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장: 통제 불능
1. 광화문 광장의 분노
모든 것의 시작은, 다시 빅터였다.
그는 이수연이 던져준 ‘차지원의 표절 의혹’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은 뒤, 며칠 동안 자신의 반지하 스튜디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선동의 기술과, 대중의 분노를 증폭시키는 모든 노하우를 총동원하여, 인생 최대의 역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카산드라의 배신, 그리고 미래 설계자들의 최후 발악}이라는 제목의, 거의 영화에 가까운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였다.
그는 이수연이 익명으로 보내준 자료들을, 마치 성스러운 경전처럼 떠받들었다.
그는 차지원의 사진 옆에, 그녀가 존경해 마지않는 노진석 교수의 인자한 사진을 나란히 붙여놓고, ‘선과 악’의 구도를 완벽하게 연출했다.
그는 차지원의 박사 논문과, 노 교수의 낡은 연구 계획서를 비교하며, 일반인들은 이해하지도 못할 문장들에 붉은색 동그라미를 쳐가며, 이것이 ‘빼도 박도 못할 증거’라고 외쳤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서, 카메라를 향해, 그 어느 때보다도 비장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여러분.
이제 저들이,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진실이 드러날수록, 그들은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분열시키고, 진실의 목소리를 막으려 할 것입니다.
차지원과 같은, 지식인의 가면을 쓴 하수인들을 내세워서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더 이상 키보드 뒤에 숨어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분노를, 우리의 의지를, 저 여의도와 청와대의 괴물들에게 직접 보여주어야 할 때입니다.
이번 주 토요일 오후 2시.
대한민국의 심장, 광화문 광장에서 모입시다.
이것은 시위가 아닙니다.
이것은, ‘미래 설계자들’에게 보내는 우리의 마지막 경고이자, 이 나라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함성이 될 것입니다.
진실의 방패를 든 모든 동지들이여.
광화문에서, 역사를 만듭시다.”
그의 방송은, 메마른 들판에 던져진 불씨였다.
그의 선동은, 지난 몇 주간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서사에 완벽하게 중독된 수십만 명의 사람들에게, 행동의 명분을 주었다.
그들은 더 이상, 방구석의 외로운 음모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역사를 만드는 ‘전사’가 될 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의 토요일.
광화문 광장은, 이른 오후부터, 전례 없는 풍경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특정 정당의 깃발도, 노동조합의 머리띠도 없었다.
대신, 사람들이 저마다 손으로 직접 만든, 조악하지만 그래서 더욱 진실해 보이는 피켓들이, 숲처럼 광장을 뒤덮고 있었다.
[이수연 기자를 지켜내자!]
[미래 설계자들, 너희가 진짜 적이다!]
[표절범 차지원을 학계에서 퇴출하라!]
그리고 그 모든 피켓들 위에는, 마치 부적처럼, 이수연의 기사에서 처음 등장했던, 그 기이한 컴퍼스와 눈동자의 상징이 그려져 있었다.
허구의 상징이, 이제 현실의 광장을 지배하는, 거대한 토템이 된 것이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IMF 때 직장을 잃고, 자식들에게 가난을 물려주게 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는 60대 노인.
아무리 노력해도 집 한 채 살 수 없는 이 절망적인 현실이, 자신의 무능함 때문이 아니라 거대한 악의 계획 때문이라는 사실에 오히려 위안을 얻는 30대 직장인.
명문대에 가지 못하면 인생이 끝날 것이라는 공포 속에서, 이 모든 입시 경쟁이 기성세대가 만든 사악한 시스템이라고 믿게 된 10대 고등학생까지.
그들은 모두, 각자의 다른 불행과 불안을 안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이름 아래, 그들의 모든 다른 이야기는, ‘선과 악의 싸움’이라는 단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로 통일되고 있었다.
임시로 설치된 연단 위에서는, 빅터의 방송에 자주 출연했던 여러 재야 논객들과, 자신을 ‘전직 정보기관 요원’이라고 주장하는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차례로 마이크를 잡고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의 외침은, 군중의 함성과 뒤섞여, 거대한 소음의 파도가 되어 광화문 상공을 뒤덮었다.
이것은, 이성적인 토론의 장이 아니었다.
이것은, 억눌렸던 분노를 마음껏 분출하고, 그 분노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거대한 집단적 카타르시스의 현장이었다.
그 시각, 이수연은 을지로의 오피스텔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모니터들은, 여러 언론사의 라이브 방송과, 현장에 나간 유튜버들의 실시간 영상을 통해, 광화문 광장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중계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쓴 문장들이,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되어, 저토록 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공간으로 불러 모았는지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기자로서 평생 동안 꿈꿔왔던 순간이었다.
자신이 던진 의제 하나가, 대한민국 전체를 움직이는 것.
그녀의 심장은, 신과 같은 창조주가 느끼는, 오만하고도 짜릿한 희열로 고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저 군중은, 이성적인 시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였다.
그들은, 그녀가 창조했지만, 더 이상 그녀가 통제할 수 없는, 살아있는 괴물이었다.
