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장: 가장 달콤한 독
1. 차지원을 향한 마녀사냥
다음 날 아침, 대한민국은 이수연이 설계한 새로운 장(章)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그녀의 두 번째 기사는, 단순한 폭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들을 거대한 추리 게임의 참여자로 만드는, 교묘하고도 매혹적인 초대장이었다.
정론일보의 1면 헤드라인은, 그 자체로 드라마의 예고편과도 같았다.
[단독 ‘미래 설계자들’, 내부 균열인가… 조직원 A씨의 충격적 추가 폭로]
‘내부 고발자’.
그 단어는, 마법과도 같았다.
그것은 이 모든 음모론에,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의 무게를 더했다.
사람들은 이제, 이수연의 기사를 읽는 것을 넘어, 그녀가 던져준 미스터리의 조각들을 스스로 맞추기 시작했다.
‘조직원 A씨’, ‘또 다른 카산드라’로 명명된 이 미지의 인물은, 순식간에 전국적인 관심의 중심에 섰다.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왜 배신했는가.
그녀는 안전한가.
이 새로운 국면을 가장 먼저 자신의 무기로 삼은 것은, LA의 빅터였다.
그는 이수연의 기사가 발표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긴급: 내부 고발자 카산드라를 찾아라! 우리가 그녀를 지켜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성스러운 사명감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여러분.
마침내 때가 왔습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바로 ‘카산드라’라고 불리는,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저 거대한 악의 제국 안에서, 우리를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혼자입니다.
조직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녀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녀의 방패가 되어, 그녀를 지켜야 합니다.”
빅터의 목소리는 진심처럼 들렸다.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그 자신도 스스로의 말에 취해 있었을지 모른다.
그의 선동에, 수십만 명의 ‘진실의 방패’ 구독자들이 응답했다.
그들은 더 이상 방관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이 거대한 서사의 일부이자, 영웅을 구출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십자군이었다.
빅터는 그들에게,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내려주었다.
“여러분.
‘카산드라’를 찾을 수 있는 단서는, 그녀가 남긴 흔적 속에 있습니다.
이수연 기자는, 그녀가 ‘경기도 외곽의 토지 문제’를 언급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글에는, ‘한나 아렌트’와 같은 철학자들의 이름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우리의 집단 지성을 보여줍시다.
최근, 이 키워드들로 글을 쓴 학자나 전문가가 있었는지, 지금부터 다 함께 찾아봅시다.
우리의 영웅, 카산드라를 구출합시다.”
그의 방송은, 거대한 디지털 수색 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출정사와도 같았다.
수만 명의 ‘디지털 탐정’들은, 성스러운 사명감과 짜릿한 흥분 속에서, 자신들의 ‘메시아’를 찾아, 인터넷의 모든 구석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목표물을 찾아내는 데에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한 유저가, ‘이성과의 대화’라는 작은 온라인 저널의 존재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차지원의 기고문을 찾아냈다.
그 글 안에는, 빅터가 언급했던 모든 키워드가, 마치 예언처럼 박혀 있었다.
‘경기도 토지대장’.
‘한나 아렌트’.
‘움베르토 에코’.
온라인 커뮤니티는, ‘유레카’를 외치는 아르키메데스의 함성처럼, 흥분으로 들끓었다.
“찾았다.
차지원.
경기도 소재 대학 시간 강사.”
한 유저가, 그 저널의 필진 소개란에 있던 차지원의 프로필 사진과 이력을 캡처해서 올렸다.
그 순간, 둑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것은, 증오의 둑이 아니었다.
그것은, 맹목적인 기대와 열광의 둑이었다.
차지원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그녀의 기고문 링크가, 빛의 속도로 모든 온라인 커뮤니티에 퍼져나갔다.
그녀의 페이스북은, 순식간에 수천 개의 친구 요청과 메시지로 마비 상태에 빠졌다.
댓글 창은, 그녀를 찬양하고, 그녀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글들로 도배되었다.
“교수님, 드디어 당신을 찾았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저희 수십만이 당신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부디 용기를 내어, 빅터 님 방송에 출연해서 모든 것을 폭로해주세요!”
“교수님, 당신이 바로 이 시대의 유관순입니다.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그녀는 하룻밤 사이에, 무명의 시간 강사에서, 세상을 구원할 잔 다르크이자, 이 시대의 마지막 양심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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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차지원은 자신의 집,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난 참이었다.
기고문을 보낸 뒤, 그녀를 짓누르던 죄책감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진 덕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
비록 작은 메아리에 그칠지라도, 그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커피를 내리고 토스트를 구웠다.
그리고 노트북을 열어, 자신의 글에 대한 반응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이성과의 대화’ 편집장에게서, ‘예상보다 반응이 뜨겁습니다’라는 격려의 메일이 와 있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글이 실린 페이지를 클릭했다.
그리고, 그녀의 세계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시 한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비판이나 토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광적인 숭배였다.
