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두 개의 사냥

by 이호창

++++ 제5장: 두 개의 사냥


1. 카산드라의 첫 번째 외침


온라인 인문학 저널 『이성과의 대화』, 편집장 사무실

그날 오후, 충무로의 낡은 상가 건물 4층은 시간의 흐름이 멈춘 섬과 같았다.

사무실의 공기 속에는, 수만 권의 낡은 책들이 내뿜는 희미한 아교 냄새와, 하룻밤 사이 재떨이 속에서 식어버린 담배꽁초의 매캐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편집장 허진태는 올해로 예순 하고도 둘이었다.

그의 두꺼운 돋보기안경 너머의 눈은, 지난 사십 년간 수백만 개의 활자를 읽어내느라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는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신문사의 사회부장이었지만, 타협을 모르는 그의 꼬장꼬장한 성격은 디지털 시대의 속도전과 광고주의 압박 속에서 결국 그를 변방으로 밀어냈다.

이 작은 온라인 저널은, 그가 지키고 싶은 저널리즘의 마지막 보루이자, 그의 초라한 왕국이었다.

그의 왕국은 파산 직전이었다.


그의 낡은 모니터 화면 위로, 방금 전 도착한 한 편의 기고문이 떠 있었다.


[기고: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이름의 유령에 대하여.]


기고자의 이름은 차지원.

허진태는 그 이름을 기억했다.


몇 달 전,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그녀의 서평은, 조회 수는 미미했지만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스크롤을 내렸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이름은, 만지는 순간 손가락이 데어버릴 것처럼 뜨거운 화두였다.


그는 정론일보의 첫 기사를 읽고 역겨움을 느꼈다.

그것은 진실을 탐사하는 기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중의 분노를 정확히 계산하여 설계된, 너무나 정교해서 오히려 섬뜩한 선동문이었다.

그리고 그 선동의 중심에 선 이수연이라는 젊은 기자의 이름을, 그는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글은 영리했지만, 영혼이 없었다.

그녀의 글에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고민 대신, 세상을 자신의 발아래 두려는 야심만이 번뜩였다.


차지원의 글은 어떨까.

그녀 역시 이 거대한 광기에 편승하려는 또 한 명의 지식인일까.


허진태는 읽기 시작했다.

그녀의 첫 문장은, 이수연의 가장 화려한 무기를 정면으로 겨누는 단검과도 같았다.


<언론은 ‘계층 이동성의 체계적 동결’이라는 말을 쓴다. 이 지적인 표현의 껍질을 벗기면, 그 안에는 ‘가진 자들이 사다리를 걷어차, 이제 이 땅에서 가난한 자는 영원히 가난하게 살라는 뜻이다’라는, 단순하고도 폭력적인 메시지가 숨어있다…>


허진태는 저도 모르게 짧게 신음했다.

'이거다.

이것이 진짜 지성이다.'


현상을 현학적인 언어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포장지를 찢어발겨 그 안에 숨겨진 날것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


그는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차지원은 음모론이라는 ‘편리한 악당’ 뒤에 숨어버린 지적 나태함을 비판했고,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유령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행위가 결국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병들게 하는지를 움베르토 에코와 르네 지라르를 인용하며 서늘하게 분석했다.



<공동체는 어떻게 내부의 불안과 갈등을 잠재우는가? 사상가 르네 지라르는 그 답을 ‘희생양’에서 찾았다. 해결할 수 없는 모든 문제의 책임을, 단 하나의 대상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만장일치로 비난하며, 우리는 잠시 하나가 된다. ‘미래 설계자들’은 바로 이 시대가 갈망한 완벽한 희생양이다. 나의 실패와 사회의 부조리는, 이제 저 사악한 ‘그들’의 탓이 된다. 이 얼마나 달콤한 위안인가?

한번 믿기 시작한 거짓말은 어떻게 스스로를 증명하는가?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그것을 ‘편집광적 해석’이라 불렀다. 믿는 자의 세계는, 모든 것이 증거가 되는 거대한 미로가 된다. 정치인의 손짓은 비밀 신호가 되고, 과자 봉지의 그림은 불길한 상징이 된다. 그 믿음을 반박하는 증거는, 오히려 음모를 은폐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뿐이다. 미로 안에서는, 모든 길이 중심으로 통한다. 탈출구는 없다.

희생양은 우리에게 미워할 적을 만들어주고, 미로는 그 믿음을 가두는 감옥을 만든다. 이 두 개의 열쇠가, 지금 대한민국의 영혼을 잠그고 있다. […] >


그녀의 문장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녀의 논리는 단단했다.

이것은 감정적인 호소가 아니었다.

이것은 이성과 논리를 무기로 한, 외로운 싸움이었다.

허진태의 눈이, 글의 후반부에 이르러 크게 뜨였다.


차지원은 이 음모론의 구체적인 허점을,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었다.


