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밤의 건축가들

by 이호창

++++ 제2장: 밤의 건축가들


1. 도시를 내려다보는 성채


택시는 서울의 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수연은 창밖을 보았다.

메갈로폴리스의 거리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젊은이들,

하루의 피로를 아직 씻어내지도 못하고 회식에 끌려 온 직장인들,

화려한 쇼윈도 너머에서 웃고 있는 마네킹들.

모두가 각자의 이야기를 살고 있었다.

그들은 몰랐다.

몇 일 전, 이 도시의 엄청 높은 곳에서 그들의 운명을 뒤흔들지도 모르는 이야기 하나가 은밀하게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수연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저들은 그저 관객일 뿐이다.

이제부터 시작될 연극의.


택시는 여의도로 향했다.

국회의사당과 대형 증권사들이 밀집한, 대한민국 권력과 자본의 심장부.


차가 멈춘 곳은, 주변의 다른 빌딩들을 압도하며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더 마크’ 타워 앞이었다.


주거용이었던 트리니티 캐슬과는 달랐다.

이곳은 철저히 비즈니스와 권력을 위해 지어진, 차가운 유리와 강철의 성채였다.


그녀는 택시비를 지불하고 내렸다.

늦은 시간, 거대한 빌딩의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오직 대리석 바닥을 비추는 희미한 조명과, 데스크 안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보안 요원의 실루엣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곳의 공기는 낮 동안의 치열했던 전투가 끝난 뒤의 전쟁터처럼, 고요하고 서늘했다.

그녀는 로비를 가로질러, 일반 방문객들은 알지 못하는 안쪽의 작은 문으로 향했다.


그녀는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삑삑삑-’

소리 없이 문이 열리자, 그 안에는 VIP 전용 엘리베이터 홀이 나타났다.

오직 단 한 대의 엘리베이터만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그녀를 태우고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벽면 전체가 짙은 색의 고급 원목으로 마감되어 있었다.


조명은 부드러웠고, 공기 중에는 은은한 가죽 향이 감돌았다.

그녀는 완벽하게 닦인 원목 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며칠 전, 윤석호의 집에서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취재 현장의 날카로운 사냥꾼이 아니라, 이제 막 왕을 알현하러 가는 비밀스러운 조언자의 얼굴.


그녀는 코트의 옷깃을 매만졌다.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했다.


‘띵.’


엘리베이터는 60층, 펜트하우스 층에 도착했다.

문은 복도로 열리지 않았다.

이 공간 전체가, 단 한 사람을 위해 존재했다.

문이 열리자, 강태준의 서재 겸 응접실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숨이 멎을 듯한 광경이었다.

공간의 삼면이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발아래로는 서울의 야경이, 보석을 흩뿌려 놓은 검은 벨벳처럼 펼쳐져 있었다.

한강의 검은 물줄기와, 다리를 오가는 자동차들의 불빛, 그리고 빌딩 숲의 창문들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빛의 강물.

이곳에서는, 도시가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지배하고, 소유하고, 또 언제든 망가뜨릴 수 있는.


실내 장식은 극도로 절제되어 있었다.

짙은 회색의 거대한 소파, 낮은 높이의 검은색 티 테이블, 그리고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추상화.

검은 캔버스 위를, 누군가 칼로 베어버린 듯한 단 한 줄의 붉은 선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폭력적이고, 동시에 매혹적인 그림이었다.


이 공간에는 개인적인 사진 한 장, 생활의 흔적이 느껴지는 잡동사니 하나 없었다.

이곳은 사는 곳이 아니었다.

세상을 내려다보며, 다음에 둘 수를 계획하는 곳이었다.


이수연의 시선이 티 테이블 위에 놓인 한 물건에 멈췄다.


그것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미래 도시의 건축 모형이었다.

기존의 서울과는 전혀 다른, 유선형의 초고층 빌딩들과 공중을 가로지르는 자기부상열차의 레일.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도시.


강태준이 꿈꾸는, 그가 ‘설계’하고 싶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었다.


이수연은 생각했다.


'그는 이 도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 도시를,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고 싶어 할 뿐이다.'


그때, 그림자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움직였다.

강태준이었다.


그는 창가 가장 가까운 곳에 서서, 등을 보인 채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에는 부드러운 실크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이수연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도, 놀라움도 없었다.

