고 있던 모든 족쇄가, 풀려버린 것이다.
그녀의 텅 빈 내면을, 죄책감과 절망이 빠져나간 그 자리를, 아주 작고, 차가운 불씨 하나가, 채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복수심도 아니었다.
그것은, ‘작가의 마지막 책임’이라는 이름의, 서늘한 의무감이었다.
그녀는, 전원을 끈, 검은 모니터 화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화면 속에는, 낯선 여자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텅 빈 얼굴.
그녀는, 울지 않았다.
눈물은, 이미 오래전에, 모두 말라버렸다.
그 완전한 허무와, 완전한 절망의 바닥에서.
아주 작고, 차가운 무언가가, 그녀의 내면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증오도, 슬픔도 아니었다.
그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종류의, 서늘한 평온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노트북 전원을 켰다.
그리고, 하얀 워드 파일을 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키보드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단 한 줄의 문장을,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그림자 연극』, -카산드라-
2.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
그녀는, 자신의 노트북 화면 위에 떠오른 두 개의 단어를, 오랫동안,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림자 연극』, 카산드라.
그것은, 그녀가 7년 전 사용했던, 낡고 잊혀진 필명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이름은 그녀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것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결별이었다.
상처 입고, 배신당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차지원’이라는 이름의 여자는, 방금 전, 이 서재의 문을 닫고 잠그는 순간, 죽었다.
그리고 지금, 이 하얀 워드 파일 위에서, 새로운 존재가, 태어나고 있었다.
세상이 그녀에게 씌워준 저주.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진실을 외쳐야만 하는 운명.
그 저주를, 기꺼이 자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인, 단 한 명의 예언자.
카산드라.
그녀의 손가락이, 다시,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소설의 다음 문장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전투를 위한, 작전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더 이상 슬픔이나 분노로 흐려져 있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감정이 증발해버린, 차갑고도 명료한 진공 상태와도 같았다.
그녀는, 이수연의 방식을, 강태준의 방식을, 지난 며칠간, 뼈저리게 학습했다.
그들은, 서사를 통해, 현실을 창조했다.
그들은, 무대를 통해, 대중을 지배했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녀는, 이 모든 거짓 연극을 끝장낼, 마지막 연극을, 직접 연출하기로 결심했다.
그녀의 첫 번째 과제는, 무기를 재정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유일한 무기는, 이야기 그 자체였다.
그녀는, 자신의 컴퓨터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7년 전의 『그림자 연극』 원고 파일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한 문장, 한 문장, 다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녀가 순수한 열정으로 썼던 모든 문장들이, 이제는 현실의 피와, 비명과, 거짓말들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글자도 수정하지 않았다.
이것은, 완벽한 원본이어야만 했다.
어떠한 해석이나, 변명도 덧붙여지지 않은, 순수한 ‘시작’ 그 자체.
이것이, 그녀가 세상에 내놓을, 유일한 진실이었다.
다음으로, 그녀는 무대를 결정해야 했다.
그녀는, 이수연처럼, 언론을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은, 이미 강태준의 손에 넘어갔거나, 혹은 대중의 광기에 편승하여, 진실을 보도할 능력을 상실했다.
그녀는, 빅터처럼, 유튜브를 이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곳은, 이성적인 대화가 아니라, 자극적인 선동만이 살아남는, 거대한 콜로세움일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만의 무대를, 직접 만들어야만 했다.
그녀는, 세상과 직접, 대면하기로 결심했다.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얼굴로.
그녀는, 라이브 방송을 하기로 했다.
이 모든 서사의 ‘원본’을, 처음부터 끝까지, 남김없이, 읽어 내려가는.
그녀는, 자신의 서재를, 마지막 무대로 꾸미기 시작했다.
그것은, 전투를 앞둔 장수의, 고요한 의식과도 같았다.
그녀는, 방 안을 어지럽히던, 지난 며칠간의 절망의 흔적들을, 하나씩 치워나갔다.
바닥에 뒹굴던 옷가지들.
먼지가 쌓인 찻잔.
그녀는, 이 마지막 공간만큼은, 그 어떤 혼돈에도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진실의 공간이기를 바랐다.
그녀는, 웹캠의 각도를 조절하여, 자신의 등 뒤로, 책장을 가득 채운 책들이 보이도록 배치했다.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추』.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그녀의 스승들이, 이 마지막 증언의, 침묵하는 증인이 되어줄 터였다.
그녀의 시선이, 벽에 걸린 낡은 아스날 머플러에 닿았다.
‘Victoria Concordia Crescit’.
그녀는 잠시, 그것을, 아무런 표정 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자를 가져와, 벽에서 그 머플러를 떼어냈다.
그녀는, 그것을, 곱게, 아주 곱게 접었다.