그녀는, ‘화성 퓨처시티’라는 이름과 함께 전달되었던, 그 정체불명의 경고를 떠올렸다.
‘네가 시작한 불장난이, 우리가 잠든 숲을 태우려 하고 있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그 불장난은, 걷잡을 수 없는 산불이 되어, 도시의 심장을 향해 타들어가고 있었다.
강태준 역시, 자신의 펜트하우스에서, 똑같은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이수연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냉정한 계산만을 하고 있었다.
광장에 모인 저 수만 명의 분노는, 이제 자신의 정적인 ‘원로 그룹’을 향하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압박 수단이 될 터였다.
그들의 비호 없이는, 차기 대선 주자 경선에서 승리할 수 없었던 그에게, 이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저 군중의 함성은, 낡은 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자신의 시대를 열어줄, 장엄한 서곡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도, 작은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질서를 숭배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통제된 세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 광장의 풍경은, 모든 질서가 무너진, 혼돈 그 자체였다.
그는 이 혼돈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이 혼돈을 혐오하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 불길을 이용해 낡은 숲을 태워버린 뒤에는, 반드시 이 불 자체를 꺼버려야만 한다.’
오후 4시.
집회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였다.
사건은, 아주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었다.
광장의 한쪽 구석에서, 스무 명 남짓의 대학생들이, 작은 피켓을 들고 나타났다.
그들의 피켓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가짜 뉴스를 멈춰라!]
[우리의 적은, 음모론 그 자체다!]
그들은, 이 집단적 광기에 반대하는, 아주 작은 이성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들의 용기는, 분노에 중독된 거대한 군중에게는, 신성한 의식을 방해하는 불경한 이단자들의 도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놈들 뭐야!”
“미래 설계자들이 보낸 끄나풀이다!”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군중의 시선이, 그 작은 무리를 향해 일제히 쏠렸다.
성난 파도가, 그 작은 섬을 향해 밀려들기 시작했다.
욕설이 쏟아졌다.
물병이 날아들었다.
경찰들이 황급히 달려와,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인간 방패를 만들었다.
하지만 성난 군중의 힘을, 그들만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이전의 군중 속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그 실직한 청년.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들의 정의로운 함성을 방해하는 저 ‘배운 자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경멸과 냉소.
그것은, 평생 동안 그가 세상에게서 받아왔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마지막 이성의 끈이, ‘툭’ 하고 끊어졌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깃대를, 창처럼 고쳐 잡고, 경찰의 방어벽을 뚫고, 가장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던 한 학생의 얼굴을 향해, 자신의 모든 분노를 담아, 내리쳤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학생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피가, 공중으로 흩뿌려졌다.
그 붉은 피는, 마치 신호탄과도 같았다.
억눌려 있던 군중의 폭력성이, 마침내 봉인에서 풀려났다.
광장은, 순식간에 거대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고함과 비명, 사이렌 소리가 뒤섞여, 도시의 하늘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이수연은 자신의 모니터 화면 속에서, 자신이 시작한 이야기가, 어떻게 현실의 피로 변질되는지를, 망연자실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오만했던 희열은, 이제 싸늘한 공포로 변해 있었다.
이것은, 그녀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판을 설계하고 싶었지, 판 자체를 불태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소환한 괴물이, 이제 자신의 목줄을 끊고, 도시를 파괴하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진짜 피가 묻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참이었다.
강태준 역시, 자신의 펜트하우스에서, 똑같은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마지막 남은 만족의 미소마저 사라졌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혐오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이것은, 정치적 압박이 아니었다.
이것은, 폭동이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불길이, 이제 자신의 왕국 그 자체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는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이 혼돈을 잠재우고, 질서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혼돈을 시작한 자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는 비서관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호하고 무거웠다.
왕은, 마침내 결심을 내린 참이었다.
2. 빅터, 괴물을 키우다
폭력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이수연은, 자신의 오피스텔 모니터 속에서, 광화문 광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가 설계했던 정교한 체스판은, 이제 누군가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여버린, 혼돈의 잿더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성과 논리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분노와 광기라는, 예측 불가능한 야수를 풀어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야수는, 이제 그녀의 통제를 벗어나, 자신의 의지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결말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LA의 반지하 스튜디오.
빅터의 생각은, 그녀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자신의 모니터 속에서, 광화문의 폭력 사태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공포가 아닌,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것은 실패가 아니었다.
이것은, 전쟁이었다.
자신이 예언했던, 진실과 거짓 사이의, 빛과 어둠 사이의, 거룩한 전쟁이,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그의 눈에, 경찰의 방패에 맞아 피를 흘리는 시위대의 얼굴은, 비극의 희생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대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친,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얼굴이었다.
