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재와 그림자
1. 책상 위의 위스키
서재의 공기는 무거웠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잘 마른 잉크 냄새도 났다.
수십 년 묵은 먼지가 조명 불빛 아래서 희미하게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것은 한 사람의 집착이 시간과 함께 곰삭아 만들어낸, 독특한 향이었다.
사방의 벽은 책이었다.
책들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것은 과시용 서가가 아니었다.
한 인간의 정신이 외부 세계의 혼돈에 맞서기 위해 쌓아 올린, 지성의 요새였다.
그 요새의 주인, 윤석호는 방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그는 창밖의 풍경을 등지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검은 강물이 도시의 불빛을 잘게 부수며 흘렀다.
10월의 밤, 한강이었다.
그는 그 풍경을 보지 않았다.
그의 어깨는 수십 년간 짊어진 비밀의 무게에 짓눌린 듯 보였다.
깊게 파인 미간의 주름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책상 위, 크리스털 잔 하나에 고정되어 있었다.
두껍고 묵직한, 바닥까지 투명한 잔이었다.
그는 옆에 놓인 위스키 병을 들었다.
글렌피딕 30년산.
짙은 녹색 병 위로, 위엄 있는 사슴 문양이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익숙하지만 무심한 손길로 병마개를 열었다.
'코르륵' 하는, 낮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호박색 액체가 잔으로 흘러들었다.
그는 술을 딱 한 잔 분량만 따랐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의 모든 행동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마치 오랜 시간 반복해 온 절차의 마지막 단계를 수행하는 것 같았다.
그는 책상 옆 작은 냉동고를 열었다.
완벽한 구(球) 모양으로 얼린 투명한 얼음이 보였다.
그는 은색 집게로 조심스럽게 얼음을 꺼내 잔에 넣었다.
‘툭.’
맑은 소리가 서재의 침묵을 갈랐다.
윤석호는 잔을 들지 않았다.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위스키 속에서 천천히 회전하는 얼음 구슬을.
단단했던 얼음의 표면에 균열이 가고, 아지랑이처럼 투명한 선을 그리며 녹아내리는 모습을.
자신의 삶처럼.
이것은 축배가 아니었다.
위로도 아니었다.
모든 것을 끝내기 전, 스스로에게 허락한 마지막 의식이었다.
그는 지난 사십 년의 세월을 이 한 잔의 술로 응축시키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그가 쫓았던 것, 그리고 그에게서 달아났던 모든 것들을...
이제 그 길고 길었던 추격전을 끝낼 시간이었다.
2. 모니터 속의 광대
고요했다.
서재 안에는 오직 얼음이 녹는 소리, 그리고 윤석호 자신의 심장이 혈액을 밀어내는 낮은 고동 소리뿐이었다.
그는 이 침묵 속에서 자신의 지난 사십 년을 반추하려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떤 선택이 지금의 막다른 길로 자신을 이끌었을까.
그의 사유가 가장 깊은 곳으로 침잠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핑-’
책상 구석에 놓인 노트북에서, 날카로운 알림음이 울렸다.
그것은 이 고요한 서재의 음역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질적이고 불쾌한 소음이었다.
윤석호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는 소리의 근원지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썼다.
마치 끔찍한 사고 현장을 외면하려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의 신경은 이미 저 모니터 너머의 세계에 붙들려 있었다.
그는 저 알림음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패배를 매일 밤 확인시켜주는,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
결국 그는 체념하듯, 마우스 위로 손을 가져갔다.
클릭.
어둠 속에서 모니터 화면이 환하게 켜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한 남자가 과장된 표정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LA의 한 반지하 스튜디오.
조악한 녹색 크로마키 배경 위로, ‘특종! 대한민국 그림자 정부, 그들의 정체를 폭로한다!’라는 촌스럽고 자극적인 자막이 불타고 있었다.
헤드셋을 쓴, 살집 좋은 40대 남자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빅터.
유튜브 채널 ‘진실의 방패’의 운영자였다.
그는 스스로를 대한민국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고독한 탐사 저널리스트라 칭했다.
하지만 윤석호가 보기에, 그는 그저 대중의 공포를 먹고사는 기생충이자, 진실과 거짓을 뒤섞어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는 교활한 광대일 뿐이었다.
“여러분! 마침내 그들의 꼬리가 잡히고 있습니다! 제가 몇 년 전부터 경고했던 바로 그들! 대한민국의 헌법 위에 군림하는 보이지 않는 세력! 제가 오늘, 그 조직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코드네임 ‘Y’의 실체를 밝혀드리겠습니다!”
빅터의 목소리는 거짓된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화면에 흐릿한 사진 한 장을 띄웠다.
십수 년 전, 어느 공식 행사장에서 찍힌 윤석호 자신의 모습이었다.
물론, 이미 오래전 대중에 공개된 사진이라 그리 새로울 것이 없었다.
