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그림자 연극』

by 이호창

++++ 제3장: 『그림자 연극』


1. 을지로의 비밀 오피스텔


윤석호의 자살 현장을 뒤로 하고 이수연은 다시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는 강북의 오래된 도심으로 향했다.

창밖의 풍경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유리 빌딩들은 어느새 낡고 낮은 건물들로 변해 있었다.

세련된 레스토랑의 불빛 대신, ‘○○문화사’, ‘△△기획’ 같은 빛바랜 간판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을지로였다.


택시가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이수연은 창문을 조금 열었다.

훅, 하고 낯선 냄새가 끼쳐 들어왔다.

그것은 금속과 기름 냄새가 아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가 묵은 냄새, 그리고 코를 톡 쏘는 매캐한 잉크와 유기용제 냄새였다.


밤을 잊은 인쇄소 안에서, 거대한 기계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며 내는 낮은 진동과 소음이, 마치 도시의 심장 박동처럼 골목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이곳은 대한민국 모든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었다.


모든 종류의 진실과 거짓, 지식과 선동이 바로 이곳의 롤러와 잉크를 거쳐 종이 위에서 생명을 얻었다.


택시는 허름한 오피스텔 건물 앞에서 멈췄다.

1층에는 ‘24시간 급한 인쇄 환영’이라는 촌스러운 스티커가 붙은 작은 인쇄소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이수연은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로비의 낡은 소파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고, 천장의 형광등은 수명이 다했는지 지겹다는 듯 깜빡거렸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비상계단을 걸어 7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만이, 텅 빈 계단참을 어지럽게 울렸다.


708호.

그녀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겹겹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의 진짜 왕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었다.

이야기를 만들고, 진실을 조립하고, 때로는 거짓을 발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녀만의 비밀스러운 대장간이었다.


방은 어수선했지만, 그 속에는 그녀만의 질서가 있었다.

한쪽 벽면은 거대한 코르크보드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반대편 벽에는 참고 서적과 자료들이 꽂힌 책장이 있었다.

방 중앙에는 여러 개의 모니터가 달린 컴퓨터 책상이 섬처럼 놓여 있었다.


그녀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컴퓨터의 전원을 켰다.

‘우웅-’ 하는 낮은 소음과 함께, 모니터들이 차례로 푸른빛을 뿜어내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 전기 포트에 물을 올렸다.

하지만 믹스커피 봉지를 뜯으려던 그녀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

그 순간, 밤새 그녀를 지탱해주었던 아드레날린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뼈마디가 쑤시는 듯한 극심한 피로감이 채웠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고, 어깨에는 보이지 않는 짐이 잔뜩 올려진 듯 뻐근했다.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모니터에 뛰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를 알았다.

지금 이 상태로는,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 수 없다.

좋은 사냥꾼은, 사냥에 나서기 전에 반드시 무기를 점검하고 체력을 비축하는 법이다.


그녀는 끓는 물로 커피 대신, 컵라면 하나에 물을 부었다.

그리고 방 구석에 놓인, 낡은 간이침대로 향했다.


그녀는 스마트폰 알람을 정확히 ‘90분 후’로 맞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녀는 속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얇은 담요를 목까지 끌어 덮었다.

창문 틈으로, 인쇄소 기계들이 돌아가는 희미하고 일정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그 기계적인 리듬이, 그녀에게는 기묘한 자장가처럼 들렸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10초도 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따륵. 따륵, 따륵, 따륵!’


스마트폰의 갑갑스러운 알람 소리가, 방 안의 모든 정적을 찢어발겼다.


이수연은 소리가 울리자마자, 마치 군인처럼 즉시 눈을 떴다.

잠에서 덜 깬 몽롱함 따위는 없었다.

90분의 수면은 그녀에게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를 정확히 충전해 주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부팅을 마친 컴퓨터 모니터들이 푸른빛을 내뿜으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까 물을 부어둔,퉁퉁 불어터진 컵라면을 무심하게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뜨거운 믹스커피 한 잔과, 재떨이, 그리고 담배 한 갑을 옆에 둔 채.


그녀의 눈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얼마 전, 바로 이 자리에서 겪었던 전율을 다시 떠올렸다.


그날도 오늘처럼, 깊은 새벽이었다.

