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9장: 희생양
1. 덫
광화문 광장의 불길이 잡히고, 대학 캠퍼스의 깨진 유리가 치워진 뒤, 서울에는 기이하고도 팽팽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더 큰 폭발을 앞둔 화산의 휴지기 같은, 불안한 정적이었다.
대중의 분노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갈 곳을 잃은 채, 지하수처럼 도시의 가장 깊은 곳으로 스며들어, 다음 번 분출할 약한 지반을 찾고 있었다.
강태준은, 바로 그 분노의 물줄기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돌릴, 새로운 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의 펜트하우스는, 이제 전쟁 지휘 본부라기보다는, 거대한 수술을 앞둔 집도의의 수술실에 더 가까웠다.
그는 지난 며칠간,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었다.
그는 오직, 스크린 속에서 넘실대는 데이터의 강물을, 그리고 자신의 발아래에 놓인 도시의 건축 모형만을 내려다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의 사유는, 감상적인 후회나 인간적인 고뇌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실패한 프로젝트의 원인을 분석하고, 다음 프로젝트의 완벽한 성공을 위해 새로운 변수를 계산하는, 한 명의 냉철한 설계자의 사유였다.
그는 먼저, 자신이 창조한 이 거대한 혼돈의 본질을 해부했다.
그는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을 떠올렸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세기의 재판을 지켜보던 한 유대인 여성 철학자의 서늘한 통찰이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악마적이고 사악한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상관의 명령에 충실했고, 자신의 출세에만 관심이 있었던, 지극히 평범한 관료일 뿐이었다.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었고, 그 ‘생각 없음’의 결과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악에 가담했다.
거대한 악은, 이처럼 특별한 악인이 아니라, 생각 없는 평범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것이다.
이수연은, 그 완벽한 예시였다.
그녀는 사악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야망이라는 목표에 너무나 충실했기 때문에, 이 모든 악을 세상에 풀어놓았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렇다면, 이 모든 혼돈의 책임을 질 희생양 역시, 사악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대중이 한때 ‘선(善)’이라고 믿었던 존재일수록, 그 배신감이 클수록, 희생양으로서의 가치는 극대화되는 법이다.
이수연은, 이 나라를 구할 영웅적인 기자로 추앙받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가장 완벽한 희생양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르네 지라르의 통찰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그것은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어두운 비밀에 관한 이야기였다.
프랑스의 사상가 르네 지라르는 질문했다.
끝없는 모방 욕망으로 서로를 질투하고 증오하게 된 인간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파멸시키지 않고 공동체를 유지해왔는가?
그의 대답은 섬뜩할 정도로 단순했다.
공동체는 내부의 갈등과 긴장이 폭발하기 직전, 모든 문제의 원인을 단 한 명의 ‘희생양’에게 만장일치로 뒤집어씌운다.
그리고 그 희생양을 공동으로 처단하는 잔혹한 의식을 통해, 서로를 향하던 모든 증오를 한 곳에 쏟아내고, 끔찍한 일체감 속에서 거짓된 평화를 되찾는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이름의 허깨비 적을 향한 공동의 폭력으로, 기이한 일체감을 맛보았다.
하지만 그 폭력이, 대학 캠퍼스에서의 유혈 사태처럼, 현실 세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운 희생양이 필요했다.
이 모든 폭력과 분열의 책임을 대신 짊어질, 진짜 피와 살을 가진 희생양.
그 희생양을 처단하는 공동의 폭력을 통해, 사회는 비로소 거짓된 평화를 되찾고, 자신은 그 평화를 가져온 구원자로 등극할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하려는 일이, 단순한 정치적 암투가 아니라, 사회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신성한 의식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그의 결심은,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그는 자신의 비밀 전화기를 들어, ‘실장님’이라 불리는 남자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그에게서, 지난 며칠간 수집한 모든 정보가 담긴, 암호화된 파일을 건네받았다.
그 파일의 이름은, [프로젝트 프로메테우스]였다.
강태준은, 이수연을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냉소적으로 미소 지었다.
신화 속에서,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은,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을 쪼이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프로메테우스에게, 그보다 더 잔인한 형벌을 내릴 생각이었다.
강태준은, 파일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이수연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클로이’로서 김민준과 나누었던 모든 통화 기록과 문자 메시지.
삼청동 와인 바와, 청담동 갤러리에서 함께 있는 모습이 찍힌, 희미하지만 정확한 감시 카메라 사진.