그는 이 모든 혼돈 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그리고 더 거대한 서사의 시작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방송 스튜디오의 모든 조명을 켰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 앉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 모든 폭력을, 자신들의 ‘정의로운 분노’를, 어떻게 더 숭고하고 강력한 이야기로 포장할 것인가에 대한, 빠르고 교활한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 혼돈을 잠재우는 것이 아니라, 이 혼돈을 자양분 삼아, 자신이 키우는 괴물을, 한 단계 더 성장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긴급 속보: 광화문 혈투, 미래 설계자들의 비열한 함정!}이라는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
카메라가 켜지자, 그의 얼굴에는, 방금 전까지의 흥분 대신, 순교자들의 피를 본 지도자의, 비통하고도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동지 여러분.”
그의 목소리는, 슬픔으로 잠겨 있었다.
“오늘, 우리는 광화문에서, 우리의 형제들이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오늘, 이 방송을 통해, 분노가 아니라, 슬픔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순수한 열정이, 어떻게 저들의 비열한 함정 속에서 더럽혀졌는지를, 똑똑히 고발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 모든 폭력의 책임을, 정면으로 회피하기 시작했다.
그는, 진정한 음모론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 즉 ‘모든 것을 뒤집어 해석하기’를 시전하고 있었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오늘 광장에서 폭력을 행사한 자들은, 우리의 동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순수한 집회를 폭력 시위로 변질시키기 위해, ‘미래 설계자들’이 심어놓은, 비열한 ‘프락치’들입니다.
그들은, 시위대인 척 위장하여, 의도적으로 경찰을 공격하고, 반대 의견을 가진 시민들을 폭행했습니다.
그리고 주류 언론들은, 지금 이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이 모든 폭력의 책임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
보이십니까, 여러분.
이것이 바로, 그들이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진실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폭력을 만들고, 그것을 빌미로 우리를 탄압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벽한 논리의 전환이었다.
가해자는, 순식간에 피해자가 되었다.
정의로운 분노는, 숭고한 저항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이, 이 이야기를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고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들의 죄책감을 씻어주고, 자신들의 분노를 정당화하며, 자신들을 더 비극적인 영웅으로 만들어 줄, 그런 이야기.
빅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 괴물에게, 새로운 먹잇감을 던져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모든 함정의 중심에는, 바로 어제 우리가 ‘배신자’로 낙인찍었던, 차지원이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모든 것이 너무나 절묘하지 않습니까?
그녀가 ‘이성적인 대화’를 운운하며 우리의 힘을 빼려 했던 바로 그 다음 날, 광장에서는 폭력이 터져 나왔습니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요?
아니면, 그녀의 그 ‘이성적인 호소’ 자체가, 오늘 이 폭력 사태를 유발하기 위한, 거대한 연극의 일부였을까요?
그녀가 우리의 시선을 끄는 동안, ‘미래 설계자들’은 뒤에서, 이 모든 폭력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는 차지원을, 이제 단순한 ‘표절범’이나 ‘배신자’를 넘어, 이 모든 유혈 사태의 배후에 있는, 가장 교활하고 사악한 ‘마녀’로 만들고 있었다.
그는 괴물의 분노를, 더 약하고, 더 방어하기 어려운, 단 하나의 개인에게로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이 괴물에게 새로운 싸움의 방식을 가르쳐주었다.
“동지 여러분.
이제 거리에서의 싸움은 잠시 멈춥시다.
그것은 저들이 원하는 방식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새로운 전쟁을 시작합니다.
바로 ‘디지털 성전(聖戰)’입니다.
오늘, 폭력 사태를 ‘시위대의 폭력’으로 규정한 모든 언론사들의 광고주 리스트를, 우리 ‘진실의 방패’ 커뮤니티에 공개하겠습니다.
그 기업들의 모든 제품에 대한 불매 운동을 시작합시다.
또한, 오늘 우리를 공격했던 저 ‘가짜 반대 시위대’의 얼굴과 신상을, 우리가 직접 밝혀냅시다.
그들이 누구의 사주를 받고, 우리를 공격했는지를, 낱낱이 파헤쳐, 온 세상에 공개합시다.
더 이상, 저들이 만들어놓은 판 위에서 싸우지 맙시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직접, 우리의 전쟁터에서, 우리의 방식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의 방송은, 거대한 선전포고였다.
그는, 자신이 키워낸 이 거대한 괴물에게, 새로운 이빨과 발톱을 달아주고 있었다.
그는 이 괴물을, 더 이상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괴물이 가진 야성과 폭력성을, 마음껏 해방시키고 있었다.
이수연은,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빅터의 이 모든 방송을, 망연자실한 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소환한 악마가, 이제 자신의 손을 떠나,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자신만의 군대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강태준의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정교하고 예리한 ‘메스’였다.
하지만 빅터는, 그 메스를 녹여,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부숴버리는, 거대한 ‘철퇴’로 바꾸어 버렸다.
이수연은 깨달았다.
빅터는, 더 이상 그녀의 유용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는,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창조주가 되어, 자신과 경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이 괴물을 다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이제 자신에게는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절망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강태준 역시, 자신의 펜트하우스에서, 빅터의 방송을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의 턱 근육이, 신경질적으로 꿈틀거렸다.