<…기사는 이 비밀 결사가 구한말부터 이어져 왔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그들의 자금줄로 지목하는 것은 최근의 몇몇 IT 기업과 바이오주뿐이다.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있다면, 구한말부터 부를 축적한 세력의 진짜 힘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이다. 그것은 휘발성 강한 주식이 아니라, 일제강점기 토지조사사업 당시부터 특정 가문들에 의해 독점되고 상속되어 온, 경기도 외곽의 비공개 토지대장과 임야대장에 숨어있다. 이 명백한 사실을 외면한 채 세워진 음모론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허진태는 돋보기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고민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 글을 실으면, 분명 문제가 될 것이다.

광고주 몇몇은 분명 떨어져 나갈 것이다.

‘진실의 방패’ 같은 극성 유튜버들이 좌표를 찍고 몰려와, 사이트를 마비시키고 자신을 ‘미래 설계자들의 하수인’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글을 싣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이성과의 대화’라는 이 초라한 이름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으로는, 충무로의 낡은 인쇄소 골목이 회색빛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는 저 골목에서, 자신의 청춘을 바쳤다.

잉크 냄새에 취해 밤을 새우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멍청하고도 뜨거운 믿음 하나로 버텼다.

그 믿음의 대가는 결국, 이 4층짜리 건물의 월세 걱정뿐이었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책상으로 돌아와, 다시 안경을 썼다.

그는 차지원의 글 마지막 문단을 다시 한번 읽었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과연 저 유령인가, 아니면 그 유령을 만들어낸 우리 자신의 두려움인가. 이 지적인 유희를 멈추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집단적 광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허진태는 자신의 마우스 커서를, ‘게시’ 버튼 위로 가져갔다.

그의 손가락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인쇄기의 스위치를 올리는 기분으로, 버튼을 클릭했다.

차지원의 외침은, 그렇게 세상의 가장 조용한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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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침은 처음에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 메아리 같았다.

대형 포털 사이트들은, 이미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키워드를 이용한 자극적인 기사들을 경쟁적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 입장에서, 이 광풍에 찬물을 끼얹는 차지원의 글은 클릭 수를 유발하지 못하는, 귀찮은 소음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몇몇 학술 커뮤니티와 소수의 지식인들이 모인 SNS 그룹을 중심으로, 그 글은 조용히 공유되기 시작했다.


서울의 한 명문대 정치학과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차지원의 글을 읽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즉시, 동료 교수들이 모인 단체 채팅방에 그 글의 링크를 올렸다.


[이 어지러운 시절에, 아직 살아있는 지성을 발견했습니다. 다들 일독을 권합니다.]


반면, ‘진실의 방패’ 구독자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에서는, 그 글이 조롱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한 20대 취업 준비생은, 자신의 고시원 책상 앞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그 글을 읽었다.


그는 한나 아렌트나 움베르토 에코가 누군지 몰랐다.

그의 눈에는, 이 글이 자신의 불행을 ‘너의 두려움 탓’이라며 고고하게 꾸짖는, 가진 자의 위선처럼 보였다.


그는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조롱 섞인 댓글을 남겼다.


[경기도 땅? ㅋㅋㅋ 본질 흐리는 거 봐라. 역시 저들은 우리가 똑똑해지는 걸 두려워해.]


차지원의 진실은, 그것을 읽는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누군가는 그 거울 앞에서 자신의 지성을 확인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분노와 열등감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몇몇 대학의 온라인 커뮤니티와 인문학 포럼을 중심으로, 그 글은 조용하지만 뜨거운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글, 진짜 날카롭다.”

“드디어 이 미친 음모론에 대해 제대로 된 반박이 나왔네.”

“차지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내공이 장난 아니야.”


지적인 토론을 갈망하던 소수의 사람들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그녀의 글을 공유했다. 그들은 차지원의 논리를 바탕으로, 이수연 기사의 허점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목소리는 거대한 소음 속에 묻혔다.

빅터의 유튜브 채널 ‘진실의 방패’의 구독자들이 모인 커뮤니티에서는, 차지원의 글이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웬 듣보잡 시간 강사가 또 어려운 말로 물타기 하네.”

“한나 아렌트? 에코? 그런 거 아는 척하면 유식해 보이나? 딱 보니 저 X도 ‘그들’의 하수인이네.”

“경기도 땅? ㅋㅋㅋ 본질 흐리는 거 봐라. 역시 저들은 우리가 똑똑해지는 걸 두려워해.”


차지원의 글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믿음이 ‘진짜’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될 뿐이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지성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더욱 의심스러운 ‘적의 언어’로 치부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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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의 비밀 오피스텔.


이수연은 거대한 코르크보드 앞에 서서, 핀으로 고정된 수십 장의 자료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다음 기사에 대한 구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강태준의 정적인 ‘원로 그룹’과 ‘미래 설계자들’을 연결할, 다음 단계의 치밀한 서사를 설계하는 중이었다.