“바로 이 사람입니다, 여러분! 윤석호! 전직 국정원 해외 파트의 핵심! 이 자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그림자 정부’의 오른팔입니다! 이 자가 지난 20년간 해외에서 어떤 공작을 펼쳤는지, 제가 입수한 이 비밀 자료를 보십시오!”
빅터가 흔들어 보이는 ‘비밀 자료’란, 몇 년 전 어느 주간지에서 발췌한 기사 쪼가리였다.
윤석호는 실소를 터뜨렸다.
저 자가 떠드는 내용의 90퍼센트는 쓰레기였다.
공개된 정보와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 그리고 자신의 과대망상을 뒤섞어 만든 조악한 칵테일.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저런 자에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는 그저 소음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의 이성은 지난 수십 년간의 의심과 편집증에 좀먹을 대로 좀먹은 상태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정말 저 자는 단순한 광대일까?’
‘저 조악함과 무지함 자체가, 고도의 암호는 아닐까?’
빅터가 어떤 날짜를 언급했다.
그 날짜는, 윤석호가 베이징에서 극비 공작을 수행하던 날과 기묘하게 일치했다.
빅터가 특정 기업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 기업은, 과거 국정원이 ‘그들’의 자금 세탁 창구로 의심했던 곳 중 하나였다.
물론 전부 우연일 수 있다.
아니, 우연일 것이다.
하지만 평생을 우연 속에 숨겨진 필연을 찾아 헤맨 윤석호에게, 그 모든 것은 거대한 손이 자신을 조롱하며 던지는 신호처럼 보였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쫓던 ‘미래 설계자들’.
그들이 만약 실존한다면, 그들은 빅터와 같은 자들을 이용할 것이다.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되, 아무도 믿지 못하게 만들도록.
진실을 거짓의 쓰레기 더미 속에 교묘하게 파묻어, 그 누구도 찾아낼 수 없게 만들도록.
그는 깨달았다.
빅터는 진짜 적들이 던진 미끼였던가.
그들이 저 광대의 입을 통해 자신을 조롱하며, 동시에 그 조롱에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시험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싸워온 전쟁이, 고작 저런 삼류 유튜버의 방송 소재로 전락했다는 사실.
그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이, 그의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끊어버렸다.
빅터는 방송 말미에 후원 계좌를 띄우며, 시청자들에게 ‘진실의 방패’가 되어달라고 호소했다.
화면이 검게 변했다.
윤석호는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깊은 주름과 퀭한 눈.
패배한 늙은 스파이의 얼굴이었다.
광대의 재롱에 마지막 자존심까지 농락당한, 볼품없는 모습.
그는 노트북을 소리 나게 덮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이 전쟁은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적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저 어딘가에서, 저런 광대를 내세워 자신을 비웃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무대에서 퇴장하는 것이 배우의 마지막 존엄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책상 위의 위스키 잔으로 향했다.
아까와는 다른, 차갑고 단단한 결심이 그의 눈에 서렸다.
사유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 행동할 시간이었다.
3. 만년필과 메모지
분노는 사라졌다.
불안도 없었다.
남은 것은 지독한 피로감과,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는 명료한 결심뿐이었다.
더 이상 싸울 의미가 없었다.
적의 얼굴도, 전쟁의 명분도 모두 잃어버렸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무대에서 스스로 퇴장하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한때는 국가의 그림자였던 자가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스르륵-' 하고, 잘 닦인 나무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서랍 안은 그의 성격처럼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는 가장 깊숙한 곳에 손을 넣었다.
익숙하고 묵직한 감촉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몽블랑 만년필이었다.
평생을 올곧은 공직자로 살았던 분이었다.
아버지는 이 펜으로 후배들의 임명장에 서명했다.
아들은 이 펜으로 국가의 운명을 가를지도 모를 비밀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인생에 마침표를 찍으려 하고 있었다.
그는 만년필의 뚜껑을 열어 잉크 잔량을 확인했다.
거의 비어 있었다.
그는 옆에 놓인 네모난 잉크병을 들었다.
짙고 푸른, ‘로열 블루’ 색상의 잉크였다.
그는 펜촉을 병 안에 담그고, 천천히 잉크를 빨아올렸다.
투명한 관 안으로 푸른 액체가 차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생명을 주입하는 듯한, 경건한 행위였다.
잉크를 다 채운 그는, 부드러운 헝겊으로 펜촉에 묻은 여분의 잉크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그는 유서를 쓰지 않기로 했다.
변명도, 폭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결국 또 다른 해석의 대상이 되어, 진실을 더욱 어지럽힐 뿐이다.
대신,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아무도 풀지 못할, 그래서 영원히 사람들의 머릿속을 맴돌게 될 마지막 수수께끼를.
그것이 평생을 정보의 미로 속에서 살아온 그가 택할 수 있는, 가장 그다운 마지막이었다.
그는 두툼한 크림색 메모지 묶음에서, 맨 위 한 장을 떼어냈다.