오직, 기다렸다는 듯한 깊고 차가운 눈빛만이 존재했다.

그는 이 성채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성채를 완성시켜 줄 가장 중요한 부품을 손에 쥐고 온 참이었다.


방 안의 공기가, 두 사람의 야망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2.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


강태준은 말이 없었다.


그는 이수연의 이리로 올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돌아보지도 않고 아일랜드 바처럼 꾸민 공간으로 향했다.

바는 짙은 색의 대리석과 차가운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마치 잘 설계된 실험실의 작업대처럼.

그 위에는 먼지 한 톨 없었다.


그는 수납장에서 두껍고 무거운 크리스털 잔 두 개를 꺼냈다.

잔은 그의 손안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권력처럼 묵직해 보였다.


그리고는 냉동고의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음식 대신, 완벽한 구(球) 모양으로 얼린 투명한 얼음들만이 보석처럼 들어 있었다.

그는 은색 집게로 얼음을 하나씩 꺼내, 잔 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툭.’

‘툭.’


얼음이 잔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넓고 텅 빈 공간의 정적을 날카롭게 갈랐다.

그 소리는 모든 것을 시작하거나, 혹은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신호처럼 들렸다.


강태준은 진열장에서 맥캘란 25년산 한 병을 꺼내 들었다.

그는 라벨을 확인하는 대신, 병 안에 담긴 짙은 호박색 액체의 일렁임을 잠시 바라보았다.

마치 그 안에 담긴 시간의 무게를 가늠하는 것 같았다.

그는 두 잔에 정확히 같은 양의 위스키를 따랐다.

황금빛 액체가 얼음 구슬 위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차가운 얼음과 만난 위스키의 향이, 비로소 봉인에서 풀려나듯 공기 중으로 피어올랐다.


그는 잔 하나를 이수연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말없이 잔을 받았다.

그의 손가락 끝이 그녀의 손등을 스쳤다.

아무런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은밀한 연인이었지만, 이 공간에서 그들은 서로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에 더 가까웠다.


두 사람은 창가 앞, 거대한 짙은 회색 소파에 마주 앉았다.

그들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는 검은색 티 테이블만이 놓여 있었다.

마치 협상 테이블 같았다.

강태준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위스키 잔을 천천히 돌리며, 그녀가 이곳까지 온 이유를 스스로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상대방이 먼저 패를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권력을 가진 자의 특권이었다.


이수연은 그의 게임에 기꺼이 응해주었다.

그녀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독한 액체가 목을 타고 흐르며, 사건 현장에서부터 이어진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을 조금 풀어주었다.


그녀는 이내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대리석 위에 올려놓았다.

바 테이블의 차가운 감촉이 스마트폰으로 전해졌다.

그녀는 화면을 한 번 톡, 쳤다.


어두운 테이블 위로, 작은 사각형의 빛이 켜졌다.

그 안에는, 윤석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미래 설계자들’.

그리고 그 아래의 기이한 상징.


강태준의 시선이 화면에 고정되었다.

그의 눈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사냥감이 스스로 덫으로 걸어 들어온 것을 확인한 사냥꾼의 눈처럼, 차갑고 깊어졌다.


그는 잔을 든 채, 미동도 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윤석호… 그 늙은 여우가 이런 걸 남기고 갔나.”


강태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위스키처럼 낮고 진했다.


“유서가 아니에요.

“이건 초대장이죠. 우리를 위한.”


이수연이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강태준은 피식, 하고 짧게 웃었다.


“초대장이라... 너무 거창하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와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가져갔다.


그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확대하며, 글씨의 필체와 상징의 세세한 부분까지 뜯어보았다.

그의 눈빛은 한 국가의 운명을 분석하던 정보 분석가처럼 날카로웠다.


“이걸로 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그가 그녀를 시험하듯 물었다.


이수연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모든 걸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지금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어요.

근데 누구에게 분노해야 할지 몰라요.

정치인, 재벌, 언론… 모두가 적이지만, 동시에 너무 많아서 아무도 진짜 적이 아니죠.

이 흩어진 분노에, 우리는 이름을 붙여줄 거예요.

이 보이지 않던 적에게, 우리는 얼굴을 그려줄 거고요.