그때, 그녀의 모니터 한구석에서 작은 경고창이 깜빡였다.


그녀가 설정해 둔, ‘미래 설계자들’에 대한 부정 여론 감지 시스템이었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근원지는, ‘이성과의 대화’라는 이름의, 존재조차 몰랐던 작은 온라인 저널이었다.

그리고 기고자의 이름은, 차지원.


'카산드라… 기어이 입을 열었군.'


그녀의 입가에 뱀처럼 차가운 미소가 스쳤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설치해 둔 덫에 마침내 사냥감이 걸려들었을 때 느끼는, 그런 종류의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기대감 속에서 차지원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자신의 화려한 완곡어법이, 그녀의 손에 의해 해부용 칼처럼 난도질당하는 과정은 제법 흥미로웠다.

그녀가 지성의 화신인 양 인용하는 철학자들의 이름들은, 오히려 그녀의 순진함을 증명하는 듯해 가소로웠다.


‘아직도 죽은 자들의 언어로, 살아있는 권력과 싸울 수 있다고 믿는구나.’


이수연은 그녀를 동정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그 순진함을 어떻게 이용할지를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경기도 토지대장’이라는 부분에서 멈췄다.

이수연은 그 문장을, 천천히,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것이, 상대의 가장 견고한 방패이자,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급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차지원은 이 ‘지식’을 무기로 자신을 공격했다.


그렇다면, 자신은 바로 그 무기를 빼앗아, 그녀의 심장을 꿰뚫어야 했다.

이수연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기사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그것은 악마적인 발상이었다.

동시에, 천재적인 발상이었다.


차지원이 제기한 이 ‘진실’을, 그녀의 ‘거짓’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 만드는 것.


차지원을 ‘음모론을 반박하는 학자’가 아니라, ‘조직의 비밀을 일부 누설하는 내부 고발자’로 만드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차지원을 단순히 무시하거나, 그녀의 남편을 이용해 압박하는 수준을 넘어,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들여 희생양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자신의 코르크보드에 붙어있던, 차지원의 증명사진을 떼어냈다.

그리고 ‘미래 설계자들’의 인물 관계도 가장 중앙에, 강태준의 정적인 ‘원로 그룹’의 사진들 바로 옆에 다시 붙였다.

그녀는 붉은색 마커를 들어, 차지원의 얼굴과 원로 그룹의 사진들 사이에 의심스러운 점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 점선 위에, 이렇게 썼다.


[내부 균열, 혹은 꼬리 자르기?]


그녀는 이 새로운 설계를 보며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이제, 사냥의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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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국회 의원회관.


강태준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비서관이 올린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보고서에는 차지원의 기고문과, 그에 대한 온라인 반응이 요약되어 있었다.

그는 ‘경기도 토지대장’이라는 부분에 잠시 시선을 멈췄지만, 그 의미를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그에게 이것은, 자신의 거대한 계획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할, 사소한 소음일 뿐이었다.


“이런 건 무시해.”


그가 비서관에게 말했다.


“오히려 우리가 반응하면, 저 여자 몸값만 올려주는 꼴이야. 대중은 저런 어려운 글, 쳐다보지도 않아.”


그는 보고서를 책상 한쪽으로 밀어버렸다.

그의 관심은 오직, 이수연의 다음 기사가 자신의 정적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것인가에만 쏠려 있었다.


그는 아직 몰랐다.


자신이 방금 무시해버린 그 작은 불씨가, 훗날 자신의 성채 전체를 태워버릴 거대한 화재의 시작이 되리라는 것을.

카산드라의 첫 번째 외침은, 그렇게 왕의 귀에는 닿지 않은 채, 사냥꾼의 귀에만 섬뜩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2. 사냥감의 약점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을지로의 낡은 건물들 틈새로, 밤의 푸른빛과 아침의 회색빛이 힘겹게 뒤섞이는 시간.

이수연의 오피스텔 안은, 그러나 여전히 깊은 밤이었다.

그녀는 차지원의 기고문 ‘카산드라의 첫 번째 외침’을 읽은 뒤, 단 한 순간도 잠을 자지 않았다.

분노나 불안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뇌는, 마침내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아낸 탐정처럼, 차갑고 명료한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차지원의 반격은, 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거대한 연극을 다음 막으로 넘길, 가장 완벽한 무대 장치였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서, 그녀는 차지원의 가장 소중한 것을 제물로 바칠 생각이었다.


‘핑-’


그녀의 노트북에서, 짧고 건조한 이메일 도착 알림음이 울렸다.

그녀가 한 시간 전에 의뢰했던 결과물이었다.

그녀는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마우스 휠을 돌렸다.

메일의 제목은 없었다.

오직 첨부 파일 하나만이, 클립 모양의 아이콘으로 조용히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파일을 클릭했다.