강태준과의 밀회 이후, 완벽한 '서사'에 대한 갈증으로 그녀는 인터넷의 가장 깊은 곳을 헤매고 있었다.


그녀는 일반적인 검색 엔진으로는 찾을 수 없는, 인터넷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으로 향했다.

오래전에 폐쇄된 학술 포럼, 아마추어 작가들이 모이는 낡은 온라인 커뮤니티, 그리고 각종 문학 공모전의 지난 응모작 아카이브.

그녀는 ‘그림자 정부’, ‘비밀 결사’, ‘사회 통제’ 같은 키워드를 입력하며, 수많은 텍스트의 무덤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났다.

두 시간이 지났다.

그녀가 찾은 것은 대부분 조악한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외계인이 등장하거나, 현실성이 떨어지는 과장된 설정들.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하게 쌓여갔다.


수백 개의 텍스트 무덤을 뒤지다 거의 포기하려 할 때쯤, 그녀는 아주 오래된 장르문학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한 편의 글을 발견했다.


[소설 습작]이라는 말머리.

제목은, 『그림자 연극』.

작성자의 필명은, ‘카산드라’.


큰 기대 없이 파일을 클릭했던 그녀는, 그 안의 시놉시스를 읽고 숨을 멈췄다.


그 텍스트 안에는,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모든 것이 있었다.


구한말부터 이어져 온, 학자와 금융가로 이루어진 비밀 결사.

그들의 이름은 ‘미래 설계자들’.

그들의 상징은 컴퍼스와 눈동자.

그들은 부동산과 금융을 이용해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끊고, 언론과 문화를 통해 대중의 무의식을 조종한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대한민국을 완벽하게 통제되는 사회로 재설계하는 것.


이것은 소설이 아니었다.

이것은 예언서이자, 완벽한 범죄의 교본이었다.


이수연은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 완벽한 설계도를 손에 넣은 지금, 문제는 단 하나였다.

이 무서울 정도의 통찰력을 가진 원작자, '카산드라'.

그녀는 누구인가.


이수연은 이 게임의 설계자가 자신 하나이기를 원했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는,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카산드라’라는 필명은 너무 흔했다.

검색 결과는 수만 개가 넘었고, 대부분 무의미한 정보들이었다.


그녀는 접근 방식을 바꿨다.

그녀는 상요한 것은 일반적인 검색 엔진이 아니었다.

그녀는 언론사에 허가된 유료 인물 정보 데이터베이스, 과거 기사 검색 시스템, 심지어 어둠의 경로를 통해 알게 된 해커에게까지 메시지를 보냈다.


[7년 전, ‘장르문학 비평’ 사이트에 ‘카산드라’라는 필명으로 가입한 유저. 최초 가입 IP 추적 가능해?]


답장은 한 시간 뒤에 왔다.


[IP 주소: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공용 PC. 추적 불가.]


예상했던 결과였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7년 전 게시물의 원본 파일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파일의 메타데이터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문서 작성 프로그램, 최종 수정 날짜, 작성자 이니셜.

하지만 작성자는 자신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운 상태였다.


아마추어가 아니었다.


이수연의 미간이 좁혀졌다.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빠르게 쌓여갔다.

상대가 신중한 타입이라면, 분명 어딘가에 또 다른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그녀는 ‘카산드라’가 쓴 다른 게시물이 있는지, 그 낡은 커뮤니티 사이트를 샅샅이 뒤졌다.


대부분 문학 비평에 관한 글이 검색 결과 화면을 차지했다.

그녀는 그 글들의 문체를 분석했다.

미르체아 엘리아데, 스피노자, 칼 구스타프 융, 한나 아렌트 등를 즐겨 인용하고, 에소테리즘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간간히 사용했다.

깊은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문장은 항상 정갈하고, 그 안에 담긴 논리는 은근히 날카로웠다.


인문학 분야, 특히 철학이나 역사에 조예가 깊은 인물일 것이다.

범위가 조금 좁혀졌다.


그녀는 다시 시놉시스를 읽었다.

거기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본 작품을 제5회 ○○ 미스터리 문학 신인상에 투고했으나,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셨습니다.’


이수연의 눈이 번뜩였다.


'이거다.'


그녀는 즉시 7년 전 ‘제5회 ○○ 미스터리 신인상’의 최종심 진출작 리스트를 검색했다.