수천, 수만 개의 댓글들이, 그녀를 ‘교수님’, ‘영웅님’, ‘희망’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페이스북 메시지함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폭로해달라고 애원하는, 간절하고도 위협적인 요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이것은, 그녀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성적인 대화를 원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녀에게서 새로운 교주를, 새로운 우상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거대한 해일의 한가운데, 아주 작은 널빤지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녀를 향해 뻗어 오는 수만 개의 손길은, 구원의 손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섬길 새로운 우상을 발견한 광신도들이, 그녀를 제단 위로 끌어올리려는 맹목적인 폭력이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그녀가 원하지 않았던 예언자의 관이 씌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는, 그녀가 동의한 적 없는 반란의 깃발이 둘러지고 있었다.
수만 개의 손가락이, 그녀를 자신들이 몰고 가는 광기의 배 가장 높은 돛대 위에 묶어두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통스러웠다.
자신의 글이, 자신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이 집단적 광기를 더욱 부채질하는 연료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멈춰야 했다.
자신이 이 광기의 중심에 서기를 거부해야만 했다.
그녀는 몇 시간을 고뇌했다.
남편 김민준은, 이 상황이 불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명성에 내심 흥분한 듯 보였다.
“자기야, 이거… 어쩌면 기회일지도 몰라. 사람들이 다 자기 편이잖아.”
그의 말은, 그녀의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들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짧고, 단호하며, 명료한 글을 올렸다.
그것은 그녀의 학자적 양심이 내리는, 마지막 호소였다.
<많은 분들의 관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찾으시는 영웅이나 내부 고발자가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한 명의 연구자일 뿐입니다.
제 기고문의 본질은, 특정 비밀 조직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왜 이토록 거대한 이야기에, 명쾌한 '악당'에 열광하는지를 이해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르네 지라르가 통찰했듯, 우리는 내부의 갈등을 잠재우기 위해 공동의 '희생양'을 필요로 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그 위험한 유혹에 빠져, 우리 사회의 진짜 문제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또한, 제 글이 또 다른 맹목적인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음모의 증거로 연결 짓는 '편집광적 해석'의 위험성을 경고했습니다. 진정한 앎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허구를 신중하게 구분하는 이성적 노력에서 비롯됩니다.
마지막으로, 한나 아렌트는 우리에게 '사유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악을 낳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무분별한 신상털기와 특정 개인을 향한 맹목적인 공격이, 바로 그 '무사유'의 또 다른 모습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부디, 영웅을 찾으려는 열망을 잠시 멈추고,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이성적으로 사유하고 질문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집단적 광기에서 구원할 유일한 길입니다..>
그녀가 ‘게시’ 버튼을 누르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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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글이 올라온 직후, 온라인 커뮤니티는 순간,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침묵은, 곧바로, 훨씬 더 거대한 분노의 폭발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메시아에게 거부당했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숭배의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 즉시 증오의 대상이 필요했다.
“뭐야? 우리를 가르치려 들어?”
“결국 저 여자도 똑같은, 잘난 척하는 엘리트일 뿐이었어!”
“속았다. 저 여자, 미래 설계자들에게 협박당했거나, 돈으로 매수된 게 틀림없어!”
빅터는, 이 완벽한 반전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즉시 두 번째 긴급 방송을 켰다.
그의 얼굴에는, 배신당한 자의 비통한 표정이 걸려 있었다.
“여러분… 비극적인 소식입니다.
우리가 믿었던 카산드라.
차지원 교수는… 적들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녀는 진실의 편에 서는 것을, 스스로 거부했습니다.
그녀는 우리를 버렸습니다.
그녀는, 진짜 내부 고발자가 아니라, 우리의 힘을 빼기 위해 투입된 ‘역정보원’이었던 것입니다.
저 가짜에게 속지 마십시오.
저 여자는 이제, 우리의 적입니다.”
빅터의 선언은, 마녀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도 같았다.
‘영웅을 보호하자’던 대중의 에너지는, 이제 ‘배신자를 처단하자’는 파괴적인 분노로 완벽하게 전환되었다.
이제, 차지원의 모든 것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의 얼굴 사진은, ‘진실을 은폐하려는 딥 스테이트의 앞잡이’라는 이름표를 단 채 밈이 되어 떠돌았다.
그녀가 과거에 썼던 모든 논문과 글들은, 그녀가 얼마나 위선적인 엘리트인지를 증명하는 증거로 사용되었다.
그녀의 대학 게시판은, 그녀의 해임을 요구하는 글로 마비되었다.
그녀의 페이스북은, 이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저주와 욕설, 그리고 살해 협박으로 뒤덮였다.
차지원은 자신의 집, 거실 구석에 웅크린 채, 이 모든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쏘아 올린 이성의 화살이, 어떻게 광기의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심장을 꿰뚫고 있는지를.
그녀의 마지막 저항은, 세상과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이 거대한 광기의 불길을 끄기 위해, 그녀가 마지막 힘을 다해 부은 한 바가지의 물이었다.
하지만 군중의 눈에, 그것은 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길을 하늘까지 치솟게 만든, 한 통의 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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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은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이 모든 과정을, 마치 잘 만든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관람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중이라는 이름의 이 거대한 짐승이, 얼마나 예측 가능하고, 얼마나 다루기 쉬운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녀의 입가에, 차갑고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차지원은, 이제 완벽하게 제거될 것이다.
