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6장: 우연이라는 이름의 화살
1. 이달의 기자상 트로피
그 달의 마지막 금요일 오후, 광화문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은 나르시시즘과 위선, 그리고 아주 약간의 진심이 뒤섞인 독특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매달 열리는 ‘이달의 기자상’ 시상식이었다.
대한민국에서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한 달에 한 번, 서로의 특종을 축하하고, 서로의 낙종을 위로하며, 잠시나마 동업자 의식을 확인하는 자리.
하지만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이면에는, 다음 달에는 반드시 저 자리에 내가 서고야 말겠다는 차가운 질투와 야망이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오늘, 그 무대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사람은 이수연이었다.
그녀가 연재 중인 ‘미래 설계자들’ 시리즈는, 이견의 여지 없이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수상작에 선정되었다.
단상 위, 스포트라이트의 한가운데 선 그녀는 완벽했다.
몸에 꼭 맞는 짙은 회색의 정장은 그녀의 지적인 이미지를 부각했고, 옅은 미소는 승자의 여유와 겸손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그녀는 크리스털로 만들어진, 묵직한 트로피를 두 손으로 건네받았다.
객석에서 박수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듯한 황홀한 착각.
이것이 그녀가 원했던 것이었다.
이야기의 전달자가 아니라,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것.
그녀는 마이크 앞에 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림 없이 차분했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객석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 상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완벽하게 계산된 겸손의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이 상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우리 사회의 가장 깊은 어둠에 첫 번째 균열을 낸, 고(故) 윤석호 전 차장님의 것입니다.”
객석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죽은 자를, 자신의 명예를 위한 가장 완벽한 방패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은, 진실을 향한 정론일보의 신념을 믿고, 저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신 모든 시민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객석의 동료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이제 승자의 오만함이 희미하게 서려 있었다.
“언론의 역할은, 단순히 보이는 것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리게 하며, 마침내 우리 사회가 더 건강한 내일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앞으로도 그 질문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연설이 끝나자, 다시 한번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녀의 상사인 오세훈 부장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얼굴이 벌게진 채 가장 큰 소리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는 이수연이라는 이름의 로켓을 타고, 편집국장 자리까지 날아오를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수연은 단상에서 내려왔다.
수많은 동료와 선후배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녀는 모든 이에게 우아한 미소로 화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그들의 얼굴 너머, 더 먼 곳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 모든 찬사가, 얼마나 쉽게 비난으로 바뀔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이 무대 위의 주인공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 외줄 위인지를.
시상식이 끝나고, 이어진 가벼운 칵테일파티.
이수연은 사람들의 축하 세례 속에서, 잠시 화장실을 핑계로 빠져나왔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복도 끝, 거대한 창문 앞에 섰다.
창밖으로는, 저녁의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한 광화문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방금 받은, 차갑고 묵직한 크리스털 트로피를 창틀 위에 올려놓았다.
트로피는 그녀의 공적인 성공을 증명하는 빛나는 증거품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마음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성공의 달콤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공이라는 이름의, 서늘한 불안감이었다.
며칠 전, 그녀의 각본에 없던 배우, 송진우 회장의 등장은 그녀의 완벽한 세계에 아주 작은, 그러나 치명적인 균열을 만들어냈다.
그의 경고는, 그녀가 만든 허구의 괴물이 현실의 진짜 괴물을 건드렸다는 신호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이 게임의 유일한 설계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 판의 이면에는, 자신이 아직 파악하지 못한, 더 거대하고 오래된 규칙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강태준.
그 역시 송진우의 경고를 보았을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어떤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그는 여전히 자신을, 그의 야망을 위한 가장 예리한 창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제는 자신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언젠가는 제거해야 할 위험한 변수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이수연은 트렌치코트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곳은 금연 구역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그녀는, 규칙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라이터를 켜, 불을 붙였다.
하얀 연기가, 그녀의 불안처럼, 유리창 위로 희미하게 퍼져나갔다.
그녀는 깨달았다.
불안을 잠재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더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을, 자신의 통제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
차지원.
그녀가 바로, 이 모든 불안의 시작점이었다.
그녀의 그 저주받은 통찰력.
그녀의 그 순진한 정의감.
그것이 이 판을 위험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를 무대 위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시간이었다.
그녀는 짧게 피운 담배를, 화분 위에 비벼 껐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오세훈 부장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말했다.
“부장님,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음 기사 때문에, 확인할 게 좀 있어서요.”
오 부장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이 기자. 너무 무리하지 말고.
지금 대한민국이, 다 이 기자만 쳐다보고 있어.”
이수연은 그 말을 뒤로 한 채, 프레스센터를 빠져나왔다.
그녀는 택시를 타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차가 주차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운전석에 앉아, 기자상 트로피를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그리고 시동을 걸었다.