그리고, 책장의 가장 깊숙한, 어두운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의 세계에서, 이상주의의 시대는, 끝났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세상에, 자신의 연극을 알리는, 초대장을 작성했다.
그녀는, 자신을 공격했던 바로 그 무기를, 역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마지막 글을 올렸다.
수만 개의 저주와 욕설이 들끓는, 바로 그 화형장 한가운데에.
[저를 사기꾼이라 부르고, 배신자라 부르고, 마녀라 불렀던 모든 분들께 고합니다.
오늘 밤 9시.
이곳에서, 라이브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변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호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읽을 뿐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저의 소설 『그림자 연극』의 원본 전체를.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녀가 ‘게시’ 버튼을 누르는 순간, 세상은,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노트북을 덮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조용히, 약속된 시간을 기다렸다.
그녀의 등 뒤, 서재의 문밖, 거실에서는, 희미하게, TV 소리가 들려왔다.
김민준이었다.
그는, 아직, 저곳에 있었다.
그녀가 버린, 과거의 세계.
하지만 차지원은, 더 이상, 그 소음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는, 이제 그녀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배경 소음일 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하고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또 자유롭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곧 시작될, 자신의 마지막 연극을, 그리고 그 연극이 불러올 또 다른 파국을, 담담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3. 정론일보 1층 로비
그날 저녁 8시.
광화문 정론일보 타워의 사회부 사무실은, 마치 거대한 장례식을 앞둔 상갓집처럼, 무겁고 뒤숭숭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수연이라는 이름의 가장 밝게 빛나던 별이, 하룻밤 사이에 가장 추악한 스캔들과 함께 추락한 이후.
편집국은, 안도하는 대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떠안은 사람들처럼, 극도의 불안감 속에 잠겨 있었다.
그들은, 차지원을 향한 마녀사냥에, 자신들의 펜과 지면이 얼마나 깊숙이 가담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이수연 한 명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자신들의 모습이, 얼마나 비겁하고 위선적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중의 서늘한 역풍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세훈 부장은, 자신의 유리방 안에서, 착잡한 표정으로, 타들어 가는 담배만 연신 빨아대고 있었다.
이수연이 사라진 지금,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황금알을 낳던 거위의 배는, 갈라져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아무도 손대고 싶어 하지 않는, 역겨운 내장뿐이었다.
그때였다.
“부장님!”
온라인 뉴스팀의 젊은 기자가, 거의 비명을 지르듯, 그의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태블릿 PC를 오 부장의 책상 위로 내밀었다.
“차… 차지원이… 라이브 방송을 한답니다.”
오 부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짜증 섞인 손길로,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화면 속에는, 차지원의 페이스북 페이지가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방금 막 게시된, 그녀의 마지막 선전포고가, 검고 선명한 활자로 박혀 있었다.
[오늘 밤 9시. 이곳에서, 라이브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저의 소설 『그림자 연극』의 원본 전체를, 읽을 뿐입니다.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오 부장의 뇌가, 순간, 정지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무슨 글자를 읽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미친… 저 여자, 진짜 미쳤군!”
그 순간, 편집국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모든 기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의 스마트폰과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믿을 수 없다는 탄성과, 헛웃음과, 그리고 공포가 뒤섞인, 수군거림이,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골방에서, 소설을 읽겠다고?”
“이거, 우리한테 마지막으로 빅엿을 먹이겠다는 거잖아.”
“지금 동시 접속자 수, 미친 듯이 올라가고 있어. 모든 언론사가, 지금 이 페이지만 쳐다보고 있다고!”
오 부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머릿속은, 수만 개의 복잡한 계산으로 뒤엉켜 있었다.
막아야 하는가.
무시해야 하는가.
그때, 법무팀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부장님.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계정으로 방송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막을, 어떠한 명분도,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시해!”
오 부장이,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냥, 저 여자가 자기 방구석에서, 혼자 떠들다 지치게 내버려 둬!”
바로 그때, 편집국장이, 자신의 방에서, 무겁고 지친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이 모든 사태의 최종 책임자였다.
그는, 오 부장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시할 수 있다면, 좋겠지.”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오 부장.
우리가 무시한다고, 세상이 무시할 것 같은가?
지금 이 순간, 종편과, 케이블과, 수만 개의 유튜브 채널들이, 저 여자의 입만 쳐다보고 있어.
만약, 이 대한민국에서, 오직 우리 정론일보만이, 이 방송을 외면한다면.
세상은, 우리를, 뭐라고 부를 것 같은가.”
편집국장의 말이, 오 부장의 심장을, 차가운 얼음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았다.
‘진실을 은폐하려는 자들.’
‘겁쟁이들.’
‘공범들.’
그는, 자신들의 등 뒤에, 영원히 새겨질, 그 끔찍한 주홍글씨들을, 볼 수 있었다.
오 부장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입니까.”