그녀 스스로, 자신의 무덤을 판 겪이 된 것이다.
차지원은 이 거대한 서사의 법칙을, 그리고 대중이라는 신의 변덕을 이해하지 못했다.
신은 자신을 해명하려는 제물을 가장 먼저 처단하는 법이다.
차지원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제단 위로 걸어 올라간, 어리석은 제물이었다.
그녀의 목에 칼을 꽂은 것은 이수연과 빅터였지만, 그녀를 제단 위로 이끈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의 숭고한 양심이었다.
2. 와인과 고백 (김민준, 이수연에게 넘어가다)
그날 저녁, 삼청동의 밤은 안개처럼 고요했다.
북악산의 차가운 공기가, 오래된 한옥의 기와지붕과 현대적인 갤러리의 통유리창 위로 공평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화려한 강남의 밤과는 다른, 억제된 품격과 오래된 시간의 냄새가 깃든 곳.
이수연은 바로 그곳을, 그녀의 두 번째 사냥터로 정했다.
그녀가 예약한 와인 바는, 좁은 골목길 안쪽, 외부에서는 간판조차 잘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오직 아는 사람만이 찾아올 수 있는, 그들만의 성역.
그것은, 지금부터 벌어질 대화의 성격을 규정하는, 그녀의 첫 번째 메시지였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들이고, 지금부터 나누는 이야기는 완벽한 비밀이 될 것이다.’
이수연은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먼저 도착했다.
그녀는 공간을 지배하고 싶었다.
그녀는 ‘클로이’라는 인물을 완벽하게 연기하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롭게 디자인한 상태였다.
몸의 곡선을 따라 흐르는 검은색 캐시미어 원피스.
손목에는 시간을 알려주는 기능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미니멀한 디자인의 스위스제 시계.
그녀의 목에서는, 아주 희미하지만, 아무나 맡아본 적 없는 중성적인 우디 향의 니치 향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유명한 명품 브랜드의 향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는 사람만이 아는, 취향과 부의 상징이었다.
그녀는 바의 가장 안쪽, 어두운 구석 자리에 앉아, 프랑스어로 된 두꺼운 미술 잡지를 읽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려 온 사람처럼.
김민준은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늦게 도착했다.
그는 의도적으로 늦었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그녀를 애타게 기다리는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그런 계산은, 이미 바 안의 모든 분위기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버린 이수연의 존재감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작은 몸부림일 뿐이었다.
그는 어색하게 입구에 서서, 그녀를 찾았다.
그리고 구석 자리에서, 잡지를 읽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는 순간, 그는 숨을 멈췄다.
그녀는 갤러리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또 위험해 보였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심장은, 마치 처음으로 후원자를 만나는 가난한 예술가처럼, 기대와 불안으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집을 나설 때, 아내 차지원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며칠째, 유령처럼 집 안을 떠돌고 있었다.
그녀가 뿜어내는 절망의 공기는, 김민준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그는 그 지옥 같은 집에서, 마침내 탈출한 참이었다.
“클로이 씨.”
그가 부르자, 이수연은 잡지에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를 발견하고는, 처음으로, 아주 따뜻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여행자 같은 미소였다.
“작가님.
와주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의 모든 불안을 한순간에 녹여버리는 마법과도 같았다.
김민준은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어색하게 엉덩이를 걸쳤다.
이수연은 소믈리에를 불렀다.
그리고 와인 리스트를 보는 척하며, 나지막이 말했다.
“샤토 마고, 1982년산으로 부탁해요.”
김민준의 눈이 커졌다.
그가 평생, 자신의 돈으로는 마셔볼 일이 없을, 전설과도 같은 와인이었다.
소믈리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사라지자, 이수연은 다시 김민준을 보며 말했다.
“작가님의 그림과 어울릴 것 같아서요.
겉보기에는 완벽하게 균형 잡혀 있지만, 그 안에는 아주 복잡하고, 조금은 비극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는 와인이죠.”
그녀의 모든 말은, 그를 향한 찬사였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그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김민준은, 이 꿈같은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다.
와인이 서빙되고, 두 사람의 잔이 채워졌다.
이수연은 잔을 들어, 그에게 가볍게 눈짓을 보냈다.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김민준은 황급히 잔을 들었다.
‘쨍’, 하고 맑은 크리스털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벨벳처럼 부드러운 액체가, 그의 혀를 감싸고,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며, 그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은 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허락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망각의 약이었다.
이수연은,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서만 물었다.
“작가님의 그 그림, ‘콘크리트 둥지의 자화상’.
그 그림을 본 이후로, 다른 어떤 그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저는 그 그림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의 고통과,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고독을 동시에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작가님의 그림에는… 저항이 있었어요.
단순히 절망하는 것을 넘어, 그 절망의 근원을 똑바로 응시하려는, 처절한 의지.”
그녀는, 김민준 자신이 평생 동안 자신의 작품에 대해 하고 싶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언어화하지 못했던 바로 그 말을, 완벽한 문장으로 들려주고 있었다.