그녀가 향한 곳은, 정론일보 편집국도, 강남의 고급 아파트도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을지로의 어둡고 좁은 골목, 그녀의 진짜 왕국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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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을지로의 비밀 오피스텔.
이수연은 샤워를 마치고, 낡은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 차림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조수석에 던져두었던 ‘이달의 기자상’ 트로피는, 책상 구석, 참고 서적들 위에 먼지 쌓인 전리품처럼 놓여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공적인 성공에 대한 감흥은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다음 단계의 전투를 앞둔 지휘관의, 차갑고 냉정한 결의만이 존재했다.
그녀는 새로운 워드 파일을 열었다.
이것은, 차지원을 겨냥한 두 번째 포탄이 될 기사였다.
그리고 그 포탄의 탄두에는, 차지원이 스스로 제공한 가장 강력한 화약, 바로 ‘경기도 토지대장’이라는 키워드를 장전할 참이었다.
그녀는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듯, 문장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글은, 거미가 거미줄을 치듯, 교묘하고 끈적하게 논리를 엮어 나갔다.
<…본지의 단독 보도 이후, ‘미래 설계자들’의 실체에 대한 제보가 쏟아지고 있다. 그중, 자신을 조직의 내부 사정에 정통했던 ‘또 다른 카산드라’라고 밝힌 한 제보자는, 본지에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왔다. 그들에 따르면, ‘미래 설계자들’의 진짜 자금줄은 최근의 주식 시장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특정 가문들이 관리해 온 ‘경기도 외곽의 비공개 토지대장’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라, 우리 사회 기득권의 가장 깊은 뿌리를 건드리는 문제다. 제보자는 현재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며…>
이수연은 스스로 감탄했다.
이 얼마나 완벽한 왜곡인가.
차지원의 학문적 반박을, ‘내부자의 증언’으로 둔갑시켰다.
어느 힘없는 여성 철학자의 지적인 용기를, ‘조직에 대한 배신’으로 바꿔치기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혹시나 모를 명예 훼손이라는 법적인 책임까지 피해 갈 수 있는 퇴로를 만들었다.
이제 차지원이 무슨 말을 하든, 세상은 그녀를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음모의 일부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녀가 진실을 외칠수록, 그녀는 더 깊은 거짓의 늪으로 빠져들게 될 터였다.
기사의 초고를 완성한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공적인 전쟁의 포탄을 장전했으니, 이제 사적인 사냥의 활시위를 당길 차례였다.
그녀는 다른 모니터에, 김민준의 프로필과 작품 사진들을 띄웠다.
그리고 ‘클로이’라는 가명을 저장해 둔, 별도의 업무용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김민준의 번호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고, 곧이어 어수룩하고 긴장한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보세요?”
이수연의 입가에,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바라보는 거미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차가운 기자의 것에서, 따뜻하고 매혹적인 갤러리스트 ‘클로이’의 것으로 바뀌었다.
“김민준 작가님. 저 클로이입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혹시, 지금 통화 괜찮으실까요?”
그녀는 전화기 너머, 남자가 당황하며 기뻐하는 숨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음악처럼 들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 네! 네! 괜찮습니다! 그럼요!”
“다행이네요.
그날 갤러리에서 본 작가님의 작품이, 며칠 동안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요.
실례가 안 된다면, 약속대로 작가님의 작업실에 한번 찾아뵙고 싶은데.
하지만 그전에, 좀 더 편안한 자리에서 작품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먼저 나눠보고 싶어서요.
혹시 내일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
제가 아주 조용하고, 와인이 맛있는 곳을 아는데.”
이수연은 창밖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도시의 불빛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저 불빛들 아래에서, 누군가는 사랑을 하고, 누군가는 절망하고, 또 누군가는 꿈을 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바로 그 모든 인간적인 감정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김민준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좋습니다! 시간 괜찮습니다!”
덫은 완벽하게 놓였다.
그녀는 책상 구석에 놓인, 차갑게 식어버린 기자상 트로피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이게 바로, 진짜 트로피지.'
그녀에게, 한 인간의 영혼을 완벽하게 지배하는 것보다 더 짜릿한 성공은 없었다.
2. 너무 정확한 저격
다음 날 아침, 정론일보의 1면은 다시 한번 이수연의 이름으로 장식되었다.
그녀는 밤 사이 한숨도 자지 않았다.
‘이달의 기자상’ 트로피는, 을지로 오피스텔의 책상 구석에서, 마치 오래전 잊힌 유물처럼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새로이 창조해 낸 문장들 위에 곤두서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후속 기사가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의 완벽한 서사에 흠집을 내려는 차지원을, 바로 그 서사의 가장 비참한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릴, 정교하게 설계된 덫이었다.