그가, 거의 신음하듯 물었다.
“우리가, 저 여자를, ‘표절범’이니, ‘사기꾼’이니, 그렇게 매도했던 바로 우리가, 이제 와서 그녀의 방송을, 대대적으로 중계라도 하란 말입니까?
세상이, 우리를, 비웃을 겁니다.
우리는, 역사에 남을, 조롱거리가 될 겁니다.”
그의 말에, 편집국의 모든 기자들이, 침묵으로 동의했다.
그것은, 그들 모두의 공포였다.
자신들이, 기득권의 수구 노릇을 하며 저질렀던 모든 위선과 기만이, 이제 온 세상 앞에, 발가벗겨질지도 모른다는.
편집국장은, 그런 그들을, 지친 눈으로, 둘러보았다.
“조롱거리?”
그가, 텅 빈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이미, 조롱거리가 됐어.
이수연 그 아이 하나 때문에, 이 정론일보의 신뢰는, 이미 바닥에 떨어졌다고.
이제 와서, 체면 따위를 차릴 때가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사는 거야.
어떻게든, 이 판에서, 살아남는 거라고.”
그의 말은, 명령이었다.
“막을 수 없다면, 우리가, 집어삼키는 거야.
저 여자의 ‘골방 방송’을, 우리 정론일보의 공식 채널을 통해, 대한민국 전체에, 생중계하는 거다.
다른 놈들이, 저 여자의 방송을 받아먹기 전에, 우리가 먼저, 이 이슈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는 거야.”
편집국은, 다시, 폭탄을 맞은 것처럼, 터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은, 이전의 그 뜨거운 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차갑고도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방송팀!
당장 1층 로비에, 중계 시스템 설치해!
대형 스크린으로, 저 여자의 얼굴을, 바로 띄울 수 있게 준비해!”
“정치부, 사회부!
당장, 이 사태에 대해 논평해 줄, 패널들 섭외해!
차지원의 말이 나올 때마다, 즉각적으로, 우리의 입맛에 맞게, 분석하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해 줄, 그런 인간들로!”
“온라인팀!
댓글 창 관리할 준비해!
우리에게 불리한 여론은, 철저하게, 차단하고, 삭제해!”
정론일보 1층 로비.
그곳은, 순식간에, 거대한 방송 스튜디오로, 변해가고 있었다.
카메라와, 조명과, 마이크들이, 분주하게 설치되었다.
기자들은, 노트북을 들고,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아닌, 불안과 초조함이, 역력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파멸시켰던 한 여자의, 마지막 목소리를,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온 세상에 퍼뜨려야만 하는, 기이하고도 굴욕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들은, 이제, 서사의 창조주가 아니었다.
그들은, 차지원이라는 이름의, 한 개인이 그녀의 작은 골방에서 만들어내는 서사를, 그저, 중계해야만 하는, 무력한 전달자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로비 중앙의 가장 큰 스크린 위로, 차지원의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 대기 화면이, 떠올랐다.
화면 속에서는, 방송 시작까지 남은 시간이, 붉은색 숫자로, 냉정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로비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을 멈추고, 그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들은, 이제 곧 시작될, 자신들의 명예가 걸린, 이 잔인한 연극의, 첫 번째 관객이었다.
4. 카메라 앞의 『그림자 연극』
밤 9시.
정각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극장의 모든 조명이, 꺼지는 시간.
그리고 단 하나의 무대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는 시간.
차지원의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 대기 화면 위로, ‘LIVE’라는 붉은색 표시가, 핏방울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동시 접속자 수를 표시하는 카운터는, 이미 측정을 포기한 듯, 무한대를 의미하는 기호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수백만, 어쩌면 그 이상의 눈동자들이, 지금 이 순간, 한 여자의 작은 골방을, 숨죽인 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론일보의 1층 로비.
거대한 스크린 위로, 마침내, 차지원의 모습이 나타났다.
화질은, 조악했다.
그녀의 등 뒤로는, 낡은 책장이, 희미한 스탠드 불빛 아래, 그림자처럼 펼쳐져 있었다.
화면 속의 그녀는,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지난 몇 주간, 온 세상을 뒤흔들었던, 그 거대한 스캔들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화장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잠시, 아무 말 없이, 카메라의 렌즈를, 그 검고 텅 빈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마치, 화면 너머의 수백만 개의 눈동자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려는 듯이.
로비 안의 모든 기자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감정이 증발해버린, 텅 비고, 고요한 목소리였다.
“많은 분들의 관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찾으시는 영웅이나, 내부 고발자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한 명의 연구자일 뿐입니다.