김민준은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는 봇물이 터진 듯, 자신의 예술 세계와, 세상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제 그림이 너무 어둡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원래 어두운 걸 어떻게 합니까.
저는 그냥, 제가 본 것을 정직하게 그렸을 뿐입니다.
미술계는, 온통 가짜들뿐입니다.
자본의 논리에 맞춰, 대중의 입맛에 맞는, 예쁘고 달콤한 그림들만 그려대는 화가들.
그리고 그들 뒤에서, 평론가라는 이름으로 가격을 조작하는 장사치들.
저는… 그런 것들과 타협할 수 없었습니다.”
이수연은, 마치 그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처럼, 깊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그의 분노를, ‘타협을 모르는 예술가의 순수성’으로 포장해주었다.
그녀는 그의 고립을,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고독’으로 미화해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 들었다.
“아내분도… 작가님의 그런 점을, 존경하시겠지요?”
그녀는 아주 순진하고, 선의로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게 지적인 분이시니, 분명 작가님의 예술 세계를 가장 깊이 이해해주실 것 같아요.”
그 질문이, 김민준의 가장 깊은 상처를 건드렸다.
그의 얼굴에, 아주 잠깐, 씁쓸한 그늘이 스쳐 지나갔다.
이수연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
김민준이 말을 흐렸다.
“제 와이프는… 그녀는, 좋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똑똑하죠.
하지만…”
그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미 몇 잔의 와인과, 그녀가 만들어낸 완벽한 공감의 분위기 속에서, 그의 경계심은 완전히 허물어진 상태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이 여자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싶었다.
“그녀의 세계는, 너무나 완벽합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모든 것에 대한 정답이 들어있어요.
그녀는 제 그림을 보고, 그것이 어떤 철학적 사조의 영향을 받았고, 어떤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는지 분석해줍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제 그림을 보고, 그냥 ‘슬프다’거나 ‘아프다’고 말해준 적은 없었어요.”
그의 목소리가, 어린아이처럼 떨려왔다.
“그녀의 지성은, 너무나 거대해서, 때로는 저를… 아주 작고 초라하게 만들어요.
저는 그녀의 옆에서, 언제나 오답을 말해서는 안 되는 학생 같아요.”
이것이 바로, 이수연이 기다렸던 고백이었다.
그녀는 몸을 테이블 너머로 살짝 기울여,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얹었다.
그녀의 손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했다.
“알아요.”
그녀가 속삭였다.
“이성은, 때로 가장 잔인한 폭력이 되기도 하죠.
그것은 모든 것을 분석하고 재단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 이름 붙일 수 없는 영혼의 떨림은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작가님의 그림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건, 느껴야 하는 거죠.”
그 한마디에, 김민준의 내면에 있던 마지막 빗장이, 산산조각 나며 부서져 내렸다.
그는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독한 알코올 기운과, 그보다 더 독한 인정의 쾌감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요즘 집안에 좀 시끄러운 일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물기를 머금은 듯 희미하게 떨려왔다.
이수연은 호기심을 완벽하게 감춘 채, 오직 순수한 걱정만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요?”
… 말씀하기 곤란하시면, 안 하셔도 괜찮아요.
… 저는 그저,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게 안타까울 뿐이에요.”
그녀의 배려는, 오히려 그의 고백 욕구를 더욱 부채질하는 가장 강력한 촉매였다.
그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이 여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의 고통을, 그리고 자신의 특별함을.
“아닙니다.
클로이 씨께는… 왠지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마치,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목소리를 낮췄다.
“요즘 뉴스에 계속 나오는, 그 ‘미래 설계자들’ 이야기… 아시죠?”
이수연은 능숙하게, 처음 듣는 척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완벽한 관객이었다.
“아, 그 음모론 말씀이시죠?”
파리에 있을 때, 헤드라인만 몇 번 본 것 같아요.
한국에선 꽤나 뜨거운 모양이더군요.
솔직히,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라, 깊게 보지는 않았어요.”
김민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거의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비현실적이죠. 네, 맞습니다.
그런데 그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불을 붙인, 그리고 지금은 온 세상의 공격을 받고 있는 그 ‘차지원’이라는 사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수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이제 동정이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을 갈망하는 욕망이 떠올라 있었다.
“사실은, 제 아내입니다.”
그는 이 말을 하며, 그녀의 얼굴에 나타날 경이로운 표정을 기다렸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가진 그 문제적 명성을,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하나의 희귀한 보석처럼 꺼내 보이고 있었다.
이수연은,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완벽한 타이밍에, 가장 완벽한 표정을 연기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살짝 벌어졌다.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마치, 너무나 큰 충격에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세상에…”
그녀가 간신히 속삭였다.
“정말인가요?”
…그 용감하고, 지적인 칼럼을 쓰신 분이, 바로 작가님의 아내분이셨군요.
정말… 놀랍네요.
그런 위대한 영혼과 함께 살고 계셨다니.”
김민준은, 그녀의 반응에 완전히 취했다.
그녀의 놀라움은, 곧 자신에 대한 찬사와도 같았다.
그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내를 걱정하는 자상한 남편의 가면을 쓴 채, 은밀하게 아내를 깎아내리기 시작했다.