그녀는 기사의 첫머리부터, 대담한 거짓말을 던졌다.
< [단독] ‘미래 설계자들’, 내부 균열인가… 조직원 A씨의 충격적 추가 폭로”>
그녀는 차지원을, ‘조직원 A씨’라는 익명의 가면 뒤에 숨겨버렸다.
‘또 다른 카산드라’라는, 신화적인 이름을 부여하며 그녀의 존재를 신비화했다.
그녀는 차지원의 기고문을, ‘조직의 배신에 분노한 내부 고발자의 양심선언’으로 둔갑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치명적인 독을 주입했다.
<…조직원 A씨는 본지와의 비밀 접촉에서, ‘미래 설계자들’의 진짜 자금줄은 최근의 주식 시장이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특정 가문들이 관리해 온 ‘경기도 외곽의 비공개 토지대장’에 숨겨져 있다고 폭로했다. 이는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라, 우리 사회 기득권의 가장 깊은 뿌리를 건드리는 문제다. 제보자는 현재 조직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수연은 자신의 기사를 읽으며, 스스로의 완벽함에 감탄했다.
차지원이 던졌던 ‘진실’의 창을, 그녀는 완벽하게 비틀어, 이제 차지원의 심장을 겨누는 ‘거짓’의 총알로 재장전했다.
이제 차지원은 더 이상 순수한 비평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음모의 한복판에 서 있는, 위험하고 의심스러운 인물이 되어버렸다.
그녀가 앞으로 무슨 말을 하든, 세상은 그녀를 ‘조직의 배신자’ 혹은 ‘꼬리 자르기를 당한 하수인’으로 볼 것이다.
완벽한 승리였다.
기사가 온라인에 배포된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은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에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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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즉시 긴급 라이브 방송을 켰다.
그의 얼굴은, 성스러운 계시라도 받은 선지자처럼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보셨습니까, 여러분! 마침내, 내부 고발자가 나왔습니다!
제가 어제 예언했던 그대로입니다!
이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경기도 땅!
여러분, 제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이들이 말하는 경기도 땅은, 바로 과거 ‘화성 퓨처시티 개발 사업’과 관련이 있습니다!
20년 전, 갑자기 백지화되었던 바로 그 거대 프로젝트!
그 뒤에 바로, ‘미래 설계자들’이 있었던 겁니다!”
빅터는 자신이 뭘 말하는지도 모른 채, 인터넷에 떠도는 낡은 개발 계획의 이름을 주워섬겼다.
그는 그저, 자신의 서사를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럴듯한 고유명사를 끼워 넣었을 뿐이었다.
그의 광적인 외침은, 그러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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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준은 자신의 펜트하우스에서, 아침 브리핑을 보고받고 있었다.
그는 이수연의 새로운 기사를 읽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 이수연이야.
가장 성가신 변수를,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바꿔버렸군.’
그는 그녀의 대담함과 치밀함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녀가 차지원을 완벽하게 제압했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의 시선이, 비서관이 띄워놓은 실시간 여론 반응 창으로 향했다.
빅터의 방송 하이라이트 영상이, 가장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무심하게,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 속에서, 빅터가 침을 튀기며 외치고 있었다.
“…이들이 말하는 경기도 땅은, 바로 과거 ‘화성 퓨처시티 개발 사업’과 관련이 있습니다!…”
순간, 강태준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그의 동공이, 지진계의 바늘처럼 미세하게 흔들렸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갑자기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의 귀에는, 자신의 심장이 혈액을 밀어내는, 차갑고 둔탁한 소리만이 들려왔다.
"화성 퓨처시티 개발 사업..."
그것은, 강태준과, 송진우 회장, 그리고 몇몇 그림자 속의 가문들만이 아는, 절대로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이름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수십 년간 쌓아 올린 부와 권력의 진짜 원천이자, 그들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그것은, ‘원로 그룹’조차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는, 그들 카르텔의 가장 깊은 곳에 묻어둔 성역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저 LA의 삼류 광대가, 그 이름을 알고 있단 말인가.
강태준의 머릿속에서, 모든 조각들이 섬광처럼, 그러나 끔찍하게 잘못된 그림으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송진우 회장의 경고.
차지원의 기고문에 등장했던, 너무나 정확했던 ‘경기도 땅’이라는 키워드.
그리고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증폭시켜, 마침내 ‘화성 퓨처시티’라는 이름까지 꺼내든 이수연과 빅터의 합창.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설계된 것이다.
이수연.
그녀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신의 정적인 ‘원로 그룹’을 제거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녀의 진짜 목표는, 자신과, 이 카르텔 전체였던 것이다.
차지원이라는 여자는, 그녀가 내세운 또 다른 배우이거나, 혹은 진짜 내부 고발자일지도 모른다.