인터넷에는 수상작만 공개되어 있을 뿐, 최종심에 올랐던 모든 후보작 리스트는 찾기 어려웠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어, 평소 안면이 좀 있던 문학 전문 기자에게 전화했다.

몇 분간의 시시껄렁한 안부 인사가 오갔다.

그리고 대화 말미에,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물었다.


“선배, 혹시 7년 전 ○○ 신인상 최종심 자료, 가지고 계세요?

옛날 기사 때문에 참고할 게 좀 있어서요.”


10분 뒤, 그녀의 이메일로 PDF 파일 하나가 도착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파일을 열었다.

최종심 후보작 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마우스 휠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름을 발견했다.


작품명: 『그림자 연극』

본명: 차지원

직업: 대학 시간 강사


이수연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녀는 그 이름을 나직이 읊조렸다.


“차지원….”


그녀의 입가에, 마침내 사냥감을 발견한 포식자의, 차갑고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찾았다.


자신이 만들어낼 거대한 괴물의 영혼을.


그리고 그 영혼을 창조한,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원작자를.


이수연은 차갑게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 막, 진짜 사냥이 시작될 참이었다.

2. 먼지 쌓인 웹 게시판



이수연의 입가에 맺혔던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사냥감의 급소를 찾기 위해 집중하는, 사냥꾼의 차가운 평정이 들어섰다.

그녀는 승리를 예감했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진짜 사냥은 이제부터였다.

그녀는 먼저, 자신이 발견한 ‘카산드라’의 모든 흔적을 자신의 하드 드라이브 깊숙한 곳으로 백업했다.

웹페이지 전체를 아카이빙하고, 원고 파일을 복사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먼지 쌓인 인터넷의 유적지를 완벽하게 보존하는 작업이었다.


그녀의 진짜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이 완벽한 설계도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녀의 과거, 현재, 성격, 약점까지.


모든 성벽에는 반드시 약한 지점이 있기 마련이고, 공격은 그곳을 향해야 했다.


그녀는 다시, 7년 전에 시간이 멈춘 그 낡은 장르문학 커뮤니티로 돌아갔다.

그곳은 이수연에게, 이제 막 발굴된 고대의 무덤과도 같았다.

그리고 ‘카산드라’라는 필명으로 남겨진 스무 개 남짓의 게시물들은, 그 무덤의 주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부장품들이었다.


이수연은 고고학자처럼, ‘카산드라’가 남긴 모든 텍스트를 한 줄 한 줄 해부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쓴 비평 글들은 날카롭고 지적이었다.

그녀는 플롯의 개연성, 인물의 심리 묘사, 그리고 서사가 담고 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수연은 그녀의 글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름들을 다시 한번 살펴 보았다.


한나 아렌트, 움베르토 에코, 칼 슈미트.


그녀는 이데올로기와 전체주의, 그리고 기호학에 미쳐 있는 사람이었다.


『그림자 연극』은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지성이 집약된, 하나의 완벽한 논문과도 같았다.


이수연은 그녀의 개인적인 흔적을 찾기 위해, 다른 회원들과 나눈 댓글들을 샅샅이 뒤졌다.

대부분은 책에 대한 토론이었지만, 그 안에는 사소한 일상의 파편들이 보석처럼 박혀 있었다.


카산^^^^

죄송합니다. 답변이 늦었네요. 이번 주에 남편의 작은 전시회가 있어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수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남편. 직업은 화가. 그리고 ‘작은’ 전시회. 성공하지는 못한 모양이군.’


그녀는 메모장에 짧게 기록했다.


카산^^^^

요즘은 칼럼 마감에, 이번 학기 강의 준비까지 겹쳐서 통 책을 읽을 시간이 없네요. 주말에 아스날 경기나 보면서 머리 식혀야겠습니다.


‘강의. 직업은 대학 강사. 비정규직일 가능성이 높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다는 뜻이야.’


그리고, 웬 뜬금없이 ‘아스날’.

그녀는 이 예상치 못한 키워드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카산드라, 아스날’이라는 키워드로 게시판 내부를 다시 검색했다.

예상대로, 스포츠 게시판에 그녀가 쓴 긴 글이 하나 있었다.