“용감하다기보다는… 좀 답답하죠.”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세상 물정을 너무 몰라요.
제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굳이 그런 글을 써서… 온 집안… 아니 나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그는 아내를 걱정하는 척하며, 자신을 그 위험한 세상으로부터 아내를 지키려는, 고뇌하는 남편으로 포장했다.
동시에,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이 아내의 고집 때문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했다.
바로 그 순간, 이수연은 자신이 찾던 모든 것을 얻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제 ‘클로이’로서, 그의 아내에 대한 모든 것을 물어볼, 완벽한 명분을 손에 넣었다.
그것은 더 이상 무례한 질문이 아니라, ‘훌륭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아내를 둔, 고뇌하는 남편을 위한’ 진심 어린 걱정이 될 터였다.
사냥꾼은, 마침내 사냥감의 집 안으로 들어갈, 합법적인 초대장을 손에 쥔 것이다.
이수연은, 이제 그를 완벽하게 소유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이제, 마지막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임을 알았다.
“그래서, 더 걱정이 돼요.”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요즘, 아내분 때문에 시끄러운 일들 말이에요.
그녀는 너무 순수하고, 너무 용감해요.
하지만 세상은, 그녀처럼 정직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위험한 곳이죠.
그녀의 적들이, 그녀를 공격하기 위해, 그녀의 과거를 파헤치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혹시… 그녀에게,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 되는 약점 같은 거라도 있나요?
그녀의 연구라든가, 과거 경력이라든가…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돕고 싶어서요.
그렇게 위대한 영혼이, 오해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요.”
그녀의 말은, 진심 어린 걱정처럼 들렸다.
김민준은 완전히, 그녀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 여자에게 아내의 비밀을 알려줌으로써, 자신이 아내를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아내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것을, 이 여자에게 증명하고 싶었다.
“약점이라…”
그가 잠시 고민했다.
“그녀는 언제나 완벽했어요.
하지만, 딱 한 번.
거의 무너질 뻔한 적이 있습니다.”
박사 학위 논문을 쓸 때, 자신의 지도 교수와 크게 싸운 적이 있어요.”
그는 이수연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당시 지도 교수가, 마침 승진을 앞두고 논문 실적이 급하게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지원이 논문의 가장 핵심적인 챕터 하나를, 자신의 연구 논문으로 먼저 발표하려고 했었죠.
명백한 아이디어 도둑질이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씁쓸하게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보통의 학생이라면, 교수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적당히 타협하고 눈감아줬을 겁니다.
그게 세상 사는 방식이니까요.
하지만 지원이는 달랐습니다. 그
녀는 정면으로 맞서 싸웠어요.
학과 전체가 발칵 뒤집혔죠.”
그는 마치 차지원의 그 고집이 한심하다는 듯,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결국에는 지원이가 옳았다는 게 밝혀지고, 그 교수는 망신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원이가 모든 상처를 다 입었어요.
몇 달 동안 학교도 못 나가고, 거의 폐인처럼 지냈습니다.
‘진실은 승리한다’는 순진한 믿음이, 얼마나 잔인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그때 처음 깨달은 거죠.”
김민준은 마침내, 이수연이 가장 듣고 싶어 할 말을 꺼냈다.
“그때 알았습니다.
자신의 지성과 명예에 대한 공격.
특히 ‘표절’이나 ‘도둑질’과 같은 누명을 쓰는 것을, 그녀는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요.
그녀는 다른 건 다 참아도, 그런 종류의 모욕은 절대로 견디지 못합니다.
그게, 어쩌면 그녀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일지도 모릅니다.”
이수연의 심장이, 차갑게 뛰었다.
찾았다.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찾던 가장 완벽한 무기였다.
‘표절 의혹’.
학자에게, 이보다 더 치명적인 공격은 없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의혹을 제기하고,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차지원의 영혼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이수연은, 자신의 목적이 달성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마음고생이 심했겠네요.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민준 작가님.
이제 제가 뭘 해야 할지, 조금은 알 것 같아요.”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김민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김민준이 당황하며 자신도 내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웃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눌렀다.
“오늘은, 제가 작가님의 위대한 재능에 투자하는 첫날인걸요.”
그녀는 그 말을 남기고, 그를 그곳에 홀로 남겨둔 채, 자신이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조용하고 우아하게 와인 바를 빠져나갔다.
바깥의 차가운 밤공기가, 그녀의 뜨거워진 뺨을 식혀주었다.
그녀는 기다리고 있던 검은색 세단에 올라탔다.
차 안에서, 그녀는 방금 전 김민준이 했던 말을, 자신의 스마트폰 메모장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기록했다.
그것은, 한 남자의 슬픈 고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적인 차지원을 파멸시킬, 가장 강력한 무기의 제원이었다.
그녀는 차창 밖으로, 아직도 와인 바 입구에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김민준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아주 옅은, 그러나 잔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가장 달콤한 독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손을 통해 전해지는 법이지.’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나지막이 목적지를 말했다.
“을지로.”