제 기고문의 본질은, 특정 비밀 조직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왜 이토록 거대한 이야기에, 명쾌한 '악당'에 열광하는지를 이해하려는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저의 글은, 제가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세상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창작자로서, 저는, 제가 빚어낸 괴물에 대한, 마지막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변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호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읽을 뿐입니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두툼한 A4 용지 묶음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저의 소설, 『그림자 연극』의 원본 전체를 읽겠습니다.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녀의 성명서 낭독이, 끝났다.
로비 안은, 완전한 침묵에 휩싸였다.
오세훈 부장은, 저 여자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은신처의 이수연은, 차가운 위스키 잔을, 손에 쥔 채, 굳어 있었다.
펜트하우스의 강태준은, 불쾌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그녀의 다음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차지원은, 원고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아주 조금 더, 카메라 쪽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낮고, 건조했다.
마치, 타인의 부고를, 대신 읽어주는 사람처럼.
“『그림자 연극』.
저자 카산드라.”
“서장(序章) :가장 위대한 배반.”
“1895년 겨울.
한성(漢城)의 밤은, 차고 어두웠다.”
“명성황후가, 일본의 칼에, 무참히 시해된 지, 두 달이 지난 밤이었다.
나라는, 껍데기만 남았다.”
왕은, 자신의 궁궐을 버리고, 이국의 공사관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날 밤, 왕이 버린 경복궁의 가장 깊숙한 곳, 집옥재(集玉齋)의 서고에, 몇 명의 젊은이들이, 촛불 아래, 모여 있었다.”
그들은, 왕의 가장 총애받던, 신진 관료이자,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절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나라의 민중들에게, 절망하고 있었다.
왕을 원망하고, 외세를 탓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지하고 나약한 백성들…"
여기까지 읽고 차지원은 침을 한 번 삼켰다.
“한 젊은 학자가, 입을 열었다.”
“‘이 나라는, 백성들 때문에 망한다.’“
“다른 학자가, 말을 이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가 아니다. 필요한 것은, 채찍과, 당근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지도자였던 자가, 마지막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이 나라의 보이지 않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저 어리석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이 나라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그들은, 그날 밤, 맹세했다.”
“가장 위대한 애국은, 때로는 가장 위대한 배반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그들은, 스스로를, ‘미래 설계자들’이라 칭했다.”
차지원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그녀는,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녀의 낭독을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이것은, 그들이 예상했던, 폭로나, 증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훨씬 더, 근원적이고, 무서운 이야기였다.
이수연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차지원의 소설 속, 그 젊은 학자들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강태준의 철학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오만함과, 닮아 있었다.
강태준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치직-’
스크린 속 차지원의 얼굴이, 노이즈와 함께, 순간, 일그러졌다.
로비 안의 기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뭐야? 방송 상태가 안 좋은가?”
오세훈 부장은, 방송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뭐 하는 거야! 당장 화면 복구 못 해!”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방송 사고가 아니었다.
차지원의 얼굴이, 다시, 화면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디오가, 완벽하게, 차단된 것이다.
그녀는,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기괴하게 보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툭.’
화면이, 암전되었다.
정론일보 로비의 거대한 스크린이, 차지원의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 창이, 그리고 대한민국 수백만 명의 스마트폰과 TV 화면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검은색으로 변해버렸다.
방송이, 중단된 것이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오세훈 부장이, 절규했다.
온라인팀장이, 사색이 된 얼굴로, 그에게 달려와 보고했다.
“부장님… 페이스북, 아시아 서버 전체가, 다운됐습니다.”
은신처의 이수연은, 자신의 모든 모니터가, 검게 변한 것을 보며, 얼어붙었다.
그녀는, 알았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그녀가 겪었던, 바로 그 일이었다.
‘진짜 적들...
그들이, 움직인 것이다.'
펜트하우스의 강태준 역시, 자신의 스크린이 꺼진 것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함께, 아주 희미한, 공포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힘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서, 이 모든 판을, 내려다보고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신호였다.
빅터는, 자신의 방송 스튜디오에서, 갑자기 끊겨버린 송출 화면을 보며, 흥분해서 외쳤다.
“보셨습니까, 여러분!
그들이, 방송을, 강제로 끊었습니다!
미래 설계자들이, 카산드라의 목소리를, 막아버린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이 진실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는, 이 새로운 사건을, 자신의 새로운 신화로, 재창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지원의 집.
서재.
그녀는, 자신의 노트북 화면이, 검게 변한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의 모든 조명이, 깜빡이더니, 꺼졌다.
정전이었다.
그녀의 아파트뿐만 아니라, 그녀가 사는 동네 전체의 불이, 일제히, 암흑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저항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의해, 너무나 허무하게, 짓밟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진실을 외쳤다.
하지만 신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녀의 서재 안에는, 이제, 완전한 침묵만이, 흘렀다.
철학자. 작가. 배신당한 여자
그녀의 마지막 연극은, 그렇게, 1막도 채 끝나지 않은 채, 강제로, 막을 내린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