[제가 아스날을 사랑하는 이유]

카산^^^^

“……많은 분들이 제게 왜 아스날을 좋아하냐고 묻습니다. 저는 그들의 유니폼에서 음과 양의 조화를 봅니다. 열정적인 붉은색과 이성적인 흰색의 완벽한 공존. 장미십자회가 말했던 ‘화학적 결혼’의 현대적 구현 같다고 할까요.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들의 모토에 있습니다. ‘Victoria Concordia Crescit’. 승리는 조화를 통해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한 명의 슈퍼스타가 아니라, 열한 명이 함께 움직여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그들의 철학. 서로를 죽여야 내가 사는 제로섬 게임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저는 그들의 축구를 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를 생각합니다……”


이수연은 그 글을 읽으며 실소를 터뜨렸다.


‘조화? 상생? 아직도 그런 걸 믿는 사람이 있다니.’


그녀는 차지원의 가장 중요한 약점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상주의자였다.

이런 타입이, 현실의 잔혹함 앞에서는 가장 쉽게, 그리고 가장 처참하게 무너지는 법이다.


이제 조각들은 거의 다 모였다.

대학 강사, 무명 화가 남편,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이상주의적 신념.


이수연은 이 정보들을 가지고, 다시 현대의 시간 속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SNS와 학술 정보 사이트를 뒤져, ‘차지원’이라는 이름의 퍼즐을 완성하기 시작했다.


차지원의 페이스북 계정은 친구 공개였지만, 프로필 사진은 전체 공개였다.

어느 학회에서 찍은 듯한,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

그녀의 계정에는 책 서평과 영화 감상문이 전부였다.


그녀의 삶은, 그녀가 쓴 『그림자 연극』이라는 소설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단정해 보였다.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수연은 마지막으로, 대학 연구 정보 사이트에서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다운로드했다.

증명사진 용도로 찍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었다.


이수연은 그 사진을 모니터 한쪽에 띄웠다.

그리고 다른 모니터에는, 차지원의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미래 설계자들’의 상징, 그 불길한 컴퍼스와 눈동자 그림을 띄웠다.


이수연은 두 개의 화면을 번갈아 보았다.

왼쪽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여성 학자의 얼굴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대한민국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는, 무섭도록 정교한 괴물의 설계도가 있었다.


그녀는 나직이 읊조렸다.


“이 얼굴에서, 어떻게 그런 괴물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곧,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그녀의 입가에, 다시 그 차갑고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중요한 건, 이제 그 상상의 괴물을 현실로 소환해서, 내가 직접 생명력을 불어 넣을 거라는 사실이야.”


어쩌면 그녀는 그 순간, 빅터 프랑켄슈타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은 텍스트의 파편들, 대중의 잠재된 공포, 그리고 윤석호의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서로 아무 관련 없는 시체 조각들을 한데 꿰매어, 세상에 없던 괴물을 만들어내려는 의지에 사로잡힌 미친 과학자.


혹은, 프라하의 어느 낡은 다락방에서, 진흙으로 인형을 빚고 그 이마에 진리의 주문을 새겨 넣어 마침내 살아 움직이는 골렘을 만드는, 고독한 연금술사였을지도 모른다.


순진한 작가는 설계도만 그렸을 뿐이지만, 그 설계도에 생명을 불어넣는 마지막 주문을 외우는 것은, 이제 온전히 그녀 이수연의 몫이었다.


그녀가 아는 것은 단 하나였다.


그 상상의 괴물을 현실로 소환하여, 직접 피와 살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이수연은 차갑게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제 막, 진짜 창조가 시작될 참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진짜 창조자를 제거해야 한다.


그녀는 차지원의 프로필 사진을, ‘타겟’이라는 이름의 폴더에 저장했다.


사냥감에 대한 분석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구체적인 사냥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3. 설계도와 제물


강태준의 고요한 침실.


두 사람의 격렬했던 열기는, 이제 막 피워 문 담배 연기 속으로 희미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이제 이수연은 며칠 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강태준의 앞에 서 있었다.

그때는 야망을 확인하는 공모자였다면, 지금 그녀는 완벽한 설계도를 손에 쥔 건축가였다.


윤석호가 허무하게 생을 마친 뒤로 사나흘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동의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계획에 그를 참여시킬지 말지를 결정하러 온 사람처럼 보였다.


강태준 역시 그녀의 달라진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는 말없이, 테이블 위 거대한 미래 도시의 건축 모형 앞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들의 전쟁터가 될 장소였다.