전쟁터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3. 손에 넣은 무기
검은색 세단은, 삼청동의 고요한 밤 속에서 소리 없이 미끄러져 빠져 나왔다.
차가 출발하고, 와인 바의 불빛이 모퉁이 뒤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이수연의 얼굴에서, 모든 온기가 사라졌다.
김민준의 영혼을 어루만지던 따뜻하고 매혹적인 갤러리스트, ‘클로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성공적으로 정찰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는 스파이의,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클러치 백에서, ‘클로이’의 명함과 똑같이 생긴, 그러나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또 다른 명함을 꺼냈다.
그리고 방금 전 김민준이 했던 말을, 그 뒷면에 아주 작은 글씨로 빠르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박사 논문.
지도 교수(노진석).
교수가 아이디어 도용 시도.
지원이 정면으로 맞서 싸움.
공식 기록 없이 묻힘.
‘표절’ 누명에 대한 극심한 트라우마.’
그녀의 손끝에서, 한 인간의 가장 깊은 트라우마가, 몇 개의 건조한 키워드로 분해되어 정보가 되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나지막이 목적지를 말했다.
“강남 G호텔로 가주세요.”
운전기사는 룸미러로 그녀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기계처럼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 차 안에서, 그녀는 승객이 아니었다.
그녀는, 작전을 지휘하는 사령관이었다.
세단이 강남의 호텔 로비 앞에 멈춰 섰다.
도어맨이 정중하게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클로이’로서, 우아하게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세단이, 자신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로비의 소파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완벽한 위장이었다.
5분 뒤, 그녀는 호텔의 정문이 아닌, 옆의 카페를 통해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목적의식이 뚜렷했다.
그녀는 자신의 진짜 스마트폰을 꺼내, 택시를 불렀다.
택시가 도착하자, 그녀는 뒷좌석에 몸을 실으며,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을지로 인쇄소 골목으로 가주세요.”
그녀는 다시, 자신의 진짜 전쟁터로 돌아가고 있었다.
밤 11시.
을지로의 비밀 오피스텔.
이수연의 가장 내밀한 대장간.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낡은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 차림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녀의 책상 위에는, 진한 블랙 커피와, 새로운 담배 한 갑, 그리고 방금 전 그녀가 기록했던 메모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김민준이 던져준 ‘박사 논문 표절 의혹’이라는 원석을, 이제부터 날카롭게 제련할 참이었다.
김민준의 증언은, 그 자체로 완벽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수연은 프로였다.
그녀는 아마추어처럼,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의 외피로 감싸, 가장 단단하고 날카로운 무기로 만들어야만 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맹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언론사에만 허가된 유료 인물 정보 데이터베이스, 국회 도서관의 모든 학술 논문 아카이브, 그리고 어둠의 경로를 통해 거래하는 정보 브로커에게까지 접근했다.
그녀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십여 년 전, 차지원의 박사 학위 심사 과정에서 있었던 모든 것을, 먼지 한 톨까지 복원해 내는 것.
그녀의 모니터 위로, 정보의 조각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차지원의 지도 교수였던 노진석.
그는 현재, 학계의 존경받는 원로이자, 여러 정부 위원회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거물이었다.
그의 얼굴 사진은, 인자하고 학식 높은 학자의 전형이었다.
이수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피해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가해자를 향한 대중의 분노는 더욱 커지는 법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시 대학원생들이 익명으로 사용하던 낡은 온라인 커뮤니티의 서버 깊숙한 곳에서, 결정적인 흔적을 찾아냈다.
[제목: 철학과 미친X 근황]
[글쓴이: 익명]
[내용: ㄴㅈㅅ 교수랑 싸웠던 그 여자 후배 ㅊㅈㅇ 결국 지도 교수 바꿨다더라. 독하게 버티더니, 결국 꼬리 내렸네. 교수는 못 이기지.]
이수연은 이 짧은 글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다.
‘싸웠다’.
‘독하게 버텼다’.
‘꼬리 내렸다’.
‘교수는 못 이기지’.
이 단어들은, 진실을 왜곡하기에 가장 완벽한 재료들이었다.
그녀는 이 익명의 글을 캡처했다.
‘내부 관계자의 증언’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줄, 첫 번째 증거였다.
그녀는 노진석 교수가 그 무렵 발표했던 논문들과, 몇 년 뒤에 나온 차지원의 박사 논문을 나란히 띄워놓았다.
두 논문의 주제는 비슷했지만,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전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별 연구 논문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대중은, 논문을 직접 읽지 않는다.
그들은, 누군가 요약해 준 ‘진실’만을 믿을 뿐이다.
이수연은 두 논문에서, 가장 비슷하게 들리는 문장들만을 교묘하게 발췌하여, 하나의 표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표절 비교 분석표’라는, 그럴듯한 이름과 함께.
모든 재료가 준비되었다.
그녀는 이제, 이 진흙으로, 차지원의 명예를 짓뭉개버릴 가장 추악한 흉상을 빚어낼 참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워드 파일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가 쓰기 시작한 것은, 정론일보에 실릴 기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유튜버 빅터에게 익명으로 보낼, ‘내부 고발 제보 문건’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정론일보라는 공적인 무대에서는 결코 다룰 수 없는, 더럽고 비열한 종류의 싸움이었다.