IMF, 부동산 폭등, 불공정한 경쟁… 그 모든 개인의 고통을,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단 하나의 사악한 ‘의지’ 탓으로 돌리는 거예요.

사람들은 진실 따위엔 관심 없어요.

자기들의 불행을 설명해 줄 압도적인 이야기를 원할 뿐이에요.”


그녀는 강태준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에서, 혼돈을 잠재우고 악을 심판할 구원자를 갈망하게 될 거예요.

그게 바로… 당신이고요.”


강태준은 말이 없었다.

그는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방 안은 다시 어두워졌다.

그는 손에 든 위스키 잔을 들어,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쨍.'

'또로로륵'


그가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소리.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그의 결정을 알리는 마지막 신호처럼 울렸다.


그는 이수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아주 천천히, 차가운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온기 있는 미소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모든 것을 이용할 준비가 된 자의, 냉정한 미소였다.


“어차피 이야기꾼이 필요한 참이었어.”


그 한마디로, 모든 계약은 끝났다.


이수연은 그의 눈빛에서 다음 신호를 읽었다.

그녀는 들고 있던 위스키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도시의 불빛을 배경으로 길게 하나로 합쳐졌다.

곧바로 그 그림자는 급격하게 짦아졌다.


밤의 건축가들이, 이제 막 자신들의 계획을 위한 치밀한 설계를 시작하고 있었다.

3. 스마트폰 화면 속 초대장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펜트하우스의 침실은, 격렬한 폭풍이 할퀴고 지나간 뒤의 고요한 바다 같았다.

공기 중에는 두 사람의 체취와 비싼 향수, 그리고 희미한 위스키 향이 뒤섞여 몽롱하게 떠다녔다.

강태준은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담배에 불을 붙였다.


‘딸깍.’


그가 사용하는 듀퐁 라이터 특유의 맑은 금속성 파열음이, 나른한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길게 내뿜었다.


그는 곧바로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불을 붙인 뒤, 옆에 누운 이수연에게 건넸다.

그녀는 말없이 담배를 받아 물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직 희미한 담배 연기만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서울의 야경이 보석처럼 펼쳐져 있었다.


조금 전, 격렬하게 서로를 탐하던 순간에는 그저 아름다운 배경에 불과했던 도시의 풍경이, 이제는 다시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거대한 장기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의 몸을 통해, 서로의 야망을 확인했을 뿐이다.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강태준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는 크리스털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의 움직임에는 방금 전까지의 나른함 대신, 다시 냉정한 사업가의 정돈된 태도가 깃들어 있었다.

그들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 다시, 일할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 초대장.”


그가 말했다.

더 이상의 부연 설명은 필요 없었다.


이수연은 피식 웃었다.

그녀 역시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진 실크 시트 하나를 무심하게 몸에 둘렀다.


그녀는 침실을 나와, 거실 바의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스마트폰을 가져왔다.


다시 침대로 돌아온 그녀는, 강태준의 옆에 아무렇지 않게 앉았다.

마치 방금 전까지 회의를 하다가 잠시 쉬었던 사람들처럼.


그녀는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어두운 침실 안에서, 작은 사각형의 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비췄다.


화면 속에는, 윤석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또 다시 선명하게 떠 있었다.

‘미래 설계자들’.

그리고 그 아래의 기이한 상징.


“먼저, 이 이름부터 보시죠. ‘미래 설계자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갑고 분석적인 기자의 목소리였다.


“‘일루미나티’나 ‘그림자 정부’ 같은 낡은 이름이 아니에요.

이건 ‘음모’가 아니라 ‘프로젝트’처럼 들리게 만들어요.

훨씬 지능적이고, 그래서 더 무섭죠.

대중은 막연한 악보다, 자신들보다 똑똑하고 치밀한 악에 더 큰 공포를 느끼니까요.”


강태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수연의 분석에 동의했다.


“다음은 이 상징.”


이수연은 화면 속의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건 천재적인 조합이에요.

프리메이슨의 컴퍼스와 일루미나티의 전시안.

완전히 새로운 상징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걸 보면 자기가 원래 알던 막연한 공포를 떠올리게 돼요.

새로운 걸 믿게 하는 것보다, 익숙한 공포를 확인시켜주는 게 훨씬 쉬운 법이죠.”