그리고 그녀가 빅터에게 익명으로 보냈던, [카산드라_진실.zip]이라는 이름의, 그 완벽하게 조작된 표절 의혹 파일의 원본까지.
강태준의 ‘실장님’은, 유령처럼 움직여, 그녀의 모든 디지털 흔적을 완벽하게 복원해 낸 것이다.
강태준은, 이수연이 차지원을 파멸시키기 위해 얼마나 치밀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움직였는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정말로 최고의 창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그 창을 부러뜨려, 그녀 자신을 찌를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수연이 사용했던 바로 그 방법론을, 그대로 그녀에게 되돌려주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차지원을 ‘표절범’으로 만들었듯이, 그는 이수연을 ‘모든 것을 조작한 희대의 사기꾼’으로 만들 것이다.
그는, 덫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모든 위대한 건축은, 완벽한 설계도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1단계: 증인 확보]
그는, 이 새로운 연극에 등장시킬 배우들을 물색했다.
가장 먼저, 김민준.
그는, 이 비극의 가장 약한 고리이자, 가장 유용한 증인이었다.
강태준의 ‘실장님’이, 어느 날 저녁, 김민준의 미술학원으로 그를 찾아갔다.
그는, 위협하지 않았다.
대신,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그는, 김민준 앞에, 국내 최고의 상업 갤러리 관장의 명함과, 개인전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김민준 작가님.
당신의 재능은, 이런 낡은 입시 학원에 썩기에는 너무나 아깝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봤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당신의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당신을 이용하고 있는, ‘클로이’라는 이름의 그 여자입니다.”
실장님은, 이수연이 기자라는 사실과, 그녀가 김민준에게 접근한 진짜 이유가, 그의 아내인 차지원을 파멸시키기 위함이었다는 ‘진실’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김민준의 얼굴은, 배신감과 모멸감,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그 분노는, 이수연이 아니라, 자신의 아내인 차지원을 향했다.
‘결국, 또 당신 때문이야.’
실장님은, 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마지막 제안을 했다.
“당신이, 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수연이라는 여자가, 어떻게 당신에게 접근해서, 당신의 아내에 대한 거짓말을 만들어내도록 유도했는지를, 세상에 증언하십시오.
그렇게만 해준다면, 우리는 당신을, 이 비극의 피해자이자, 아내를 지키려 했던 용감한 남편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평생 꿈꿔왔던 성공도 함께 안겨드리죠.”
김민준은, 단 10분도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기꺼이 악마의 계약서에 서명했다.
다음은, 노진석 교수였다.
차지원의 옛 지도 교수.
실장님은, 그에게는 ‘정의’와 ‘명예’를 제안했다.
“교수님의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을 시간입니다.
차지원과, 그녀와 결탁한 이수연 기자가, 어떻게 교수님의 학문적 성과를 도둑질하고, 당신을 파렴치한으로 몰았는지를, 이제는 세상이 알아야 합니다.”
노진석 교수는, 기꺼이, ‘비극적인 피해자’ 역할을 맡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박형사.
강태준은, 이수연이 그에게 거액을 송금한 내역을 확보했다.
그는, 박형사를, 자신의 펜트하우스로 직접 불렀다.
그는, 협박하지 않았다.
그는, 더 큰 돈과, 승진을 약속했다.
그는 박형사에게, 이수연이 그 돈을 주며, 윤석호의 유서가 없었다고 거짓 증언을 하도록 사주했다고, 검찰에 가서 ‘자수’하라고 명령했다.
박형사는, 주인을 바꾸는 데,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2단계: 무대 설정]
모든 배우들이, 섭외되었다.
이제는, 이 연극을 상연할 무대가 필요했다.
강태준은, 정론일보의 가장 큰 경쟁사인, 다른 보수 언론사를 선택했다.
그는 그 언론사의 편집국장에게, 자신이 확보한 모든 ‘증거’들을, 익명의 제보인 것처럼 전달했다.
김민준의 증언, 노진석 교수의 고발, 그리고 박형사의 자수서까지.
그것은, 그 어떤 언론사도 거부할 수 없는, 너무나 달콤하고 거대한 특종이었다.
[3단계: 마지막 초대]
모든 덫은, 설치되었다.
이제, 사냥감을 덫으로 유인할 차례였다.
강태준은, 자신의 개인 전화기를 들어, 이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의 차가운 분노 대신, 모든 것을 용서한 듯한, 따뜻하고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이수연 기자.
…아니, 수연아.”
그는, 오랜만에 그녀를 그렇게 불렀다.