이런 종류의 싸움에는, 빅터와 같은, 기꺼이 진흙탕에서 뒹굴어 줄 하이에나가 필요했다.
그녀는 작가로서의 모든 재능을, 이 거짓의 서사를 창조하는 데 쏟아부었다.
그녀는,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뒤섞었다.
아니 등장인물의 이름 빼고는 모두가 다 거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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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보] ‘카산드라’ 차지원의 감춰진 진실: 그녀는 예언자인가, 희대의 사기꾼인가?
1. 사건의 개요: 위대한 학자의 아이디어를 훔친 제자
차지원은 박사 학위 시절, 자신의 지도 교수였던 노진석 교수의 핵심 연구 아이디어를 도용하여 자신의 박사 논문을 작성함. 이는 학계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지적 살인 행위임.
2. 은폐된 진실: 폭로와 역공작
노진석 교수가 이 사실을 발견하고 조용히 문제를 제기하자, 차지원은 오히려 ‘교수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소리치며, 학과 전체를 뒤흔드는 스캔들을 만듦. 이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한, 전형적인 ‘피해자 코스프레’이자 ‘역공작’이었음.
당시 동료 대학원생들은, 그녀의 이런 공격적인 행동에 모두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함. (증거자료 #1: 익명 커뮤니티 게시글 캡처)
결국 학교 측은, 스캔들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피해자인 노진석 교수의 입을 막고, 가해자인 차지원의 요구대로 지도 교수를 교체해 주는 것으로 사건을 서둘러 무마함.
3. 결정적 증거: 표절 비교 분석
노진석 교수가 차지원의 논문보다 앞서 발표했던 연구 계획서와, 이후 발표된 차지원의 박사 논문 사이에는, 다음과 같이 명백한 표절의 흔적이 발견됨. (증거자료 #2: 주요 문장 및 개념 비교 분석표)
4. 결론: 그녀는 지금,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다.
차지원은 과거에도, 타인의 지적 재산을 훔치고, 오히려 큰소리를 쳐서 자신의 명예를 쌓았던 전력이 있는 인물임.
따라서 그녀가 현재 ‘미래 설계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 역시, 자신이 과거에 썼던 소설을 이용해 사회적 명성을 얻으려는, 또 다른 종류의 ‘지적 사기극’일 가능성이 높음. 그녀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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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은, 자신이 창조해 낸 이 완벽한 거짓의 서사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녀는 스스로의 재능에 감탄했다.
이것은, 그 어떤 진실보다도 더 그럴듯했다.
이 문건을 손에 넣은 빅터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어떤 목소리로 방송을 할지,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그녀는 이 모든 자료를, 하나의 압축 파일로 묶었다.
그리고 파일의 제목을, ‘카산드라_진실’이라고 저장했다.
이것은 그녀가, 차지원의 무덤 위에 세워줄, 아름다운 비석의 이름이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가 남았다.
이 무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발사해 줄 발사수를 준비시키는 것.
그녀는 ‘클로이’의 스마트폰을 들어, 김민준에게 다시 한번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아직, 그에게서 얻어낼 것이 더 남아 있었다.
그녀는, 이 거짓의 서사에, 피해자의 목소리라는 마지막 화룡점정을 찍어야 했다.
[민준 씨.지난밤, 정말 즐거웠어요.
그리고… 당신의 아내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밤새 잠을 설쳤습니다.
그녀와 같은 위대한 영혼이, 더 이상 상처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혹시, 제가 그녀를 도울 방법이 없을까요.
예를 들어, 그녀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그녀가 얼마나 순수하고 정직한 사람인지를 알려줄, 그런 방법 말이에요.]
그녀의 문자는, 천사의 속삭임처럼 달콤했다.
답장은, 십 분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클로이 씨… 당신은, 정말…
어떻게 그런 생각을.
저야말로, 당신께 무언가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지원이, 그녀가 얼마나 순수한 사람인지.
그녀가 대학원 시절, 그 끔찍한 일을 겪고 나서 썼던, 그녀의 일기장이 있습니다.
그걸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이수연의 심장이, 차갑게 뛰었다.
일기장.
그것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최고의 수확이었다.
그녀는 차지원의 가장 내밀한 고통의 기록을, 그녀의 심장을 꿰뚫을 가장 날카로운 비수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녀는 즉시 답장을 보냈다.
[꼭… 보고 싶군요.
그녀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요.
오늘 저녁, 당신의 작업실로 찾아가도 될까요?]
답장은 몇 분 뒤에 도착했다.
그 몇 분의 시간 동안, 김민준이 느꼈을 자존심의 상처와 망설임을, 이수연은 정확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의 답장은, 그의 초라한 현실에 대한 변명과,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은 절박함이 어색하게 뒤섞여 있었다.
[아, 제가 개인 작업실은 아직 따로 없습니다.
대신 제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작은 학원이 있는데, 지금은 수업이 다 끝나서 아무도 없습니다.
조용히 이야기 나누기에는 더 좋을지도 모릅니다]
괜찮으시다면, 그곳으로 오시겠어요?