송진우 회장의 경고는, 바로 이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네가 키운 개가, 이제 너를 물려 하고 있다.’
강태준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가장 예리한 창이라고 믿었던 여자가, 사실은 자신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던 독 묻은 비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던 이 연극의 각본이, 사실은 자신의 무덤을 파기 위해 처음부터 치밀하게 쓰여졌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왕의 미소는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함정에 빠진 짐승의, 차가운 분노와 의심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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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이수연은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폭발적인 기사 반응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였다.
차지원은 이제, 음모의 공범으로 낙인찍혔다.
김민준에게서는, 오늘 저녁에 만나자는 문자가 와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는 승리의 축배를 들기 위해,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캔을 꺼냈다.
캔을 따려는 순간, 그녀의 개인 연락용 스마트폰이 울렸다.
강태준이었다.
그녀는 의아했다.
이 비상 연락망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에만 사용하는 것이 그들의 규칙이었다.
그녀는 맥주 캔을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승리감에 취해 살짝 들떠 있었다.
“네. 강 의원님.”
“오늘 기사, 반응이 아주 뜨겁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태준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차가웠다.
그 안에는, 어떠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마치, 얼음장 같았다.
“네. 의도했던 대로, 원로들 쪽에서 꽤 당황하는 모양입니다.”
이수연은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심장이 다시, 불길하게 뛰기 시작했다.
“의도했던 것, 이상인 것 같은데.”
강태준이 말했다.
“‘화성 퓨처시티’라… 흥미로운 이름이더군.
그건 어디서 나온 정보지?”
이수연의 뇌가, 순간 정지했다.
화성 퓨처시티?
그녀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건… 빅터 같은 유튜버들이 만들어낸, 온라인상의 억측일 뿐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원래 판이 커지면, 그런 확인되지 않은 살들이 붙기 마련이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변명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와의 대화에서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억측이라.”
강태준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 억측이, 너무 정확해서 말이야.
꼭,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일부러 흘린 것 같았거든.”
이수연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아주 단단히 잘못되었다.
“오늘 밤, 내 사무실로 오지.
우리가 만든 이야기에 대해, 좀 더 깊은 대화가 필요할 것 같으니.”
그것은 제안이 아니었다.
그것은, 재판정으로의 소환 통보였다.
전화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끊겼다.
‘뚜- 뚜- 뚜-’
건조한 신호음만이, 그녀의 귀를 때렸다.
이수연은 잠시, 스마트폰을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건조하고 기계적인 신호음이, 이수연의 귀를 고문하듯 파고들었다.
그녀는 스마트폰을 든 채, 오피스텔의 한가운데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몇 분 전까지, 이 공간은 그녀의 완벽한 통제하에 있는 세계의 관제탑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방의 모든 공기는 그녀의 목을 조르는 차가운 진공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화성 퓨처시티.'
강태준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내뱉었던 그 이름이, 그녀의 뇌 속에서 불길한 종처럼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무지함은, 이 게임에서 가장 큰 죄악이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자신의 컴퓨터로 달려갔다.
방금 전까지 거대한 서사를 창조하던 그 신의 손가락은, 이제 허둥대는 필멸의 인간처럼 자판 위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ㅎ...화성 추퍼시치 개발 사업’.
백스페이스키로 글씨를 모두 지우고 천천히 자판을 두드렸다.
"화성 퓨처시티 개발 사업"
엔터 키를 누르는 순간, 그녀의 눈앞으로 수십 개의 검색 결과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대부분은 무의미한 정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훈련된 매처럼, 그 정보의 더미 속에서 진짜 사냥감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20년도 더 된, 빛바랜 디지털 신문 기사의 아카이브.
어느 은퇴한 공무원이 취미로 운영하는, 지금은 폐쇄된 블로그의 캐시 파일.
국회 도서관 데이터베이스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낡은 정책 보고서의 PDF 파일.
정보의 조각들은, 마치 고대의 유적지에서 발굴된 토기의 파편들처럼,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수연은 그 파편들을, 경이로운 속도로 맞춰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앞에서, 잊혀진 역사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화성 퓨처시티 개발 사업’은, 1990년대 초 정부 주도하에 발표되었던 야심 찬 프로젝트였다.
수도권 남부에, 과학과 비즈니스, 주거가 결합된 미래형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거대한 청사진.
당시 언론은 연일 그 장밋빛 미래를 떠들어댔다.
그녀는 프로젝트를 위해 구성되었던 민간 컨소시엄의 명단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명단 위에서, 그녀는 익숙한 이름들을 발견했다.
지금 자신이 공격하고 있는 강태준의 정적, 바로 그 ‘원로 그룹’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이 경영하던 대기업들의 이름.
그리고 그 컨소시엄의 최연소 이사로 참여했던, 앳된 얼굴의 한 남자.