“좋은 건축은,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 법이지.”


강태준이 먼저, 지난번 대화의 끝을 다시 상기시켰다.

그것은 ‘당신의 계획을 들려달라’는, 왕의 요구였다.


이수연은 대답 대신, 자신의 태블릿 PC를 켜서 건축 모형 옆에 놓았다.

물리적인 도시의 설계도 옆에, 정신적인 세계의 설계도가 나란히 놓였다.

화면 속에는, 그녀가 며칠 밤낮으로 분석하고 해체한 소설, 『그림자 연극』의 핵심 구조가 정리되어 있었다.


“이건 그냥 소설이 아니에요. 이건… 시뮬레이션이죠.”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분석적이었다.


“어떤 무명 작가가, 만약 대한민국을 비밀리에 조종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움직일 것인가를 상상해서 쓴 글이에요.

그런데 그 상상력이, 무서울 정도로 현실적이에요.”


그녀는 강태준에게 『그림자 연극』의 내용을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이름은 ‘미래 설계자들’.

상징은 컴퍼스와 눈동자.

주요 타겟은 언론과 금융.

최종 목표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끊어, 완벽한 통제 사회를 만드는 것.


그녀가 설명하는 내용은, 강태준이 현실 정치판에서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보이지 않는 카르텔의 움직임과 기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는 이수연이 정말로 무언가 거대한 것을 발견했다고 믿기 시작했다.


“이걸 쓴 작가는 누군가?”


강태준이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차지원이라는 평범한 대학 시간 강사예요.”


이수연은 미리 준비해 둔 차지원의 프로필 사진을 화면에 띄웠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평범한 여성 학자의 얼굴.


“제가 분석해 본 바로는, 그녀는 고대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와 같은 운명을 타고났어요.”


그녀는 신화적 비유를 꺼내 들었다.


“아폴론에게서 예언의 능력을 받았지만, 그 대가로 아무도 자신의 예언을 믿어주지 않는 저주를 받은 비운의 여자지요.

차지원이 바로 그래요.

그녀는 어쩌면, 우연히 진실의 윤곽을 그려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녀가 ‘이건 내가 쓴 소설이다!’라고 외친들, ‘대학 시간 강사’라는 초라한 직업을 가진 여자의 말을 누가 믿어주겠어요?

사람들은 오히려 그녀를, 거대한 진실을 은폐하려는 ‘미래 설계자들’의 또 다른 하수인으로 몰아붙일걸요.”


그녀는 차지원의 운명을 너무나 쉽게 예단했다.

그녀는 몰랐다.

차지원이 쓴 그 소설이, 단순한 허구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녀의 상상력이, 우연히 이 사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진짜 괴물의 윤곽을 그려내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지금부터 쓸 기사들이, 그 잠자던 괴물을 깨우는 자명종이 되리라는 것을.


“하지만 이 완벽한 설계도에도, 현실에 건물을 올리려면 주춧돌이 필요해요.”


이수연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모든 신화의 시작에 제물이 필요하듯이.”


그녀는 태블릿 화면을 넘겼다.


화면에는 그녀가 윤석호의 서재에서 찍은,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책상’ 사진이 나타났다.


“다행히, 윤석호가 완벽한 제물이 되어줬어요.”


그녀는 강태준을 향해, 연습한 대로 완벽한 거짓말을 했다.


그녀는 박형사와의 거래를 통해, 윤석호가 남긴 진짜 유언장이 이미 자신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이 게임의 모든 패는, 오직 자신만이 쥐고 있어야 했다.


“제가 제 경찰 쪽 소스를 통해 재차 확인했는데, 현장은 깨끗했어요.

유서 한 장 없이. 그가 남긴 건 오직 ‘의문’뿐이죠.

그 텅 빈 공간에, 우리가 첫 번째 돌을 놓으면 돼요.”


이수연의 목소리는 전혀 떨리지 않았다.


“첫 번째 돌이라…?”


강태준이 되물었다.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이름, ‘미래 설계자들’. 그리고 이 상징.”


그녀는 다시 『그림자 연극』의 시놉시스 화면을 띄웠다.


“이걸, 윤석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인 것처럼 우리가 만드는 겁니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강태준은 말이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여론 조작이 아니었다.