“내가, 며칠간 생각해 봤어.
내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아.
당신 말이 맞았어.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과정이었어.
당신 덕분에, 원로 그룹은 이제 완전히 끝났어.
당신이, 이긴 거야.”
전화기 너머의 이수연은,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제, 이 모든 연극을 끝낼 시간이야.
이 혼돈을 잠재우고, 내가 전면에 나서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지.
그리고 그 자리에는, 당신이 필요해.
나의 파트너로서.
오늘 밤, 펜트하우스로 와.
우리의 승리를 축하하고, 앞으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해, 이야기하자.
이것은, 우리의 승리를 위한, 마지막 회의가 될 거야.”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달콤했다.
이수연은, 이것이 덫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이 덫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이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오늘 밤, 가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 강태준은 전화를 끊었다.
그는, 자신의 설계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음을 느꼈다.
그는 다시, 거대한 건축 모형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도시 모형의 가장 중심부에서, 작은 여성의 인형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수연을 상징하는 인형이었다.
그는 그 인형을, 잠시 동안,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그 인형을, 아무런 감정 없이, 책상 옆의 쓰레기통 안으로 던져 넣었다.
‘툭’, 하는 아주 작고 가벼운 소리가 났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끝내기로, 최종적으로 결심한 참이었다.
덫은, 이제 먹잇감을 기다리고 있었다.
2. 모든 거짓말이 그녀를 향할 때
그날 밤, 이수연은 다시 한번 더 마크 타워의 VIP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하지만 이전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녀의 심장은, 특종을 앞둔 사냥꾼의 흥분으로 뛰지 않았다.
그것은, 사형을 선고받기 위해 마지막 재판정으로 향하는 죄인의, 차갑고 불안한 박동이었다.
그녀는 짙은 색 원목 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완벽한 화장과, 흐트러짐 없는 단단한 표정.
하지만 그녀 자신은, 그 가면 뒤에 숨겨진 자신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강태준의 전화는, 너무나 따뜻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난번의 그 얼음장 같은 의심 대신, 모든 것을 용서한 듯한 관대함과, 오랜 동지를 향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당신이 이겼어.’
‘이제, 우리의 승리를 축하하자.’
그의 말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달콤했다.
그녀의 이성은, 이것이 덫일 확률이 높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그녀의 욕망은, 이것이 진실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녀는, 이 지긋지긋한 불안에서 벗어나, 다시 강태준의 파트너로, 이 세계의 설계자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마지막 히든카드가 남아 있었다.
윤석호의 진짜 유언장.
만약, 그가 정말로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면.
그녀는 이 카드를 터뜨려, 이 판 전체를 지옥으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이 위험한 초대에 응한, 마지막 이유였다.
‘띵.’
60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펜트하우스의 풍경은, 이전과 똑같았다.
발아래 펼쳐진, 보석 같은 도시의 야경.
한쪽 벽에 걸린, 붉은 선이 인상적인 거대한 추상화.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한 침묵.
하지만 강태준의 모습은, 달랐다.
그는, 그녀를 심문하던 그 권위적인 책상 뒤에 앉아 있지 않았다.
그는, 처음 그녀와 공모를 시작했던 그날처럼, 거대한 통유리창 앞에 서서, 위스키 잔을 든 채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왔군.”
그가 말했다.
“우리의 승리를 축하할, 주인공이.”
그는 바(bar)로 걸어가, 그녀를 위해 잔을 준비했다.
그는 그녀가 좋아하는, 피트 향이 강한 싱글몰트 위스키를 따랐다.
그의 모든 행동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완벽하게 연기된 연극처럼 보였다.
“수고했어.”
그가, 위스키 잔을 건네며 말했다.
“당신 덕분에,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그 낡고 지긋지긋한 노인들을 모두 무대에서 치워버릴 수 있었어.
…그리고, 그 차지원이라는 여자.”
그는 피식, 웃었다.
“당신이 그녀의 명예를 완전히 끝장내 버린 덕분에,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미래 설계자들’ 따위의 이야기를 믿지 않게 되었지.
모든 것이, 당신의 완벽한 각본대로였어.”
이수연은 그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술이, 목을 타고 흐르며, 긴장으로 굳어있던 몸을 조금 풀어주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칭찬이 진심이라고, 필사적으로 믿고 싶었다.
“이제, 마지막 막만 남았군.”
강태준이, 창가 앞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이 모든 혼란을 잠재우고, 내가 구원자로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 말이야.