종이의 질감이 손끝에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는 메모지를 책상 정중앙, 가죽 데스크패드 위에 반듯하게 올려놓았다.
그리고 만년필을 굳게 쥐었다.
그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쫓아온 그 허깨비에게, 그가 붙여주었던 비밀스러운 이름을 적었다.
자신의 패배와 경멸, 그리고 마지막 저주를 담아.
사각사각.
종이를 긁는 펜촉의 소리만이 서재의 침묵을 채웠다.
미래 설계자들
또박또박 여섯 글자를 다 쓰고,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 아래, 수십 년간 그의 망막에 각인되었던 그 상징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를 대고 그린 것처럼, 흔들림 없이 정교하게 선을 그었다.
모든 것을 재단하려는 듯한 컴퍼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동자.
그것은 그가 쫓던 적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그 자신의 집착과 편집증이 만들어낸 괴물의 얼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림을 완성한 그는, 만년필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책상 위에는 이제, 단 두 줄의 메시지가 남았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오히려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완벽한 암호였다.
그는 자신이 남긴 이 작품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 작은 종잇조각이, 내일 아침이면 세상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진실의 열쇠로, 또 다른 누군가는 파멸의 씨앗으로 사용하게 될 터였다.
이제 그의 역할은 끝났다.
그는 마지막 무대 장치를 완벽하게 설치했다.
4. 따뜻한 밧줄
그의 일은 끝났다.
책상 위에 놓인 작은 메모지는, 그가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보고서였다.
그는 의자를 뒤로 살짝 밀었다.
바퀴 달린 의자가 마룻바닥 위를 구르며, 작지만 날카로운 소음을 냈다.
그는 책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예술가처럼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완벽했다.
이제 개인적인 마무리를 할 시간이었다.
그의 시선이 책상에서 들어, 맞은편의 어두운 유리창으로 향했다.
창밖의 야경은 흐릿한 배경으로 물러나고, 대신 유리 위에는 자신의 모습이 유령처럼 떠올라 있었다.
그는 창문에 비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깊게 팬 주름,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모든 것을 포기한 자의 텅 빈 눈동자.
낯선 얼굴이었다.
지난 사십 년간 국가라는 이름의 제단 위에서 자기 자신을 조금씩 제물로 바쳐온 결과가, 바로 저 남자였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몸을 돌려, 책상의 가장 아래쪽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다른 서랍들과는 달리, 그곳에는 작은 열쇠 구멍이 있었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익숙하게 잠금장치를 풀었다.
서랍이 소리 없이 열렸다.
안에는 벨벳 천으로 감싸인 물건이 하나 들어 있었다.
그것은 잘 마른 삼베로 꼰, 굵고 단단한 밧줄이었다.
오래전, 한 작전에서 증거물로 수거했던 물건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끝냈던 바로 그 밧줄.
그는 그것을 파기하지 않고, 기이한 전리품처럼 간직해왔다.
마치 언젠가 자신의 차례가 올 것을 예감이라도 했던 것처럼.
그는 밧줄을 꺼내 들었다.
손바닥에 감기는 삼베의 감촉이 거칠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서재의 가장 높은 곳을 올려다보았다.
천장 중앙에는 무거운 샹들리에를 걸기 위해, 설계 단계부터 보강된 장식용 고리가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 고리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오늘을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묵직한 마호가니 의자를 끌어다 고리 아래에 놓았다.
의자 위로 올라서자, 자신이 평생을 바쳐 만든 지성의 요새가 한눈에 들어왔다.
수천 권의 책들, 가지런히 정리된 서류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마지막 메시지.
완벽한 무대였다.
그의 손은 전문가의 손이었다.
떨림 없이, 기계적인 순서에 따라 움직였다.
그는 밧줄의 한쪽 끝을 천장의 고리에 단단히 묶었다.
매듭은 간결하면서도 절대 풀리지 않을 모양새였다.
그리고 남은 밧줄의 끝으로, 자신의 목에 꼭 맞을 올가미를 만들었다.
그의 손놀림은 마치 중요한 행사를 위해 넥타이를 매는 신사처럼, 기묘할 정도로 침착하고 우아했다.
그는 의자 위에 선 채,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거친 삼베의 감촉이 목을 쓸었다.
그는 아내를 생각했다.
아들도 생각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이제는 쉴 시간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발밑에 놓인 의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저것만 치우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의자를 걷어찼다.
의자가 마룻바닥에 나뒹구는 요란한 소음.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내는, 비명 같은 마찰음.
그리고 잠시 동안,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희미한 소리.
이윽고 서재에는 완전한 침묵이 찾아왔다.
방금 전의 소음들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천장의 고리에 매달린 그의 몸이, 아주 천천히, 시계추처럼 좌우로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의 그림자가 책상 위를 오갔다.
마치 그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고 있는 것처럼.
창밖의 도시는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