국정원 전직 차장의 죽음에 대한, 명백한 증거 조작이자 사법 방해였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일이었다.

그는 이수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대담함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동시에 섬뜩함을 느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의 건축 모형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미래 도시의 모형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완벽한 질서.

그것을 위해서는, 약간의 혼돈과 희생이 필요했다.

그는 모형 위에서 가장 작은 사람 모형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위치로 옮겼다.

마치 체스 말을 움직이듯.


그는 이수연이 제안한 것이, 바로 이 체스 말을 움직이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했다.


'어쩔수 없이 필요한 희생.'


그는 몸을 돌려, 태블릿 화면 속 차지원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이 작가… 카산드라라고 했나?

예언자의 목소리는, 때로는 잠재워야 할 필요도 있지.”


그 말은, 차지원의 제거 계획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였다.

그는 다시 이수연을 보았다.


“기초 공사는… 흠 없이 완벽해야 할 텐데.”


이수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자신의 가방에서 작은 상자 두 개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마치 마술사가 비둘기를 꺼내 보이듯.


“기초 공사에 쓸 자재들입니다.”


그녀가 자신감있게 말했다.


상자 안에는, 윤석호가 평생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모델의 몽블랑 만년필과, 똑같은 브랜드의 크림색 메모지, 그리고 ‘로열 블루’ 색상의 잉크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박형사에게서 거액을 주고 사들인, 윤석호의 진짜 유언장을 통해 이 모든 정보를 미리 파악해 둔 상태였다.


“어떻게…?”


강태준의 눈이 커졌다.


“건축가라면, 자재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죠.

그의 필체까지 연구해 뒀어요.”


이수연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치밀함과 대담함에, 강태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손을 잡은 이 여자는,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괴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괴물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이 순간, 그녀 역시 언젠가는 제거해야 할 변수가 될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4. 키보드 위의 전쟁


택시는 새벽의 푸른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을지로의 좁은 골목에 이수연을 또 한번 더 내려놓았다.

그녀는 강태준의 펜트하우스에서 풍겼던 값비싼 위스키와 권력의 냄새 대신, 다시 축축한 종이와 매캐한 잉크 냄새가 뒤섞인 현실의 공기 속으로 돌아왔다.

밤새도록 멈추지 않았을 인쇄소들의 기계 소리가, 이제는 지친 숨을 고르듯 잦아들고 있었다.

도시는 곧 잠에서 깨어나, 어젯밤 이곳에서 인쇄된 신문과 잡지들을 게걸스럽게 소비할 터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들 손에 들릴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바로 지금부터 탄생할 예정이었다.


708호.

자신의 비밀스러운 대장간으로 돌아온 그녀는, 가장 먼저 옷을 갈아입었다.

강태준을 만나기 위해 입었던, 몸에 붙는 원피스와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

그것은 연극을 위한 의상이었다.


그녀는 낡은 검은색 티셔츠와 편안한 트레이닝 바지로 갈아입었다.

가면을 벗고, 오직 일에만 집중하기 위한 그녀만의 의식이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 드리퍼에 원두를 갈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진하고 검은 커피가 천천히 서버로 떨어졌다.

강태준이 마시던 값비싼 싱글몰트가 아니었다.


잠을 쫓고, 신경을 날카롭게 벼리기 위한, 쓰디쓴 연료였다.


그녀는 방 한구석의 낡은 스피커에서, 미니멀한 전자음악을 낮게 틀었다.

일정한 비트가, 이제부터 시작될 그녀의 지적인 전쟁에 배경음악이 되어주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여러 개의 모니터가 그녀를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중앙의 모니터에, 하얀색의 빈 워드 파일을 띄웠다.

화면 속에서, 검은색 커서가 일정한 속도로 깜빡였다.

마치 이제 막 시작될 연극의 막이 오르기 전, 무대 뒤에서 초조하게 박자를 맞추는 메트로놈 같았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나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다.

오직, 거대한 작품을 막 시작하려는 예술가의, 차갑고도 짜릿한 흥분만이 감돌았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부터 할 일이, 단순한 기사 작성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창조 행위였다.

존재하지 않았던 적을 만들고, 흩어져 있던 분노에 형태를 부여하며, 마침내 새로운 현실을 구축하는 일.


그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로 올라갔다.

가장 먼저, 제목을 입력했다.