그리고 그 무대에는, 물론 당신도 함께 서야지.
이 모든 진실을 밝혀낸, 위대한 저널리스트로서.”
그는, 그녀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들려주고 있었다.
이수연의 마음속에서, 의심의 얼음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녀 역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이제 이 지긋지긋한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말이야…”
강태준이, 마치 안타깝다는 듯, 나지막이 말했다.
“모든 위대한 연극에는, 대중의 모든 감정을 정화시켜 줄, 마지막 희생양이 필요한 법이지.
사람들은, 이 모든 혼란과 폭력에 대해, 누군가 책임지기를 원하고 있어.”
그는 손에 든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그의 뒤편,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던 거대한 스크린이, 소리 없이 켜졌다.
화면 속에는, 정론일보의 가장 큰 경쟁사인, ‘한국일보’의 뉴스 속보 화면이 떠 있었다.
앵커의 얼굴은, 비장한 표정이었다.
“네, 지금부터 저희 한국일보는,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미래 설계자들’ 음모론의, 충격적인 진실을, 단독으로 보도해 드리겠습니다.”
이수연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렸다.
화면이 바뀌었다.
낯익은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김민준이었다.
그의 얼굴은,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절망으로 떨리고 있었다.
“저는… 괴물이었습니다.
저는, 제 아내를, 제 손으로 직접 지옥에 밀어 넣었습니다.
‘클로이’라는 이름의 그 여자… 정론일보 이수연 기자는, 저의 초라한 자존심을 이용했습니다.
그녀는, 제 아내의 과거 상처를, ‘표절’이라는 끔찍한 거짓말로 둔갑시키도록, 저를 유도하고, 또 협박했습니다.
모든 것은, 그녀가 만들어낸, 거대한 사기극이었습니다.”
화면이, 다시 다른 인물로 바뀌었다.
차지원의 옛 지도 교수, 노진석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뇌하는 지식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수연 기자는, 저에게 찾아와, 차지원 박사가 과거 자신의 논문을 표절했다고 거짓 증언을 해주면, 저의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아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그 악마의 속삭임에 잠시 흔들렸던,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이제, 모든 진실을 밝히고, 저의 제자였던 차지원 박사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증인이 등장했다.
박형사였다.
그는, 검찰청사 포토라인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저는, 이수연 기자에게, 거액의 돈을 받고, 윤석호 전 차장의 유서가 없었다고, 거짓 증언을 했습니다.
모든 것은, 그녀가 꾸민 짓입니다.
국민 여러분께,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이수연은,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이 쌓아 올렸던 모든 세계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조종했던 모든 장기 말들이, 이제 자신을 향해 돌아서서, 자신을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강태준이, 자신의 모든 방법을, 그대로 훔쳤다는 것을.
그는, 그녀의 각본을, 완벽하게 표절하여, 그녀 자신을 파멸시키는 데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죽음보다 더한, 지적인 능욕이었다.
‘쨍그랑-’
그녀의 손에서, 위스키 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방 안의 모든 공기가, 그녀의 폐를 짓누르는, 무거운 납 덩어리가 된 것 같았다.
강태준은, 리모컨으로 스크린을 껐다.
방 안에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는, 무너져 내린 그녀의 모습을,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설계도대로, 완벽하게 철거된 건물의 잔해를 바라보는 건축가처럼.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따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형을 선고하는, 재판관의 목소리였다.
“당신은, 정말 훌륭한 건축가였어, 이수연.
내가 본, 최고의 서사 건축가였지.”
그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웠다.
“하지만 당신의 건축물은,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어.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강력했지.
그래서, 내가 원했던 낡은 건물 몇 채만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 이 도시 전체를 불태워버릴 뻔했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대중은… 어린아이와 같아.
그들은, 당신이 피워놓은 불을 보며 환호했지만, 이제는 그 재를 보며 두려워하고 있지.
그들은, 이 모든 혼란을 책임질, 마녀가 필요해.
그 마녀를 불태우며, 자신들이 다시 안전해졌다고 믿고 싶어 해.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야.
희생양의 이야기.”
그는 그녀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바로 당신이었어, 이수연.
어떻게 완벽한 이야기를 만드는지.
어떻게 완벽한 희생양을 고르는지.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야말로, 이 모든 혼돈의 작가로서, 그 역할을 맡기에, 가장 완벽한 인물이었지.
참, 시적이지 않나?”
이수연은, 간신히,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패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갈라져 나왔다.
“넌… 날 이렇게 끝낼 수 없어.