화면 위로, 한 남자의 인생이 먼지 한 톨 없는 디지털 데이터로 펼쳐졌다.


[인물 보고서: 김민준]


이수연의 눈이, 사냥감의 제원을 훑는 포식자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텍스트 위를 미끄러져 내려갔다.


[기본 인적 사항]

이름: 김민준

나이: 42세

학력: 지방 사립대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가족 관계: 배우자 차지원 (40세, 대학 시간 강사), 자녀 없음


이수연의 입가에 옅은 조소가 스쳤다.

학력.

언제나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대한민국이라는 정글에서, 서열을 결정하는 가장 원초적인 표식.

아내 차지원은 수도권 명문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남편 김민준은, 이름 없는 지방 사립대 출신이었다.

이수연은 이 한 줄의 정보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에 드리워진 보이지 않는 그림자의 형태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직업 및 경력]

직업: 전업 화가

주요 경력:

▪ 2015년, ‘신진 작가 5인’ 단체전 (서울, 인사동 H갤러리)

▪ 2018년, ‘도시의 풍경’ 2인전 (경기도, P시립미술관)

▪ 2022년, ‘이면의 초상’ 개인전 (서울, 서초동 G스페이스)

▪ 현재, ‘존재의 잔해들’ 단체전 준비 중 (서울, 청담동 V갤러리)


보고서는 그가 참여했던 모든 전시회의 규모와 언론 보도 횟수, 그리고 작품 판매 실적까지 첨부하고 있었다.

결론은 간명했다.

실패.


그의 개인전은, 대관료만 내면 누구나 열 수 있는 소규모 기획 갤러리에서 열렸다.

언론의 주목은 전무했고, 판매된 작품은 단 두 점.

그나마 한 점은 아내의 지인이, 다른 한 점은 장모가 사준 것이었다.

이수연은 그의 작품 사진 몇 점을 클릭했다.

어둡고, 무거웠다.

해체된 인물의 초상과, 폐허가 된 도시의 풍경.

기술적으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없었다.

대신, 세상에게 인정받지 못한 자의 분노와 우울함이, 캔버스 뒤편에서 축축한 곰팡이처럼 피어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을 그리고 있구나. 그리고 아무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 않는 거고.’


[재정 상태]

최근 3년간 미술 작품 판매 수입: 500만 원 미만

현재 보유 자산: 없음 (배우자 명의의 경기도 소형 아파트에 거주)

주요 수입원: 배우자 차지원의 강의료 및 연구 프로젝트 인건비


이수연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이것이 결정타였다.

그는 예술가라는 허울 좋은 이름 뒤에 숨어, 아내에게 경제적으로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다.

그것도,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벌며 힘겹게 버티는 아내에게.

남자의 자존심에, 이보다 더 깊은 상처는 없었다.

그의 내면에는 분명,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그것을 몇 배는 능가하는 부채감과 열등감이 뒤섞여 들끓고 있을 터였다.


[온라인 활동]

SNS 계정: 비공개 상태. 친구 외 접근 불가.

과거 활동: 7~8년 전, 몇몇 미술 커뮤니티에서 ‘M의 시선’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기록 다수.


보고서는 그가 과거에 썼던 글들을 아카이빙하여 첨부했다.

이수연은 그의 글을 읽으며, 그의 영혼을 부검하는 법의학자처럼 그의 심리를 분석했다.


김민준의 글은 두 종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난해하고 현학적인 설명이었다.

다른 하나는, 미술계를 향한 냉소와 분노였다.


<…결국 현대 미술은 자본과 평론가들이 만들어낸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진짜 재능은 저잣거리에 버려진 채 썩어가고, 가짜들만이 갤러리의 조명 아래서 비싼 값에 팔려나간다…>


이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형적인, 실패한 예술가의 자기 합리화.

세상이 나를 몰라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썩었기 때문이라는.

그리고 그녀는, 그 안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을 발견했다.


<…아내는 내게 말한다. 위대한 예술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질문하는 것이라고. 그녀의 말은 언제나 옳다. 그녀는 언제나 모든 것을 안다. 하지만 때로는, 그 정답들이 나를 숨 막히게 할 때가 있다…>


찾았다.

이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읊조렸다.

이것이 바로, 이 남자의 가장 깊은 곳에 박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독침이었다.

아내를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완벽한 지성에 의해 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깨어진 자부심.


이수연은 보고서 파일을 닫았다.

더 이상의 정보는 불필요했다.

사냥감의 약점은 완벽하게 파악되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오피스텔의 작은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으로는, 이제 막 출근 전쟁을 시작하는 도시의 아침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제 막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사냥 계획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마치 체스 마스터가, 수십 수 앞을 내다보며 판을 짜는 것처럼.


[작전명: 피그말리온의 유혹]


그녀는 작전의 이름을 붙였다.

피그말리온.