수십 개의 자극적인 제목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는 가장 정제되고, 그래서 가장 위험한 제목을 선택했다.


그것은 단정하는 대신, 질문을 던지는 형태여야 했다.

그래야만 훗날 법적인 책임을 피할 수 있는 교묘한 퇴로가 생긴다.


" [단독] 前 국정원 거물 윤석호, 죽음 직전 의문의 메모 남겨… ‘미래 설계자들’은 누구인가?"


제목을 완성한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본문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차지원의 소설 『그림자 연극』의 뼈대를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흡수한 상태였다.

거기에 자신의 장기인, 완곡하고도 지적인 표현들을 살처럼 덧붙였다.


< 한 시대의 그림자였던 거물이 스러졌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 속에서, 본지가 단독으로 입수한 그의 마지막 메모는 대한민국 사회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거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미래 설계자들’.

윤석호 전 차장이 목숨과 맞바꿔 세상에 알리려 했던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것은 단순한 망상인가, 아니면 우리 사회의 ‘계층 이동성이 체계적으로 동결’되고, ‘자산 가치의 인위적 재편’이 일어나는 현실 뒤에 숨겨진 진짜 건축가들의 이름인가… >


그녀는 무시무시한 거미였다.

진실의 조각들(윤석호의 죽음), 그럴듯한 거짓말(차지원의 소설), 그리고 대중의 불안감(경제 위기)을 끈끈한 실로 뽑아내어,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서사의 그물을 짜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산처럼 쌓였고, 커피는 몇 번이나 새로 내려졌다.

창밖의 어둠이 서서히 옅어지며, 을지로의 낡은 건물들 위로 푸른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녀는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었다.

초고가 완성되었다.


그녀는 끝내고 바로 보내지 않았다.

그녀는 장인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작품을 점검하듯, 화면 속의 글자들을 소리 내어 읽어보기 시작했다.

문장의 리듬, 단어의 뉘앙스, 그리고 각 문단이 주는 심리적 효과까지.

그녀는 완벽주의자였다.

자신의 거짓말은, 그 어떤 진실보다도 완벽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작업이 남았다.

가장 중요한, ‘증거’를 만드는 일.


그녀는 책상 서랍에서, 강태준의 펜트하우스에서 가져온 만년필과 메모지, 그리고 잉크를 꺼냈다.

그녀는 박형사에게서 입수한, 윤석호의 진짜 유언장 사본을 옆에 펼쳐두었다.

그녀는 그의 필체를, 그의 서명 방식을, 지난 몇 시간 동안 집요하게 연구하고 연습했다.

그녀는 새로운 메모지를 한 장 꺼내, 그 위에 만년필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이 빙의한 것처럼, 그녀는 윤석호의 필체를 완벽하게 모방해냈다.


미래 설계자들


그리고 그 아래, 『그림자 연극』에 묘사된 그대로, 컴퍼스와 눈동자의 상징을 그려 넣었다.

완벽한 위조품이었다.

그녀는 이 메모지 위에, 아주 작은 물방울 하나를 떨어뜨렸다.

마치 눈물 자국처럼 보이도록.

비극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마지막 연출이었다.

그녀는 이 조작된 메모를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여러 각도에서 촬영했다.

어두운 서재의 조명까지 계산하여, 가장 그럴듯한 사진을 골라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그녀는 완성된 기사 파일에, 조작된 메모 사진을 첨부했다.

받는 사람 입력란에는, 오세훈 부장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보내기’ 버튼 위에서 잠시 멈췄다.

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 세상은 이전과는 다른 곳이 될 터였다.

돌이킬 수 없다.


그녀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클릭.


‘메일이 성공적으로 전송되었습니다.’


모니터에 뜬 건조한 문구가, 그녀의 성공을 알렸다.


그녀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간 듯한 허탈감과, 세상을 자신의 손으로 움직였다는 신과 같은 희열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으로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는 도시의 회색빛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인쇄소의 기계들이 다시, 오늘 하루 동안 세상을 채울 새로운 이야기들을 찍어내기 위해 굉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소리를 들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세상은 아직 몰랐다.


오늘 아침, 자신들이 읽게 될 가장 거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 낡은 오피스텔의 작은 모니터 앞에서 한 여성 기자의 손끝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이야기가, 진짜 괴물을 깨우게 되리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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