나에게는, 원본이 있어.
윤석호의, 진짜 유언장.
내가 박형사에게서 산 바로 그 유언장.
내가 무너지면, 이걸 세상에 공개할 거야.
거기엔, 네가 제거하고 싶었던 그 원로들의 모든 비리가 담겨 있어.
나 혼자 죽진 않아.”
하지만 강태준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연민과도 같은,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수연.
지금의 당신을, 누가 믿어줄까.
모든 것을 조작한 희대의 사기꾼.
돈으로 형사를 매수한 거짓말쟁이.
그 유언장은 이제, 당신이 만들어낸 또 다른 조작품일 뿐이야.
당신이 쓴, 그 추악한 소설의, 마지막 장이 되는 거지.”
그는, 그녀의 마지막 퇴로마저, 완벽하게 차단해버렸다.
그 순간, ‘띵’ 하는, 맑은 차임벨 소리와 함께, VIP 엘리베이터가, 이 층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문이 열리고, 검은색 정장을 입은, 강태준의 비서와 경호원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그녀를 잡으러 온 저승사자들이었다.
체크메이트.
모든 것이, 끝났다.
그녀가 시작했던 모든 거짓말들이, 이제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녀 자신을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
3. 추락하는 프로메테우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수연은, 거대한 스크린 속에서 자신의 사형 선고가 내려지는 모든 과정을, 소리 없는 흑백 영화처럼 보고 있었다.
김민준의 눈물.
노진석 교수의 위선적인 고뇌.
박형사의 수갑 찬 손목.
그녀가 직접 조종했던 모든 배우들이, 이제 그녀를 무대 중앙에 세워놓고, 일제히 손가락질하며 그녀가 마녀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연극의 총연출가는, 바로 그녀의 눈앞에서, 연민과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추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녀의 마지막 발악은, 공허한 메아리조차 되지 못했다.
윤석호의 진짜 유언장.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마지막 방패라고 믿었던 그 진실의 조각은, 강태준의 말 한마디에, 그녀가 만들어낸 또 다른 거짓의 증거품으로 전락해 버렸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이미 무너진 지 오래였다.
이제, 더 강한 목소리를 가진 자의 이야기가, 진실이 되는 세상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방 안에서, 더 강한 목소리를 가진 자는, 강태준이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그녀의 의식을, 다시 이 끔찍한 현실로 끌어당겼다.
검은 정장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이수연을, 인격체가 아닌, 처리해야 할 ‘물건’으로 보고 있었다.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정중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방과, 스마트폰을 이쪽으로 주시죠.”
이수연은, 저항하지 않았다.
아니, 저항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기계처럼, 자신의 클러치 백과, 스마트폰을 남자에게 건넸다.
그녀의 무기들이었다.
세상을 뒤흔들고, 사람의 마음을 조종했던.
그 모든 무기들이, 너무나 허무하게, 그녀의 손을 떠나가고 있었다.
남자는, 그녀의 스마트폰 전원을 껐다.
그리고 그것을, 전파가 차단되는 특수 파우치 안에 넣었다.
그녀와 세상 사이의 모든 연결이, 그렇게, 물리적으로 차단되었다.
강태준은, 그 모든 과정을, 마치 남의 일처럼,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눈에는, 더 이상 분노나 의심이 없었다.
오직, 모든 것이 끝났다는, 차가운 종결만이 담겨 있었다.
이수연은, 텅 빈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분노나 원망이 아니었다.
그저, 한때는 같은 꿈을 꾸었던, 동류의 인간에 대한,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왜….”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왜, 이렇게까지.”
강태준은, 잠시, 대답 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것은, 그녀를 위한 마지막 변명이자, 그녀의 묘비명이 될 말이었다.
“당신은, 너무 높이 날았어, 이카루스처럼.”
그가 말했다.
“당신이 훔친 불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결국 그 불길이, 내가 서 있는 이 하늘까지 태워버릴 뻔했지.
신들은, 그런 오만함을, 결코 용서하지 않아.”
그는, 스스로를, 그녀의 오만함을 심판하는, 신의 대리인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몸을 돌렸다.
그녀에게, 더 이상 어떠한 관심도 없다는 듯.
두 명의 남자가, 이수연의 양쪽 팔을 부드럽게,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인형처럼, 무기력하게 끌려갔다.