자신이 만든 조각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마침내 그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자신의 아내로 삼았던 그리스 신화 속 왕.


김민준은 인정받지 못한 피그말리온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의 작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여신, 아프로디테가 되어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육체적인 유혹을 넘어선, 영혼의 유혹이 되어야 했다.


[1단계: 우연을 가장한 첫 만남]


보고서에 따르면, 김민준은 다음 주부터 청담동의 작은 갤러리에서 열리는 단체전에 참여한다.

이보다 더 완벽한 무대는 없었다.

그녀는 그곳에, ‘정론일보 이수연 기자’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나타나야 했다.


[2단계: 페르소나 설정]


이수연은 자신의 옷장과 경력을 머릿속으로 훑었다.

그녀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 갤러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이름은 ‘클로이’.

교포 출신이며, 한국의 숨겨진 작가를 발굴하여 유럽 시장에 소개하는 일을 한다.

이 설정은, 김민준의 가장 깊은 욕망, 즉 ‘세상에게 인정받고 싶은 예술가’라는 욕망을 정면으로 자극할 것이다.


[3단계: 공략 계획]


그녀는 전시회 오프닝 날, 가장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가장 값비싼 옷을 입고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작품은 지나친 채, 오직 김민준의 그림 앞에서만 오랫동안 머무를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는다.

그가 자신을 먼저 발견하고,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을 걸어왔을 때, 그녀는 그의 작품에 대해, 그가 평생 동안 누구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했을 찬사를 보내줄 것이다.

그녀는 그의 그림 속에 숨겨진 분노와 우울함을,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는 고독한 천재의 저항’이라는 언어로 포장해 줄 것이다.

그녀는 차지원이 해주지 못했을, 아니, 어쩌면 해주지 않았을, 무조건적인 공감과 찬사를 그에게 쏟아부을 것이다.


이수연은 마지막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모든 계획은 완벽했다.

그녀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어, 평소 관리하던 개인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이수연인데.”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사무적이었다.


“다음 주 금요일 저녁, 청담동 V갤러리에서 하는 ‘존재의 잔해들’ 전시회 오프닝 파티에, ‘클로이’라는 이름의 갤러리스트 자격으로 참석자 명단에 내 이름 좀 넣어줘. 해외에서 방금 입국한, 베일에 싸인 큰손처럼 보이게. 그리고 그 전시회에 참여하는 작가 중에, 김민준이라는 사람. 그의 과거 이력과 작품 세계에 대한 브리핑 자료, 한 시간 내로 내 메일로 보내.”


전화를 끊은 그녀는, 다시 컴퓨터 앞으로 돌아왔다.

모니터 한쪽에는, 어색하게 웃고 있는 차지원의 증명사진이 떠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찬 김민준의 얼굴이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오직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카산드라. 너는 너의 지성이, 너를 지켜줄 가장 강력한 성벽이라고 믿었겠지.”


그녀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셔터처럼 내려앉았다.


“하지만 모든 견고한 성벽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 안에서부터 무너지는 법이야.”


그녀는 차지원의 사진을, ‘타겟’이라는 폴더에서, ‘처리 예정’이라는 하위 폴더로 옮겼다.

사냥감에 대한 분석과, 사냥 계획 수립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우아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것뿐이었다.


3. 갤러리 구석의 두 사람 (이수연과 김민준의 첫 만남)


그날 저녁, 청담동의 밤은 차갑고 반짝였다.

가로수마다 설치된 조명은, 마치 계절을 잊은 금속성의 잎사귀처럼 인공적인 빛을 흩뿌렸다.

거리에는 값비싼 외제 차들이 소리 없이 미끄러져 들어왔고, 쇼윈도 안의 마네킹들은 인간보다 더 완벽한 미소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부와 욕망, 그리고 잘 연출된 허영으로 가득한 이 거리의 한복판에, V갤러리가 있었다.

오늘 저녁, 그곳에서는 {존재의 잔해들}이라는 제목의 신진 작가 단체전 오프닝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갤러리 내부는 흰색 벽과 레일 조명, 그리고 낮은 볼륨의 미니멀한 전자음악으로 채워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값싼 스파클링 와인의 시큼한 향과, 사람들의 옅은 향수, 그리고 새로운 페인트 냄새가 어색하게 뒤섞여 있었다.

초대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참여 작가들의 친구이거나, 미술계의 변방을 맴도는 무명 평론가들이었다.

그들은 한 손에 와인 잔을 든 채, 작품 앞에서는 짧게, 그리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데에는 길게 시간을 할애했다.

이것은 예술을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이것은 사교를 위한, 그들만의 작은 무대였다.


김민준은 그 무대의 가장 외진 구석에 서 있었다.

그는 오늘 밤의 주인공 중 한 명이었지만, 누구보다 이방인처럼 보였다.

그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몇 시간 동안 공들여 고른 검은색 재킷의 옷깃을 연신 만지작거렸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그림과, 그 그림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를 불안하게 오갔다.