재계의 살아있는 신화, 송진우 회장이었다.
모든 것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송진우 회장의 이례적인 경고.
차지원의 기고문에 등장했던 ‘경기도 외곽의 비공개 토지대장’.
그리고 이 프로젝트.
그녀는 프로젝트의 마지막을 다룬 기사를 찾아냈다.
프로젝트는, 착공 직전에 갑자기 백지화되었다.
정부의 공식 발표는 ‘환경 문제와 예산 부족’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너무나 허술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작은 단신 기사 하나가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프로젝트를 위해 수용되었던 막대한 양의 토지가, 국고로 환수되지 않고, 컨소시엄에 참여했던 몇몇 해외 페이퍼컴퍼니에 헐값으로 불하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그 페이퍼컴퍼니들의 이름을 추적했다.
모두, 조세 회피처로 유명한 케이맨 제도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
그 뒤의 흐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수연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녀는 거대한 그림의 전체를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 그림이 얼마나 끔찍하고 거대한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개발 사업이 아니었다.
이것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가장 거대한, 합법을 가장한 ‘땅 도둑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은, 지난 수십 년간, 저들만의 카르텔을 지탱해 온 비밀스러운 비자금의 원천이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차지원은, 이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학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가장 그럴듯한 가설을 던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 가설이, 공교롭게도, 진짜 과녁의 정중앙에 명중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수연은.
차지원을 잡기 위해, 자신이 던졌던 그 ‘우연한 화살’을, 자랑스럽게 집어 들어, 온 세상이 보란 듯이 다시 한번 쏘아올린 것 뿐이었다.
그 화살은, 옆에 서 있던 강태준의 심장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제, 그 화살은 분노한 왕의 손에 들려, 정확히 자신을 향해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오피스텔 책상 구석.
어제 저녁,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받았던 ‘이달의 기자상’ 트로피가,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서, 그녀의 어리석음을 비웃듯 반짝이고 있었다.
한 달 만에, 대한민국 최고의 기자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사 때문에, 그녀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되었다.
트로피는 더 이상 명예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카루스가 추락하기 직전, 가장 높이 날아올랐던 순간을 기록한, 차가운 묘비명처럼 보였다.
사냥꾼은, 어느새 자신이 더 거대한 사냥꾼의 조준경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참이었다.
3. 왕의 의심
이수연은 여의도로 향하는 차 안에서, 자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운전대의 차가운 가죽을 꽉 쥐며, 그 떨림을 멈추려 애썼다.
평생, 그 어떤 취재 현장에서도 느껴본 적 없었던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외부의 물리적인 위협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던 게임의 판이, 어느새 자신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내면의 근원적인 공포였다.
강태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얼음 파편처럼 계속해서 맴돌았다.
‘그 억측이, 너무 정확해서 말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지 않았다.
분노보다 더 무서운, 모든 감정이 제거된 순수한 의심만이 존재했다.
그녀는 지금,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왕의 재판정으로 소환된 죄인이었다.
창밖으로, 한강 다리의 주황색 불빛들이 비처럼 스쳐 지나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저 불빛들은 그녀의 발아래 놓인 거대한 장기판의 말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저 불빛들은 자신을 감시하는 수만 개의 냉정한 눈동자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필사적으로 변론을 준비했다.
'나는 몰랐다.
그것은 나의 실수가 아니다.
그것은 빅터라는 광대가 만들어낸 통제 불능의 변수일 뿐이다.
나는 여전히 이 판을 통제할 수 있다.
나는 당신에게 여전히 유용하다.'
그녀는 이 논리를, 흔들림 없는 눈빛과 목소리로 강태준에게 증명해야 했다.
그녀의 생존은, 이제 거기에 달려 있었다.
더 마크 타워의 VIP 엘리베이터는, 그날따라 유난히 느리게 올라가는 것 같았다.
짙은 색 원목 벽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사냥꾼이 아닌, 사냥감의 표정을 보았다.
‘띵.’
60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마치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펜트하우스의 공기는 이전과 달랐다.
은밀한 공모자들의 야망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밀실의 온기는 사라지고, 모든 것을 심판하려는 듯한 차갑고 무거운 정적만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강태준은 창가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거대한 서재 책상 뒤편, 주인을 닮아 권위적이고 딱딱한 가죽 의자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위스키 잔 하나만이 스탠드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들어서는 것을 보았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고갯짓으로, 책상 앞의 작은 의자를 가리켰다.
마치, 취조실에 들어선 용의자에게 자리를 권하는 형사처럼.
이수연은 그가 만들어낸 권력의 구도를 즉시 알아차렸다.
그들은 더 이상 소파에 나란히 앉는 파트너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책상을 사이에 둔 심문자와 피의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애써 감추며, 그가 지시한 의자에 앉았다.