“저 어릿광대 놈이…”
그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자신의 정적들을 향한, ‘통제된 분노’였다.
하지만 빅터는, 그 분노를, 사회 전체를 향한, ‘통제 불능의 증오’로 바꿔버렸다.
‘디지털 성전’.
‘광고주 불매 운동’.
‘신상털이’.
이것은, 그가 원하는 질서의 세계와는 정반대에 있는, 무정부주의적인 혼돈이었다.
이런 종류의 혼돈은, 그의 정적들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기득권 전체, 그리고 종국에는 그 자신마저 위협하게 될 터였다.
그가 공들여 설계했던, 정교한 외과 수술이, 저 미친 광대의 손에 의해, 이제 막 무차별적인 난도질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의 머릿 속에, 어젯밤 내렸던 결심이, 더욱 단단하게 굳어졌다.
이 불길을, 이제는 꺼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불길의 가장 첫 번째 원천, 이 모든 서사의 시작점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이수연’이라는 이름의 파일로 향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 시각, 차지원은, 자신의 집, 굳게 닫힌 커튼 뒤에 숨어, TV 뉴스를 통해 광화문의 폭력 사태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조차 마른 채,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쓴 글자들이, 어떻게 현실의 피가 되었는지를, 고통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뉴스 화면 한쪽 구석에, 빅터의 방송 하이라이트가 자료 화면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이 모든 유혈 사태의 배후인 것처럼 불리는 것을 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자신이 이성과 진실을 무기로, 이 괴물과 싸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 생각이었던가.
괴물은, 이성을 먹지 않았다.
괴물은, 진실을 먹지 않았다.
괴물은, 오직 분노와 증오, 그리고 더 자극적인 이야기만을 먹으며, 끝없이, 무한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제 그 괴물은, 더 이상 이수연이라는 창조주조차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 먹이를 찾고, 스스로를 복제하며, 스스로 진화하는, 완벽한 생명체가 되어 있었다.
차지원은, 조용히 TV를 껐다.
세상은, 이제 그녀의 손을, 그리고 어쩌면 그 누구의 손도 떠나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그녀의 서재였지만, 서재가 아니었다.
사방의 책들은 모두 백지였고, 그녀의 책상 위에는 낡은 몽블랑 만년필 하나만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만년필을 집어 들자, 잉크 대신 펜촉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핏방울이 백지의 원고지 위로 번지며, 그녀가 7년 전 썼던 문장들을 스스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모든 신화의 시작에는, 제물이 필요하다.’
그 순간, 책상 맞은편 의자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윤석호였다.
그의 얼굴은, 그녀가 뉴스에서 보았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이 열리자, 흘러나온 것은 그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녀의 소설 속 문장이었다.
“나는, 첫 번째 제물이다.”
그가 말하자, 그의 목에서부터 검붉은 피가 흘러내려, 그의 하얀 셔츠를 적셨다.
차지원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장면이 바뀌었다.
그녀는 광화문 광장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성난 군중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모두 그녀의 소설 『그림자 연극』의 한 구절씩을 합창하고 있었다.
‘대중의 분노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흩어진 분노에, 우리는 이름을 붙여줄 것이다.’
그때, 군중 속에서 피를 흘리는 한 청년이,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이것이, 당신이 원했던 세상인가?”
그의 손가락 끝에서, 그녀가 썼던 문장들이, 검은 독사의 형상으로 변해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허억…!”
차지원은 숨 막히는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온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심장은 가슴을 찢을 듯이 뛰고 있었다.
새벽이었다.
침실의 굳게 닫힌 커튼 틈으로, 도시의 푸르스름한 여명이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악몽.
하지만 눈을 떠 마주한 현실은, 악몽보다 더 끔찍했다.
그녀는 옆을 보았다.
남편 김민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는 며칠째, 그녀를 피해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의 고통을 위로하는 대신, 그는 그녀의 고통이 자신의 일상을 방해하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다.
차지원은, 이 거대한 집 안에, 자신은 완벽하게 혼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는 유령처럼,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서재로 향했다.
한때, 그곳은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요새이자, 가장 즐거운 놀이터였다.
그녀의 지성이, 마음껏 뛰놀던 공간.
하지만 지금, 그곳은 그녀의 죄책감과 절망을 전시하는, 거대한 무덤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책상 의자에 앉아, 사방의 벽을 가득 채운 책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나 아렌트. 움베르토 에코. 르네 지라르. 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첵 …
그녀가 평생을 바쳐 사랑하고, 존경했던 스승들의 이름.
그녀는 책장에서, 한나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책을 펼쳤다.
‘이데올로기적 사유는, 현실 경험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제에서 출발하여 논리를 연역해내는 과정이다.’