그의 작품은,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어둡고 무거웠다.


『콘크리트 둥지의 자화상』이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캔버스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한 남자의 일그러진 얼굴이, 회색과 검은색의 두꺼운 유화 물감으로 격렬하게 덧칠해져 있었다.

마치 굳어버린 시멘트 벽 안에서, 누군가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다 그대로 화석이 되어버린 듯한, 고통스러운 형상이었다.

사람들은 그 그림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이내 불편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옆에 걸린 화사한 색감의 풍경화로 시선을 옮겼다.


그 무관심의 순간들이, 수십 개의 작은 바늘이 되어 김민준의 자존심을 찔렀다.

그는 벽에 기댄 채, 씁쓸한 와인을 홀짝였다.

그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하게 이해받고 싶은 욕망이 뒤엉켜 있었다.


그때였다.

갤러리의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소란스럽던 갤러리 내부의 공기가 미세하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파티의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다른 종(種)의 동물 같았다.

그녀는 몸의 곡선을 따라 흐르는, 짙은 남색의 실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 위에는 어떠한 장신구도 없었지만, 그 옷 자체가 하나의 보석처럼 은은한 빛을 발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차가운 무표정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입구에서 와인 잔을 받아 들었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마치 박물관의 유물을 감정하는 학자처럼, 빠르고 정확하게 벽에 걸린 그림들을 훑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에는 예의상의 관심 따위는 없었다.

오직 가치를 판단하는 자의, 냉정한 평가만이 존재했다.

김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작은 연못에 날아든, 우아하고도 위험한 흑표범 같았다.


여자는 갤러리를 한 바퀴 돌았다.

그녀는 화사한 풍경화 앞에서는 1초도 머무르지 않았고, 도발적인 설치 미술 앞에서는 희미하게 조소를 짓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걸음이 갤러리의 가장 구석, 김민준의 그림 앞에서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아무 말 없이, 그의 그림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1분.

5분.

10분.


시간이 흐를수록, 김민준의 심장은 참을 수 없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의 그림을 저토록 오랫동안, 저토록 진지하게 바라봐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내인 차지원을 제외하고는.

아니, 지원조차도 저런 눈으로 자신의 그림을 보지는 않았다.

지원의 눈빛에는 언제나, 분석과 해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저 여자의 눈빛은 달랐다.

그것은 마치, 그림 속에서 울부짖는 자신의 영혼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듯한, 깊고 고요한 눈빛이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 역시, 이 기묘한 풍경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수군거림이 김민준의 귀에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 여자 누구지?”

“몰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외국에서 왔나?”

“김민준 작가 그림에 꽂혔나 본데? 뭘 아는 사람인가?”


김민준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지금 말을 걸어야 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는 거의 텅 빈 와인 잔을 옆의 테이블에 내려놓고, 뻣뻣하게 굳은 다리를 떼어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제… 그림에, 관심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가 간신히 뱉어낸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여자는 그가 옆에 선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는 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짙은 와인색 립스틱이 발린 그녀의 입술이, 조각상처럼 고요했다.

그녀는 김민준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의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건 그림이 아니군요.”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잘 조율된 첼로의 저음처럼 낮고 부드러웠다.


“이건… 고백이네요.”


김민준은 숨을 멈췄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림을 보며 말했다.


“캔버스를 찢을 듯이 쌓아 올린 저 임파스토 기법.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아요.

견고한 질서, 저 콘크리트 같은 세상의 법칙에 갇혀, 질식하기 직전인 영혼의 비명.

사람들은 이 그림이 어둡고 불편하다고 하겠죠.

하지만 저는 여기서,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거짓말들에 맞서려는, 처절한 정직함을 봅니다.”


김민준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 여자.

이 여자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 그림에 무엇을 담으려 했는지를, 아니,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완벽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침내, 김민준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연민도, 동정도 아니었다.

그것은, 같은 종류의 비밀을 공유한 자만이 보낼 수 있는, 깊은 이해의 눈빛이었다.


“김민준 작가님, 맞으시죠?”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그는 마치 처음으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은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네. 맞습니다.”


“제 이름은 클로이입니다.”


이수연은 ‘클로이’라는 이름으로, 가면 뒤에서 그의 영혼을 관찰했다.

그의 눈이, 사막에서 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것을.

그녀는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시간임을 알았다.


“작가님은… 굉장히 외로운 분이시겠군요.”


그녀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단언이었다.


“세상의 추악함을 너무 정직하게 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외로운 법이죠.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니까요.

아마 주변 사람들은 작가님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저 어둡고, 비관적이라고 말하겠죠.

그들은 모르는 겁니다.

이 어둠이야말로, 이 시대의 가장 정직한 자화상이라는 것을.”