강태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얼음이 담긴 위스키 잔을 천천히 돌리며, 그녀의 얼굴을 관찰할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표정에서 아주 작은 거짓의 흔적이라도 찾아내려는 듯 집요하고 날카로웠다.
이수연은 그 침묵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먼저 입을 열었다.
“갑자기 부르신 이유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를 연기했다.
“빅터의 방송 건 말입니다.”
“빅터.”
강태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교활한 광대 말인가.
그는 상상력이 아주 풍부하더군.
‘화성 퓨처시티’라.
아주 구체적인 망상이야, 그렇지 않나?”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압박감이 실려 있었다.
이수연은 준비한 대로 대답했다.
“망상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의 모든 불행을 ‘미래 설계자들’과 연결시키기 시작했습니다.
빅터는 그저, 그 흐름에 편승하여 가장 자극적인 키워드를 주워섬긴 것뿐입니다.”
“그런가.”
강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는 그저, 그 우연들이 너무나 기묘하게 겹치는 것이 흥미로워서 말이야.
경기도의 한 이름 없는 대학 강사가, 자신의 칼럼에서 아주 학술적인 어조로 ‘경기도의 토지’ 문제를 제기하고.
LA의 한 삼류 유튜버는, 바로 그 다음 날, 귀신같이 ‘화성’이라는 구체적인 지명까지 언급하며 판을 키우고.
이것은 마치, 아주 잘 짜인 2인조 연극 같지 않나?”
그의 말은, 예리한 칼끝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차지원.
그 여자에 대해 다시 한번 말해봐.
당신이 내게 보고했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이수연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지만,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제가 파악한 바는, 처음 보고 드린 것과 같습니다.
그녀는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일 뿐입니다.
그녀의 칼럼은, 자신의 소설이 도둑맞은 것에 대한 지적인 복수심에서 나온 행동이고요.
그녀가 언급한 ‘경기도 토지’는, 그녀가 가진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가장 그럴듯한 추론일 뿐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진짜 괴물의 꼬리를 밟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빅터는?”
“빅터는 그저, 차지원의 글에서 힌트를 얻어, 인터넷에 떠도는 낡은 개발 계획의 이름을 짜깁기한 것뿐입니다.
그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방송을 해왔습니다.
진실과 거짓을 뒤섞어, 가장 자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그게 그의 방식입니다.”
이수연의 대답은 논리적으로 완벽했다.
하지만 강태준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의 의심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왕국에 침입한 이물질을 감지한, 짐승의 본능에 가까웠다.
“송진우 회장님도,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강태준이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수십 년간 침묵하던 그 노인이, 하필 바로 이 타이밍에, ‘역사의 무덤’ 운운하는 경고를 날린 것도?”
“그것은…”
이수연의 말이, 처음으로 막혔다.
“그것은, 송 회장님께서 저희가 공격하는 ‘원로 그룹’과 과거에 사업적 연관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자신에게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한, 과잉 반응이겠죠.”
강태준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책상 앞을 서성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과잉 반응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어.”
그는 이수연의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깊고 어두웠다.
“어쩌면 당신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차지원이라는 여자가, 단순한 작가가 아니라, 당신이 심어놓은 정보원이라는 가능성.
그리고 당신이 나를 파트너로 삼은 진짜 이유가, 나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것을 넘어, 나 자신과, 내가 속한 이 세계 전체를 무너뜨리기 위함이라는, 그런 가능성 말이야.”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이수연은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의 의심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능력이 아니라, 그녀의 충성심 자체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그 짧은 침묵의 순간을, 강태준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흔들리는 공포의 그림자를 읽었다.
그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심문은 끝났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었다.
확신은 아니지만,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그의 목소리는, 다시 감정이 없는 사업가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됐어.
그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그는 화제를 바꿨다.
하지만 이것은 용서가 아니었다.
집행 유예였다.
“지금 중요한 건, 이 판을 수습하는 거야.
당신이 시작한 이 불장난을, 당신 손으로 직접 꺼야겠어.”
그는 그녀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화성’이라는 이름은, 이제부터 금기어야.
당신의 다음 기사들은, 대중의 시선을 다시 ‘원로 그룹’의 비리 문제로 완벽하게 돌려놔야 해.
이번 소동은, 그들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인 자작극, 혹은 역공작이었다는 식으로 프레임을 짜도록 해.”
그리고 그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차갑고 단호했다.
“그리고 차지원.
그 여자.
이제 대중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야겠어.
영원히.
어떤 방법을 쓰든, 상관없어.
그녀의 입에서, 다시는 ‘진실’ 따위의 단어가 나오지 않게 만들어.”
그것은 지시가 아니었다.
사형 선고였다.