그녀는 그 문장을 읽으며, 텅 빈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자신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수연이 어떻게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허구의 전제를 만들어내고, 그 전제에 맞춰 세상의 모든 것을 꿰어 맞추며 거대한 이데올로기를 구축하고 있는지를, 그녀는 누구보다 정확하게 분석할 수 있었다.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메커니즘’을 빌려, 대중이 왜 그토록 이 이야기를 갈망하는지도 설명할 수 있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편집광적 해석’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모든 것을 음모의 증거로 만들어내는지도 해부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 질병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의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진단은, 아무런 힘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그 정확한 진단 자체가, 이수연에게는 더 정교한 거짓말을 만들 영감을 주었고, 빅터에게는 더 강력한 선동의 재료를 제공했을 뿐이다.
그녀의 지성은, 무기력했다.
책 속의 모든 위대한 문장들이,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조롱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는 모든 것을 이해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그녀는 책을, 소리 없이 덮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이 지성의 요새가, 사실은 현실의 광기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는 모래성이었음을, 그녀는 처절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서재 벽 한쪽에 걸려 있는, 낡은 붉은색 머플러에 닿았다.
아스날 FC의 머플러.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뻗어, 보풀이 일어난 머플러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그녀는 기억했다.
몇 년 전, 이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홍대의 작은 펍(Pub)에서, 자신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과 낯선 어깨를 맞대고 응원가를 부르던, 그 순수했던 시절을.
스크린 속 북런던의 경기장은 너무나 멀리 있었지만, 그 작은 펍 안의 열기만큼은 세상 그 어느 곳보다 뜨거웠다.
그녀는 그들의 모토를 사랑했다.
‘Victoria Concordia Crescit’.
승리는 조화를 통해 성장한다.
그녀는, 그것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아름다운 원리라고 믿었다.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 서로를 믿고 함께 움직여, 하나의 완벽한 조화를 만들어낼 때, 비로소 위대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은, 그녀의 철학이자, 그녀의 종교였다.
그 순간, 그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아주 작고, 텅 빈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
그것은, 무언가 단단했던 것이, 그녀의 내면에서, 산산조각 나며 부서져 내리는 소리였다.
'조화?'
'성장?'
이 얼마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단어들이었던가.
세상이 만들어낸 이 현실은, 조화가 아니라, 분열과 증오를 통해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대를 밟고 올라서야만 승리하는, 가장 원초적인 제로섬 게임의 법칙을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은, 그녀의 아름다운 신념이 아니라, 그들의 잔인한 법칙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녀가 믿었던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 잔인한 세상 속에서만 통용되는,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머플러에서, 힘없이 손을 떼었다.
그녀의 세계관이, 완전히 붕괴하는 순간이었다.
차지원은 다시, 자신의 책상 의자에 주저앉았다.
창조주로서의 죄책감.
지식인으로서의 절망.
이상주의자로서의 환멸.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의 완전한 고립감.
그녀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전원을 끈, 검은 모니터 화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화면 속에는, 낯선 여자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텅 빈 얼굴.
더 이상 학자도, 이상주의자도, 창조주도 아닌.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제 알 수 없었다.
그 완전한 허무와 절망의 바닥에서, 아주 작고, 차가운 무언가가, 그녀의 내면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종류의 용기였다.
3. 임계점
광화문 광장의 폭력 사태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병들어왔던 사회가 마침내 터뜨린, 첫 번째 고름과도 같았다.
사건 이후, 대한민국의 여론은 두 동강이 났다.
주류 언론과 지식인 사회는, 그날의 폭력을 ‘민주주의에 대한 테러’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하지만 빅터의 추종자들과,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서사에 중독된 수많은 대중에게, 그날의 폭력은 ‘기득권의 비열한 함정’이자 ‘순교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분노는, 사그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외부의 비난을 자양분 삼아 더욱 단단하고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 전체와 싸우고 있는 성스러운 전사라는, 비극적인 자의식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분노의 한가운데에는, 이제 차지원의 이름이 있었다.
빅터가 그녀를 ‘배신자’이자 ‘역정보원’으로 지목한 이후, 그녀는 이 모든 혼돈의 책임을 뒤집어쓴, 완벽한 마녀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과거에 썼던 모든 논문, 그녀가 인터뷰에서 했던 모든 말, 심지어 그녀의 사소한 취향까지도, 그녀가 ‘미래 설계자들’의 하수인이라는 증거로 둔갑하여 인터넷을 떠돌았다.
그녀가 빨간 유니폼을 입는 아스날의 팬이라는 사실은, 그녀가 ‘붉은 세력’, 즉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위험인물이라는 증거가 되었다.
그녀가 한나 아렌트를 인용했다는 사실은, 그녀가 ‘전체주의 사상’을 옹호하는 지식인이라는 증거가 되었다.
진실과 논리는, 더 이상 아무런 힘도 없었다.
오직, 그들이 믿고 싶은 이야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들의 분노는, 이제 새로운 목표를 향하고 있었다.
단순히 차지원이라는 개인을 넘어, 그녀를 ‘비호’하고 있는 거대한 집단.
바로, 그녀가 몸담고 있는 대학이었다.
빅터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새로운 행동 강령이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우리의 적은, 차지원 개인이 아니다.
그녀와 같은 부패한 지식인들을 양산하고, 진실을 은폐하며, 그들만의 상아탑 속에서 대중을 기만하는, 저 대학이라는 시스템 그 자체다.