이수연은, 그가 평생 동안 아내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듣고 싶었을 말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읊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차지원이 주지 못했을 위로를, 완벽하게 연기하고 있었다.

김민준은 완전히 무장 해제되었다.

그의 눈시울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그는 이 낯선 여자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다는 참을 수 없는 충동에 휩싸였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십니까?”


“저도 같은 종류의 사람이니까요.”


이수연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작은 클러치 백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두껍고 질 좋은 종이 위에는, ‘Chloe Kim’이라는 이름과, 이메일 주소, 그리고 해외 번호 하나만이 간결하게 적혀 있었다.


“저는 유럽에서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어요.

이번에 한국에 들어온 건, 아직 세상이 발견하지 못한 진짜 작가를 찾기 위해서고요.”


그녀는 그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이 보고 싶군요.

혹시 작업실에 방문해도 괜찮을까요?

이 그림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고요.”


김민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떨리는 손으로 그 명함을 받아 들었다.

그것은 종잇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원이었다.

자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을 이 지긋지긋한 무명의 세계에서 꺼내 줄, 황금 동아줄이었다.


“물론입니다. 물론이죠.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이수연은 자신의 임무가 완벽하게 끝났음을 알았다.

그녀는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몸을 돌렸다.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그림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파티의 그 누구에게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자신이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조용하고 우아하게 갤러리를 빠져나갔다.

김민준은 그녀가 사라진 문 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변의 소음이 다시,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의 손안에는, 아직 그녀의 체온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듯한 명함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명함을, 마치 성스러운 부적처럼,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 가장 깊숙한 곳에 넣었다.

그의 얼굴에는, 지난 몇 년간 단 한 번도 떠오른 적 없었던, 순수한 희망과 흥분이 가득했다.


그는 깨닫지 못했다.

자신이 방금 주머니에 넣은 것이 희망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을, 아내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파멸시킬 가장 달콤한 독이었다는 사실을.


사냥꾼은, 덫을 놓고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사냥감은, 그것이 덫인 줄도 모른 채, 제 발로 그 안으로 걸어 들어온 참이었다.


4. 각본에 없는 배우들 (이수연의 기사에, 예상치 못한 실제 인물들이 반응하기 시작)



이수연의 시간은 완벽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을지로의 오피스텔이라는 이름의 관제탑 안에서, 자신이 쏘아 올린 인공위성 ‘미래 설계자들’이 대한민국이라는 행성 위를 어떻게 선회하고 있는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녀의 계산 안에 있었다.


빅터라는 이름의 저급한 증폭기는, 그녀가 던져준 고품질의 재료를 가지고 대중의 입맛에 맞는 조미료를 듬뿍 쳐서 성공적으로 유통시키고 있었다.

진보 진영은 이 모든 것을 ‘보수 전체의 자멸’이라며 환호했고, 강태준의 정적인 ‘원로 그룹’은 당황하여 허둥대며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설계도 위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어젯밤, 청담동 V갤러리에서의 성공적인 사냥을 복기했다.

김민준이라는 남자는, 그녀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사냥감이었다.

그의 영혼은, 인정이라는 이름의 작은 불빛에 너무나 오랫동안 굶주려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덫을 향해, 기쁨에 겨워 달려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코르크보드에 붙여둔 김민준의 사진 옆에, 초록색 압정을 박았다.

‘접근 완료’.


그녀는 이제 차지원의 성벽을 무너뜨릴 가장 확실한 내부의 배신자를 손에 넣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녀는 오만한 신처럼,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질서를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다음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차지원을 ‘내부 고발자’로 만들, 결정적인 한 방.

그녀의 컴퓨터 화면에는, 차지원의 기고문에서 발췌한 ‘경기도 토지대장’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이수연은 이 문구를 어떻게 요리할지 생각하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차지원이 자신의 지성을 증명하기 위해 던졌던 이 회심의 창을, 이제 그녀의 심장을 향해 되돌려 줄 차례였다.

이것은 너무나 완벽한, 닫힌 세계의 게임이었다.

자신이 설계하고, 자신이 실행하며, 자신이 승리할.


그때였다.

그녀의 암호화된 메신저가, 짧고 건조한 알림음을 냈다.

국회에 출입하는 후배 기자 중, 그녀가 개인적으로 관리하는 정보원이 보낸 메시지였다.

평소라면 시시한 가십거리나, 경쟁사의 동향 보고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메시지는 달랐다.


[선배님. 혹시 명인그룹 송진우 회장님 쪽, 취재하신 거 있습니까?]


이수연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송진우.'


그녀의 머릿속 데이터베이스가, 그 이름을 빠르게 검색했다.

올해 나이 여든셋.

대한민국 경제계의 살아있는 신화이자, 가장 존경받는 원로.

30년 전, 경영 일선에서 은퇴한 뒤로는 단 한 번도 언론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는, 베일 속의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와는 철저하게 거리를 두는 것으로 유명했다.