이수연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강태준의 의심을 거두기 위해, 그가 원하는 것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그것이 그녀가 이 재판정에서 살아나갈 유일한 길이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강태준이 그녀를 멈춰 세웠다.
“수연아.”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부드러웠지만, 그래서 더 섬뜩했다.
“건축에서 말이야.
아무리 중요했던 기둥이라도, 구조적인 결함이 발견되면, 즉시 제거해야 하는 법이야.
건물 전체의 안전을 위해서.
그 기둥이 한때 얼마나 유용했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그것은 경고가 아니었다.
마지막 통보였다.
이수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파트너십은, 바로 이 순간, 공식적으로 끝났다.
이제 그녀는 그의 파트너가 아니라, 언제든 제거될 수 있는, 그의 가장 위험한 부하였다.
이수연이 펜트하우스를 나서는 길은, 지옥으로 내려가는 길처럼 길고 어둡게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녀는 차가운 금속 벽에 이마를 기댔다.
공적인 성공, 사적인 관계, 그리고 이 게임의 통제권까지.
그녀는 지난 며칠 사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참이었다.
펜트하우스에 홀로 남은 강태준은, 창가로 다가갔다.
그는 저 멀리, 더 마크 타워를 빠져나와 도시의 불빛 속으로 사라지는, 작은 자동차의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이수연이 배신자인지, 아니면 통제 불능의 바보인지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경우든, 그녀는 이제 너무 위험했다.
그는 생각했다.
‘일단, 저 여자를 이용해 차지원과 원로들을 정리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모든 소동의 책임을 지고, 그녀 역시 무대 위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다.’
왕의 의심은, 어느새 왕의 판결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가장 아꼈던 창을 부러뜨리기로 결심한 참이었다.
4. 성공이라는 이름의 불안
이수연은 자신의 차 안에서, 도시의 불빛이 만들어내는 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강변북로의 가로등 불빛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그녀의 얼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빛.
그리고 어둠.
다시 빛.
그리고 어둠.
그녀의 머릿속처럼, 세상은 명료한 빛과 칠흑 같은 어둠으로 나뉘어 있었다.
몇 시간 전, 강태준의 펜트하우스에서 나온 이후, 그녀는 정처 없이 도시를 맴돌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과부하가 걸린 서버처럼 뜨겁고 소란스러웠다.
그녀는 강태준과의 마지막 대화를, 수백 번, 수천 번 복기하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눈빛.
감정 없는 목소리.
그리고 마지막 경고.
‘건축에서 말이야.
아무리 중요했던 기둥이라도, 구조적인 결함이 발견되면, 즉시 제거해야 하는 법이야.’
그녀는 더 이상 그의 파트너가 아니었다.
그녀는, 구조적 결함이 의심되는 기둥이었다.
언제든 제거될 수 있는.
그녀는 자신의 오만함이 만들어낸 결과에, 스스로 전율했다.
그녀는 자신이 이 게임의 설계자라고 믿었다.
모든 변수를 통제하고, 모든 인물의 동선을 예측할 수 있다고 자만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게임의 판 자체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더 깊고 단단한 지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화성 퓨처시티. 송진우 회장.
그녀가 조작한 윤석호의 죽음, 그녀가 파헤친 차지원의 과거 등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짜 현실의 무게.
그녀는 허공에 성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성의 기초가, 우연히 진짜 지반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려 버린 것이다.
그녀는 핸들을 쥔 자신의 손이, 다시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두려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녀는 진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녀는 차를 돌려, 을지로로 향했다.
그녀가 돌아갈 곳은, 그곳밖에 없었다.
그녀의 왕국.
이제는 그녀의 유일한 벙커가 되어버린 그곳.
오피스텔에 도착했을 때,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도록 멈추지 않던 인쇄소의 기계 소음이, 지친 한숨처럼 잦아드는 시간.
그녀는 708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문을 잠그는 순간, 바깥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되는 그 익숙한 감각 속에서, 아주 잠시 안도감을 느꼈다.
이곳은 안전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녀는 샤워도 하지 않은 채, 컴퓨터 앞에 앉았다.
피로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불안이, 아드레날린이 되어 그녀의 모든 신경을 각성시키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화성 퓨처시티 개발 사업’을 검색했다.
그리고 밤새 모아두었던 자료들을, 처음부터 다시, 이번에는 다른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강태준의 의심’을 이해하기 위해 읽었다면, 지금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읽었다.
그녀는 흩어진 정보의 파편들 속에서, 이 거대한 괴물의 약점을, 혹은 자신이 빠져나갈 아주 작은 틈이라도 찾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정보가 쌓일수록, 그녀를 덮쳐오는 것은 희망이 아니라, 거대한 절망감뿐이었다.
이것은 그녀가 상대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었다.
이것은, 수십 년간 이어진, 돈과 피로 얽힌 거대한 카르텔의 역사 그 자체였다.