우리는 이제, 저 상아탑의 문을 부수고, 그 안에 숨어있는 진실을 우리의 손으로 직접 꺼내와야 한다.”
그들은, 차지원이 강의하는 바로 그 대학 앞에서, ‘진실 규명 총궐기 대회’를 열 것을 선포했다.
그것은 평화적인 집회를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언어는, 성전을 앞둔 군대처럼 폭력적이고 비장했다.
그 소식은, 차지원의 귀에도 들어왔다.
며칠째 집 안에 갇혀 있던 그녀에게, 학과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목소리는, 걱정과 책임 회피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차 선생.
알고 있겠지만, 다음 주 월요일에… 그 사람들이 학교로 온다고 하네.
총장님께서, 당분간 차 선생의 모든 강의를 잠정적으로 휴강 조치하라고 지시하셨어.
물론, 차 선생의 안전을 위한 조치이니, 오해는 말아주게.”
차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전화기 너머로, 그의 진짜 속마음을 듣고 있었다.
‘당신 때문에, 학교가 시끄러워졌으니, 제발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 달라.’
대학은, 그녀를 보호하는 대신, 가장 먼저 그녀를 격리하고, 꼬리를 자르고 있었다.
그녀가 평생을 바쳐 몸담았던 지성의 전당이, 외부의 비이성적인 폭력 앞에서, 이토록 쉽게 무너지는 것을, 그녀는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화가 끊기고,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녀의 아파트는, 이제 감옥이었다.
그리고 월요일이 되면, 그녀의 대학은, 그녀를 위한 화형장이 될 터였다.
월요일 오후.
가을 햇살이 캠퍼스의 단풍 위로 부서져 내리는, 평화로운 풍경 속으로, 이질적인 무리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오십여 명 남짓.
광화문 집회에 비하면 아주 작은 규모였지만, 그들의 눈빛은 훨씬 더 광적이고, 위험했다.
그들은, 빅터의 가장 충실한 ‘신념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표절범 차지원을 파면하라’, ‘미래 설계자들의 숙주, OOO 대학은 각성하라’와 같은, 살기등등한 문구들이 적힌 피켓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대학 본관 앞 잔디밭에 자리를 잡고, 확성기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고함 소리는, 조용했던 캠퍼스의 정적을, 날카로운 칼처럼 찢어발겼다.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창문 밖의 기이한 풍경에, 불안한 시선을 던졌다.
대학 측은, 수십 명의 경비원들을 동원해, 본관의 모든 출입문을 봉쇄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시위대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그들은, 대학이 자신들을 피해 진실을 은폐하려 한다고 확신했다.
시위대를 이끌고 있는 것은, 빅터의 방송에서 ‘행동대장’으로 불리는, 40대의 남성이었다.
그는 확성기를 들고, 건물 안을 향해 최후통첩처럼 외쳤다.
“차지원 교수 나와라!
총장은, 진실을 은폐하지 말고, 직접 나와서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라!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당신들의 위선적인 가면이 벗겨지는 것을 볼 때까지, 단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의 외침에, 시위대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 순간이었다.
본관의 문이 열리고, 몇몇 교수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 중에는, 차지원의 동료였던 철학과의 노교수도 섞여 있었다.
그는, 이 비이성적인 폭력 앞에서, 최소한의 이성을 지켜야 한다는 학자적 양심 때문에, 그 자리에 나선 참이었다.
그가 시위대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
이성을 찾으십시오.
이곳은, 진리를 탐구하는 신성한 학문의 공간입니다.
폭력과 선동으로, 여러분의 주장을 관철할 수는 없습니다.
차지원 교수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위대의 선두에 서 있던 한 젊은 청년이, 그를 향해 고함을 쳤다.
“닥쳐!
당신도, 저들과 한패지!”
그것은, 광화문 광장에서도 앞정 섰던 바로 그 청년이었다.
그의 눈은, 맹목적인 신념과, 세상에 대한 분노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저 노교수의 얼굴에서,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세상의 모든 기득권자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차지원을 처단하라’고 적힌 피켓이, 그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뛰쳐나갔다.
“길을 비켜라, 이 꼰대야!”
그는 노교수의 어깨를, 거칠게 밀쳤다.
노교수는, 힘없이 뒤로 넘어지며,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
그 소리가, 임계점을 알리는 총성이었다.
참고 있던 시위대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했다.
그들은, “교수들이 우리를 공격한다!”고 외치며, 경비원들의 저지선을 뚫고, 본관의 유리문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와장창!’
거대한 강화 유리가,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유리 파편이, 햇빛을 받아, 비처럼 반짝였다.
성역은, 무너졌다.
폭도들은, 건물의 안으로, 짐승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복도에는, 비명 소리와, 집기가 부서지는 소리, 그리고 그들의 광적인 함성이, 뒤섞여 울려 퍼졌다.
이성은, 완벽하게 마비되었다.