그녀는 강태준을 쳐다보았다.


“이 메모를 남긴 사람은, 대중 심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물론 대중 심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은, 메모를 남긴 사람일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강태준과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그들은 이제 막, 죽은 윤석호의 입을 빌려 자신들의 각본을 쓰고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윤석호의 죽음 그 자체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아졌다.


“그는 이제 단순한 자살자가 아니에요.

그는 이 거대한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다, 조직에게 숙청당한 ‘첫 번째 순교자’이자 ‘내부 고발자’가 되는 거죠.

그의 죽음은, 우리가 앞으로 써 내려갈 이 이야기 전체에 비극적인 진정성을 부여하는 가장 완벽한 제물이 될 거예요.”


강태준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손가락으로 침대 옆에 놓인 거대한 도시 건축 모형의 첨탑 부분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도시 전체를 자신의 손안에 넣은 것처럼.


그는 이수연의 완벽한 판 짜기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녀는 단순한 기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대중의 무의식을 설계하는 정교한 건축가였다.

그리고 완벽한 탄을 짜는 타짜와도 같았다.


“그래서, 첫 기사는 뭐가 나가지?”


강태준이 물었다.


그의 질문은 이제 관찰자가 아닌, 공모자의 것이었다.


“증거는?”


이수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기다렸던 질문이었다.


“증거는 없어요. 지금은.”


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첫 기사는 질문만 던지는 거예요.

‘전직 국정원 거물, 그는 왜 죽음을 택했나?

그가 남긴 의문의 메모, ‘미래 설계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식으로요.

우리는 답을 주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답을 상상하게 만드는 거죠.

대중의 상상력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으니까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진짜 증거는… 우리가 지금부터 만들면 돼요.”


강태준은 고개를 돌려, 창밖의 도시를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수연의 계획이 가진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위험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한 성공의 가능성도 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테이블 위의 건축 모형을 보았다.


“좋은 건축은,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 법이지.”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것은 경고이자, 동의였다.


이수연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 기초 공사, 제가 책임지죠.”


그녀는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을 껐다.

화면 속의 초대장은 사라지고, 검은 유리 위로 두 사람의 얼굴이 비쳤다.

이제 막,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건축을 시작하려는 두 명의 설계자.


그들의 눈빛은 차가웠고, 그들 발아래의 도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4. 유리창에 비친 두 사람


이수연의 마지막 말이 펜트하우스의 정적 속에 스며들었다.


“그 기초 공사, 제가 책임지죠.”


강태준은 대답 대신, 만족한다는 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거대한 통유리창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계획은 세워졌다.

이제 남은 것은 실행뿐이었다.

그의 뒷모습은 이 거대한 공간 속에서도 유독 커 보였다.


그녀는 생각했다.

저 남자는 자신의 욕망의 크기를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을 가졌다.

그리고 자신은, 그 그릇을 채울 가장 강력한 내용물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수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위스키 잔을 든 채,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발아래 펼쳐진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았다.


이 순간, 펜트하우스는 인간의 땅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올림포스 산 정상에 서 있었다.

발아래 뒤엉킨 불빛들은, 신들의 발치에서 아우성치는 어리석고 가여운 인간들의 도시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들, 강태준과 이수연은 이제 막 인간들의 운명을 가지고 게임을 시작하려는 두 명의 신과도 같았다.


강태준은 질서를 갈망하는 냉정한 하늘의 신, 제우스였다.

그는 저 아래의 혼돈을 혐오했고, 자신의 번개를 이용해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재편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수연, 그녀는 지상의 진흙으로 인간을 빚고 그들에게 불을 훔쳐다 줄 프로메테우스였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와는 다르게, 그녀는 인간을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오직 신들의 권능을 시험하고, 자신의 지성이 어디까지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다.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의 위험한 동맹이라니...


그들은 지금 어두운 유리창에 비친 자신들의 유령 같은 모습을 보며, 새로운 신화를 만들기로 결의하고 있었다.

그 신화의 제물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일지는 아직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유리창 위로, 그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쳤다.

완벽한 거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실루엣은 유령처럼 투명했다.

그들의 몸 너머로, 강 건너 빌딩들의 불빛과 다리를 오가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가 어지럽게 겹쳐 보였다.