자신이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이름으로 묘사했던 그 허구의 괴물보다, 훨씬 더 추악하고, 훨씬 더 강력한, 진짜 괴물이었다.
그녀는 책상 구석에 놓인 ‘이달의 기자상’ 트로피를 보았다.
그녀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트로피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녀는 그 차갑고 묵직한 크리스털 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며칠 전,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 속에서 이 트로피를 받았을 때,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자신의 지성과 용기가, 마침내 세상을 움직였다는 달콤한 증거.
하지만 지금, 이 트로피는 그녀의 손안에서, 그녀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무겁고 차가운 돌덩이에 불과했다.
그녀는 이 트로피를, 벽을 향해 힘껏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신이 이룬 이 모든 성공이, 사실은 자신을 옥죄는 가장 아름다운 감옥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죄수의 분노.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트로피를 조용히, 책상 가장 깊숙한 서랍 안에 넣어버렸다.
마치, 자신의 빛나던 과거를 관 속에 넣어 묻어버리는 것처럼.
공적인 성공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오직 생존을 위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녀에게는 임무가 있었다.
강태준이 내린, 두 가지 임무.
하나는, 차지원을 제거하는 것.
다른 하나는, 이 모든 소동을 ‘원로 그룹’의 자작극으로 덮어씌우는 것.
그녀는 이것이, 강태준이 자신에게 내리는 마지막 시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임무를 완벽하게 성공시킨다면, 그녀는 ‘유용한 도구’로서의 가치를 다시 한번 증명하고, 살아남을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구조적 결함이 발견된 기둥’은, 즉시 제거될 터였다.
그녀는 먼저, 차지원을 떠올렸다.
강태준은 그녀를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라고 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사회적인 매장 이상의, 더 어둡고 무서운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수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
자신이 정말, 그 선을 넘을 수 있을까.
이야기를 만드는 것을 넘어, 한 인간의 삶을 직접 파괴하는 것.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직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방식이 아니다.
자신의 무기는, 폭력이 아니라 언어다.
그녀는 차지원을,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고립시키고, 그녀의 모든 신뢰를 파괴하여, 그녀 스스로 두 번 다시는 펜을 들 수 없도록, 그녀의 영혼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제거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열쇠는, 김민준이 쥐고 있었다.
그녀는 ‘클로이’의 이름으로, 김민준에게 보낼 문자를 작성했다.
[작가님. 어젯밤, 꿈속에서도 작가님의 그림을 보았어요. 혹시 오늘 저녁, 와인 한잔 어떠세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어서요.]
그녀는 자신의 유혹이,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더 어려운 문제가 남았다.
‘화성 퓨처시티’라는 이름의, 자신이 깨워버린 괴물을, 어떻게 다시 잠재울 것인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원로 그룹’의 탓으로 돌릴 것인가.
그녀는 새로운 기사의 틀을 짜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썼던 그 어떤 기사보다도, 더 교묘하고, 더 복잡한 거짓말이어야 했다.
그녀는 진실(화성 퓨처시티의 존재)을, 더 큰 거짓말(원로 그룹의 자작극) 속에 숨겨야 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이전보다 훨씬 더 무겁고,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조의 희열은 사라졌다.
오직,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노동만이 남았다.
동이 트고 있었다.
밤새 내리던 불안의 비가 그치고, 그녀의 머릿속은 다시, 차가운 전략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길 수 있었다.
아니, 이겨야만 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암호화된 USB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컴퓨터에 연결했다.
화면 위로, 단 하나의 파일이 나타났다.
윤석호가 남겼던, 진짜 유언장.
박형사에게서 거액을 주고 사들인, 그녀의 마지막 보험.
그녀는 유언장의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그 안에는, 윤석호가 평생을 바쳐 쫓았던 ‘미래 설계자들’의 실체와, 그 과정에서 겪었던 배신, 그리고 ‘원로 그룹’의 비리에 대한 절망적인 고발이 담겨 있었다.
물론, 그가 말하는 ‘미래 설계자들’은 차지원의 소설 속 존재와는 다른, 그 자신의 편집증이 만들어낸 허상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안의 ‘사실’들은, 진짜였다.
이것이야말로, ‘원로 그룹’을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진짜 폭탄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강태준 역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수연은 USB를 컴퓨터에서 분리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목에 걸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녀의 심장 바로 위에서 느껴졌다.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무기였다.
만약 강태준이, 자신을 ‘제거’하기로 결심한다면.
그녀는 이 폭탄을 터뜨려, 이 판 전체를, 그리고 그 위의 모든 플레이어들을 함께 지옥으로 끌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왕의 의심은, 이제 졸의 반역을 낳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 속에서, 불안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벼랑 끝에 몰린 짐승의, 차갑고도 결연한 생존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