오직, ‘적을 파괴하라’는 원초적인 본능만이, 그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수연은,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이 모든 과정을, 한 편의 영화처럼 보고 있었다.
익명의 제보자가 보내온, 현장의 스마트폰 라이브 영상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키보드 위에서 썼던 ‘표절 의혹’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현실의 유리 파편이 되고, 늙은 교수의 피가 되었는지를, 똑똑히 목격하고 있었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차지원의 사회적 죽음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만들어낸 괴물은, 이제 진짜 죽음을, 진짜 파괴를 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모니터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가, 거대한 산이 되어, 그녀의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강태준 역시, 자신의 비밀 펜트하우스에서, 똑같은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의 비서관이, 막 들어온 긴급 보고를,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를 넘어, 차가운 경멸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것은, 그가 원했던 그림이 아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통제된 혼돈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완벽한 통제 불능이었다.
자신이 다스려야 할 왕국의 심장부에서, 자신이 이용하려 했던 백성들이, 짐승처럼 날뛰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정치적 자산이 아니라, 그의 정치적 부담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모든 혼돈은, 그의 완벽한 도시 설계에, 지워지지 않을 오점을 남길 터였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결심했다.
이 연극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끝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연극의 작가와, 주연 배우를, 모두 무대 위에서 치워버려야만 했다.
그의 시선이, 창밖의 도시를 향했다.
그의 눈빛은, 이제 마지막 결단을 내린, 늑대의 눈빛이었다.
4. 강태준, 결심하다
강태준은 자신의 펜트하우스, 그 거대한 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발아래로, 도시의 불빛들이, 마치 신의 발치에 흩뿌려진 보석처럼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밤, 그의 눈에는 그 아름다운 풍경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스크린 속에서는, 지옥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낮의 대학 캠퍼스가, 성난 폭도들의 함성과, 비명과, 유리 깨지는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이수연이 창조하고, 빅터가 키워낸, 그 거대한 괴물이, 마침내 이빨을 드러내고 날뛰는 모습을, 아무런 표정 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무거운 크리스털 잔이 들려 있었다.
그 안의 얼음은, 이미 오래전에 모두 녹아내린 상태였다.
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적어도, 평범한 인간들이 느끼는 그런 뜨거운 분노는 아니었다.
그의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것은, 완벽한 설계도를 따라 지어진 건축물이, 예상치 못한 자재의 결함으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는 건축가의, 차갑고도 지적인 분노였다.
그는 이 모든 사태를, 하나의 거대한 실패 사례로 분석하고 있었다.
그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어, 서재 한가운데 놓인, 미래 도시의 건축 모형으로 걸어갔다.
그것은, 그가 꿈꾸는 세계의 축소판이었다.
유리처럼 투명하고, 강철처럼 단단하며,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도시.
그는 손을 뻗어, 가장 높고 뾰족한 첨탑의 끝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 완벽한 질서였다.
그가 이 모든 판을 시작한 이유였다.
그는 ‘원로 그룹’이라는, 낡고 부패한 기둥들을 철거하고, 그 위에 자신의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괴의 과정이 필요했다.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서사는, 그 파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폭약이었다.
이수연은, 그 폭약을 가장 정확한 위치에 설치하고, 가장 효과적으로 터뜨릴 줄 아는, 최고의 폭파 전문가였다.
그녀는, 낡은 건물을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녀가 사용한 폭약의 위력이, 너무나 강력했던 것이다.
폭발의 여파는, 그가 철거하려 했던 낡은 기둥뿐만 아니라, 자신이 보존하려 했던 지반 그 자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저 스크린 속의 폭도들.
그들은, 강태준이 보기에, 새로운 도시의 시민이 될 자격이 없는, 불량한 자재들이었다.
그들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논리가 아니라, 선동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질서가 아니라, 혼돈 그 자체였다.
이런 자들을 동력으로 삼아 세워진 국가는, 결국 또 다른 혼돈으로 무너져 내릴 뿐이다.
그는 저들을, 자신의 도구로 이용하려 했을 뿐, 저들과 함께 가려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건축 모형 옆에 놓인, 작은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그가 버튼을 누르자, 도시 모형의 모든 건물들에서, 내부 조명이 일제히 켜졌다.
어둠 속에서, 수정처럼 빛나는 완벽한 도시.
그는 이 도시를, 사랑했다.
이것이 그의 유일한 연인이자, 그의 유일한 신이었다.
그리고 저 광장의 폭도들은, 이 신성한 도시를 더럽히는, 역겨운 오물들이었다.
그의 분석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빅터.'
그 LA의 광대는, 통제 범위를 벗어난 확성기였다.
자신이 원하는 정제된 메시지가 아니라, 온갖 종류의 저급한 소음을 마구잡이로 쏟아내고 있었다.
그는, 제거해야 할 불순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가장 중요한 문제.
이수연.
그녀는, 이 모든 실패의 근원이었다.
그녀는, 최고의 폭파 전문가였지만, 폭발의 여파를 계산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화성 퓨처시티’.