마치 그들의 육신은 텅 비어 있고, 그 안을 도시의 욕망과 불빛이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이수연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의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멀리 남산 타워의 초록색 불빛이 박혀 있었다.

그녀 옆에 선 강태준의 심장이 있어야 할 위치에서는, 어느 대기업의 거대한 로고가 붉은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유리창 표면에 묻은 아주 희미한 얼룩을 발견했다.

아마 낮 동안 청소부가 닦다가 남긴 자국일 것이다.

이 완벽한 성채에도, 저런 사소한 흠결은 존재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유리창에 비친 저 모습은 진짜 우리가 아니다.

도시의 불빛과 우리의 욕망이 뒤섞여 만들어낸, 거대하고 그럴듯한 허상일 뿐이다.

진짜 우리는, 저렇게 희미한 얼룩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감상적이라고 느끼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강태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는 여전히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유리창에 부딪혀 낮게 울렸다.


“정론일보의 오 부장은 내가 알아서 구슬리지.”


그는 더 이상 계획의 타당성을 묻지 않았다.

그는 이미 실행 단계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당신은 기사의 퀄리티에만 집중해.

너무 저급하게 흘러선 안 돼.

이건 대중 선동이 아니라, 지적인 폭로의 외피를 가져야 하니까.”


“알고 있어요...

이건 제 전문 분야죠.”


이수연이 대답했다.


“자금이나, 경찰 쪽 정보가 필요하면 이쪽으로만 연락하고.”


강태준이 안주머니에서 작은 명함 크기의 검은색 카드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거기에는 이름 없이, 암호처럼 보이는 이메일 주소와 번호 하나만 적혀 있었다.


그들의 공식적인 공모 관계를 증명하는, 유일한 물증이었다.

그녀는 카드를 받아, 트렌치코트의 깊숙한 주머니에 넣었다.


그들의 대화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나 인간적인 교감이 없었다.

오직 역할과 책임, 그리고 목표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가장 깊은 곳을 공유했지만, 동시에 서로를 결코 믿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절대 사랑이 아니었다.

이것은 야망의 파트너십이었다.


강태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유리창에 비친, 유령 같은 두 사람의 모습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나직이,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이 이야기의 끝은 해피엔딩이어야 해.”


그의 목소리가 유리창 위에서 차갑게 서렸다.


“적어도, 우리에겐.”


그 ‘우리’라는 단어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누구도 묻지 않았다.

그것은 이 위험한 계약의 가장 중요한, 동시에 가장 불안한 조항이었다.


이수연은 대답 대신, 잔에 남은 위스키를 마셨다.

술이 식도를 타고 흐르는 뜨거운 감각이, 그의 말에 담긴 서늘함을 밀어내는 것 같았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내일 아침, 편집국은 전쟁터가 될 테니까요.”


그녀가 말했다.


그들의 은밀한 회의는 끝났다.


그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에서, 용건이 끝난 뒤의 미련은 불필요한 감정이었다.


이수연은 몸을 돌려, 자신이 벗어두었던 트렌치코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사회적 전투복을 걸쳐 입었다.

이제 그녀는 강태준의 내연녀가 아니라, 세상을 뒤흔들 특종을 손에 쥔 정론일보의 이수연 기자였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그녀에게, 강태준이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이수연 기자.”


그녀가 돌아보았다.


“너무 즐기지는 마.”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경고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수연 역시, 같은 종류의 미소로 대답했다.


“노력해 보죠.”


VIP 엘리베이터의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녀는 아까 올라올 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차가운 금속 문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섰다.

완벽하게 닦인 문 위로, 그녀 자신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펜트하우스 유리창에 비쳤던 모습과는 달랐다.

그때는 도시의 불빛에 겹쳐 유령처럼 희미했다면, 지금 엘리베이터 안의 모습은 모든 것이 또렷했다.

얼굴은 피곤에 지쳐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모든 계획이 결정된 후의, 차가운 결의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를 쫓아다니는 기자가 아니었다.

윤석호의 죽음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그녀 자신이 직접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이자 감독이 된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녀 자신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터였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녀는 거울 같은 문에 비친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60층 높이의 신들의 세계에서, 그녀는 지상의 세계로 추락하듯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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