그녀의 발이, 값비싼 카펫 위를, 소리 없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가 이 펜트하우스에 처음 들어섰던 그날의, 당당하고 힘 넘치던 발걸음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그녀는 마지막으로, 강태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다시, 창가에 서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왕국에서, 가장 불필요하고 위험한 오물 하나를, 마침내 치워버린 왕처럼, 고요하고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세계는, 그렇게, 완벽하게 분리되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그녀는, 자신의 양옆에 선 두 명의 그림자와 함께,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의 하강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부드럽고 조용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영혼이, 수천 미터 상공에서, 날개가 꺾인 채,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의 차가운 금속 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텅 빈 얼굴.
프로메테우스의 추락이었다.
엘리베이터는, 1층 로비에 멈췄다.
이수연은, 그녀가 예상했던, 검은색 밴이나, 지하 주차장이 아님에, 의아함을 느꼈다.
남자들은, 그녀를 데리고, 더 마크 타워의 화려한 정문 로비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한 남자가, 아까 빼앗았던 그녀의 스마트폰과 가방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어떠한 위협도, 말도 없이, 그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른 한 명과 함께, 다시 VIP 엘리베이터 쪽으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수연은, 로비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졌다.
이것이, 그가 내리는 형벌이었다.
그는, 그녀를 감금하거나, 살해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세상이라는 가장 거대하고 잔혹한 감옥 속에, 그대로 내던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스마트폰 전원을 켰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저주가, 그녀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화면이 켜지자마자, 수백, 수천 개의 알림이, 폭포처럼, 비명처럼, 화면 위를 뒤덮었다.
모든 언론사의 긴급 속보 알림.
[속보] ‘미래 설계자들’ 모든 것은, 정론일보 이수연 기자의 조작극.
[단독] 이수연 기자, 전직 형사 매수 및 증거 조작 혐의… 검찰, 수사 착수.
그녀의 눈이, 다음 알림에서 멈췄다.
보낸 사람은, 그녀가 평생을 바쳤던, 정론일보였다.
[정론일보, 대국민 사과문 발표… “이수연 기자의 모든 관련 기사는 조작된 허위 사실임을 밝히며, 국민 여러분께 고개 숙여 사죄드립니다.”]
그녀는, 버려졌다.
자신이 탔던 배에서, 가장 먼저, 바다로 내던져진 것이다.
그녀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소셜 미디어 앱을 열었다.
그곳은, 그녀를 위한, 거대한 화형장이었다.
그녀의 얼굴 사진이, 온갖 끔찍한 이미지들과 합성된 채,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희대의사기꾼_이수연, #악마기자, #프로조작러.
어제까지 그녀를 ‘영웅’이라 부르던 바로 그 대중이, 이제는 그녀를 ‘악마’라 부르며, 가장 신나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그녀가 조종한다고 믿었던 대중은, 사실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더 자극적인 이야기를, 더 새로운 희생양을 원했을 뿐이다.
이수연은, 비틀거리며, 타워의 회전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여의도의 차가운 밤공기가, 그녀의 뺨을 때렸다.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집.
을지로의 오피스텔.
그 모든 곳은, 이제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 또 다른 감옥일 뿐이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택시를 잡기 위해, 대로변으로 걸어 나갔다.
그 순간, 그녀는 느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웅성거림.
스마트폰을 꺼내 들어, 자신을 촬영하는 손가락들.
“저 여자… 이수연 아니야?”
“맞네. 와, 진짜 뻔뻔하다.”
그녀는, 더 이상 익명의 시민이 아니었다.
그녀는, 온 국민이 얼굴을 아는, 가장 유명한 범죄자였다.
그녀가 사랑했던 이 도시 전체가, 이제 그녀를 경멸하고, 감시하는, 거대한 파놉티콘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길 건너편 신문 가판대로, 홀린 듯이 시선을 돌렸다.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그날의 석간신문 1면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의 얼굴이었다.
마치, 범죄자의 머그샷처럼 찍힌, 그녀의 증명사진.
그리고 그 위로, 그녀가 평생을 바쳤던 바로 그 신문, 정론일보의 이름으로, 그녀의 죽음을 알리는 헤드라인이, 검고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진실을 조작한 기자, 괴물이 되다]
그녀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인파 속으로,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권력의 심장부, 여의도의 한복판에서.
그녀는, 이제 갈 곳 없는 유령이 되어, 자신이 창조했던 그 거대하고 잔인한 세계 속을, 홀로 떠돌고 있었다.
추락하는 프로메테우스는, 이미 땅에 부딪혀, 산산조각 난 참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간을 쪼아 먹을 독수리들이, 사방에서 날아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