강태준의 머릿속에, 그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가 정말, 우연히 그 이름을 건드린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처음부터, 나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아킬레스건을 알고, 그것을 무기로 나를 시험하고, 혹은 협박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배신자이든, 아니면 통제 불능의 바보이든, 결론은 하나였다.
그녀는, 이 완벽한 도시를 건설하는 데 있어, 가장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심어놓은, 구조적 결함이었다.
건축가는, 건물의 붕괴를 막기 위해, 결함이 있는 기둥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 기둥이, 한때 얼마나 아름답고 유용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강태준은, 마침내 결심했다.
파괴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는, 다시 건설의 시간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모든 소란을 잠재워야만 했다.
이 불길을, 완벽하게 꺼야만 했다.
그리고 불을 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불길의 가장 중심에 있는 발화원을 제거하고, 그 위에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이다.
대중은, 이 모든 혼돈에 대한 설명을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모든 비극의 책임을 질, 단 한 명의 희생양을 원하고 있었다.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허구의 희생양은, 이제 그 힘을 다했다.
이제는, 진짜 피와 살을 가진, 실존하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이수연.
그녀는, 그 역할을 맡기에, 가장 완벽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이 모든 서사의 대중적인 얼굴이었다.
그녀는 이 이야기의 창조주였다.
대중은 그녀의 용기에 열광했고, 그녀의 문장을 숭배했다.
바로 그 숭배를, 그는 이제 가장 끔찍한 증오로 바꿔놓을 생각이었다.
이야기의 창조주를, 이야기의 가장 큰 희생양으로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모든 혼돈을 끝낼, 가장 완벽하고도 아이러니한 결말이었다.
그는 이수연을 제물로 바쳐, 세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첫째, 이 모든 폭력과 혼란의 책임을 그녀에게 뒤집어씌워, 자신은 위기에서 완벽하게 벗어난다.
둘째,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이야기 자체를, 한 명의 야심 많은 기자가 만들어낸 ‘거대한 사기극’으로 규정하여, 이 위험한 불길을 근원부터 잠재운다.
그리고 마지막, 가장 중요한 것.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 ‘화성 퓨처시티’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장 위험한 변수인 이수연을, 이 판에서 영원히 제거한다.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단 하나의 단점도 없는, 완벽한 수였다.
그의 마음속에서, 그녀에 대한 아주 희미한 미련이나 인간적인 연민이 남아있었다면,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불필요한 감정들을 모두 제거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이수연은 사랑했던 연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목적을 위해 아주 유용했던, 하나의 도구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도구는 자신의 수명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주인을 위협하는 흉기로 변해버렸다.
그렇다면, 폐기하는 것이 마땅했다.
강태준은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의 얼굴에는, 이제 어떠한 고뇌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모든 것을 결정한 자의, 차갑고도 명료한 결심만이 존재했다.
그는 책상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서,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암호화된 위성 전화를 꺼내 들었다.
이 전화기는, 그의 공식적인 권력 시스템 바깥에 존재하는, 그의 진짜 손과 발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한 도구였다.
그는 단축 번호 하나를 길게 눌렀다.
신호음은, 단 한 번만 울렸다.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의 주인을 짐작할 수 없는,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의원님.”
강태준은, 창밖의 도시를 바라보며, 조용히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오케스트라의 마지막 악장을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차분하고 위엄 있었다.
“지금부터, 이수연 기자에 대한 모든 것을, 다시 정리해주십시오.”
전화기 너머의 인물은,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듣고 실행할 뿐이었다.
“그녀가 만나는 모든 사람, 통화하는 모든 내역, 그녀의 모든 금융 거래…
그녀가 가지고 있는 모든 파일과, 그녀의 오피스텔에 존재하는 모든 자료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강태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명령을 덧붙였다.
“특히, ‘카산드라’ 차지원과, 그녀의 남편 김민준에 관련된 모든 것을 모아서 정리하세요.
이수연이 그들을 상대로 무슨 짓을 했고, 무슨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샅샅이 찾아내야 합니다.”
그는 이제, 이수연이 차지원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했던 모든 무기들을, 거꾸로 이수연 자신을 공격하는 데 사용할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강태준은, 마지막 지시를 내렸다.
그것은, 그의 진짜 의도를 담고 있는, 서늘한 한마디였다.
“그녀가, 우리 이야기의 완벽한 마침표가 되어야겠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전화기 너머의 남자는 완벽하게 이해했을 터였다.
그녀를,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자 ‘주범’으로 만들라는 뜻이었다.
강태준은 전화를 끊었다.
그는 다시, 거대한 유리창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발아래에서, 도시의 사이렌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그는, 이 폭풍이 지나간 뒤에 찾아올, 새로운 질서를 보고 있었다.
자신이 왕이 될, 고요하고 완벽한 질서.
그는 생각했다.
위대한 건축은, 언제나 파괴 위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이수연은, 그 위대한 건축을 위한, 마지막이자 가장 훌륭한 제물이었다.
강태준은,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심은, 이제 그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새로운 비극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