강태준의 ‘원로 그룹’과는 격이 다른, 진짜 ‘어른’으로 통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분은 왜?]


이수연이 답장을 보냈다.

심장이 이유 없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불길한 예감이었다.

자신의 완벽한 각본에, 단 한 줄도 등장한 적 없는 이름이었다.


[방금 전, 송 회장님 측에서 이례적으로 전체 언론사에 공식 입장문을 배포했습니다. ‘최근 언론에서 논의되는 과거 자산 형성 과정에 대한 추측성 보도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는 내용입니다.]


이수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그녀는 즉시 언론사 내부망에 접속했다.

그리고 거기서, 방금 막 도착한 송진우 회장의 입장문 전문을 확인했다.

그것은 짧지만, 강철처럼 단단하고 서늘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최근 일부 언론에서 제기된, 과거 자산 통합 과정에 대한 무분별한 의혹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역사의 무덤을 파헤쳐, 현재의 안정을 흔드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 진정한 경제 애국은, 과거에 대한 선동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묵묵한 헌신에 있음을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입장문 어디에도, ‘미래 설계자들’이나 이수연, 혹은 정론일보의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이수연은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명백히 자신을 향한 경고였다.

아니, 자신을 넘어, 자신이 시작한 이 거대한 판 전체를 향한, 신의 경고와도 같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왜?

도대체 왜 송진우가?

그는 자신이 공격하는 ‘원로 그룹’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는 이 정치 게임의 플레이어가 아니었다.

그녀는 미친 듯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유료 데이터베이스와 정보원의 연락망을 총동원하여, ‘송진우’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과거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수십 년 전의 낡은 신문 기사들, 빛바랜 재계 인물 관계도,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기업들의 지분 구조 보고서.

그녀의 눈은, 흩어진 정보의 파편들 속에서 어떤 연결 고리를 찾기 위해 맹렬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그것을 찾아냈다.

1970년대 후반, 정부 주도의 대규모 국토 개발 사업.

그 사업을 위해 구성된 몇몇 금융 컨소시엄의 이름들.

그리고 그 컨소시엄의 가장 젊은 이사였던, 송진우의 이름.

그녀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컨소시엄에 참여했던 다른 가문들의 이름은, 지금 그녀가 공격하고 있는 강태준의 정적, 바로 그 ‘원로 그룹’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의 이름과 정확히 일치했다.

그리고 그들이 공동으로 매입하고 개발했던 사업 부지는…


경기도 외곽.


차지원이 자신의 기고문에서, 바로 그 ‘우연의 총알’처럼 언급했던 바로 그 땅이었다.


이수연의 손이 차갑게 식었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차지원의 그 순진한 학문적 추론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무언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 자신이…'


이수연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는 끔찍한 가설을 애써 지워버렸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이 만든 이 괴물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공포를 느꼈다.

자신이 허구라고 믿었던 이야기가, 현실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진짜 괴물의 심장을 건드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각본을 쓴 연극 무대 위로, 초대받지 않은 진짜 주인공이 등장해 버린 것이다.


---


같은 시각, 강태준의 펜트하우스.

그는 방금 전 들어온 비서관의 보고에,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송진우 회장의 입장문이 들려 있었다.

그의 내면은 그러나, 갓 분출을 시작한 화산처럼 들끓고 있었다.


'송진우.'


강태준은 그 이름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그는 ‘역사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그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강태준 자신과, 송진우, 그리고 몇몇 가문만이 아는, 절대로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될 그들의 진짜 ‘원죄’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신들의 부와 권력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판도라의 상자.

그의 정치적 공작이, 의도치 않게 그 상자의 뚜껑을 건드려 버린 것이다.

강태준의 분노는, 송진우가 아니라 이수연을 향했다.

그는 그녀가 완벽하게 통제된, 안전한 거짓말을 만들어낼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그녀는, 감히 진짜를 건드렸다.


'어떻게?'


'혹시 그녀가 정말로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자신을 파트너로 삼는 척하며, 처음부터 자신과 원로 그룹, 그리고 그 뒤의 카르텔 전체를 한꺼번에 무너뜨리려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그 작자 미상의 소설을 썼다는, 차지원이라는 여자는 대체 누구인가?'


'단순한 시간 강사가, 어떻게 이 비밀을 알 수 있단 말인가?'


강태준의 머릿속에서, 처음으로 이수연에 대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장 신뢰했던 예리한 창이, 어쩌면 자신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차갑고 끈적한 의심.

그는 송진우의 입장문을 구겨, 테이블 위 크리스털 재떨이에 던져 넣었다.

그는 이수연과의 비상 연락망으로, 단 한 줄의 메시지를 보냈다.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왕은, 자신의 가장 총애하던 장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연극은, 이제 창조주들의 손을 떠나, 스스로의 생명력을 갖고 폭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각본에 없는 배우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자신들의 대사를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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