이수연은 그의 문자를 읽으며, 입가에 떠오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그의 이 부끄러운 고백이야말로, 그가 완전히 자신의 손안에 들어왔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그녀는 자비로운 여신처럼, 그의 초라한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네. 좋습니다.
오히려 그런 곳이, 작가님의 진솔한 모습을 뵐 수 있는 더 좋은 장소일 것 같네요.
주소 보내주세요.]
모든 것이, 그녀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익명 이메일 계정을 통해, 빅터에게 ‘카산드라_진실’이라는 제목의 파일을 전송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할 준비를 했다.
수업이 끝난 늦은 밤의 미술학원.
그녀의 마지막 사냥터.
그녀는 옷장 앞에서, 오늘 저녁 입고 나갈 옷을 골랐다.
오늘은, 갤러리에서 입었던 것보다, 조금 더 부드럽고, 조금 더 연약해 보이는 옷을 입어야 했다.
낡고 고단한 현실에 지친 남자를 위로하는, 따뜻하고 자비로운 여신의 모습으로.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 위로, 다시 ‘클로이’라는 이름의 완벽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날카로운 무기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무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4. 진짜 적들의 경고 (이수연, 정체불명의 세력으로부터 첫 번째 위협을 받다)
그날 저녁, 을지로 오피스텔의 공기는, 폭풍 전의 고요함처럼 팽팽했다.
이수연은 자신의 관제탑, 여러 개의 모니터가 반원형으로 그녀를 둘러싼 그 자리에서, 자신이 일으킨 폭풍이 세상을 어떻게 뒤흔들고 있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계산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가 익명으로 빅터에게 던져준 ‘카산드라_진실’이라는 이름의 파일은, 예상대로, 디지털 세상에 핵폭탄처럼 터져 나갔다.
빅터는, 마치 신의 계시라도 받은 광신도처럼, 그 파일을 기반으로 한 시간짜리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방송의 제목은, {충격 단독! 예언자 카산드라, 그녀는 사실 희대의 표절범이었다!’였다.}
방송의 파급력은, 이수연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어제까지 차지원을 ‘배신한 영웅’이라 부르며 비난하던 대중은, 이제 그녀를 ‘모든 것을 훔친 사기꾼’이라며 저주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마지막 남은 학자로서의 명예는, 빅터의 선동적인 방송과, 이수연이 교묘하게 짜깁기한 ‘증거’들 앞에서,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었다.
차지원은, 이제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강태준이 내렸던 첫 번째 임무, ‘차지원을 대중의 시야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라’는 임무는, 이제 거의 완벽하게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이수연은 자신의 손으로, 한 인간의 사회적 생명을 거의 끝장냈다는 사실에,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계획이 이토록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차가운 만족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강태준이라는 분노한 왕에게, 자신의 유용성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인 것이다.
그녀는 생존을 위한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저녁 8시.
한 시간 뒤면, 김민준을 그의 미술학원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었다.
오늘 밤, 그녀는 그의 아내가 겪었던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이 담긴 ‘일기장’을 손에 넣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 지긋지긋한 싸움의 마침표를 찍을 생각이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때였다.
‘툭.’
아주 작고, 건조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오피스텔 전체가 암흑에 휩싸였다.
정전이었다.
모니터들의 푸른빛이 일제히 사라지고, 그녀의 귀를 채우고 있던 컴퓨터 팬의 낮은 소음도, 미니멀한 전자음악도,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멈춰 섰다.
오직, 창밖에서 스며들어오는 도시의 희미한 불빛만이, 방 안의 사물들을 유령처럼 비추고 있었다.
이수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온몸의 신경이, 순식간에 날카로운 바늘처럼 곤두섰다.
이 건물은, 낡았지만, 상업용 빌딩이라 전력 공급이 끊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정전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먹통이었다.
서비스 지역이 아니라는, 건조한 문구만이 화면에 떠 있었다.
통신까지, 완벽하게 차단된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외부로부터의 침입 신호였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현관문 쪽에서, 어떤 소리라도 들려오는지.
하지만 오피스텔 안은, 무덤 속처럼 고요했다.
그녀는 책상 서랍을 열어, 그 안에서 작고 단단한 호신용 가스총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심장은, 두려움이 아니라, 차가운 분노로 뛰고 있었다.
'강태준인가.
아니면, 원로 그룹인가.
누가 감히, 자신의 성역을 침범한 것인가.'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서, 검게 변했던 모니터 중 가장 중앙에 있던 것 하나가, ‘픽’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켜졌다.
하지만 원래의 윈도우 바탕화면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1980년대의 낡은 컴퓨터처럼, 검은색 화면에 오직 하얀색 텍스트만이 나타나는, 도스(DOS) 창과도 같은 화면이었다.
화면의 가장 위쪽에서, 하얀색 커서가, 일정한 속도로, 그녀의 심장 박동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이수연은 가스총을 쥔 채, 천천히, 책상으로 다가갔다.
이것은 물리적인 침입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녀가 구축한 완벽한 디지털 요새의 방화벽을, 종잇장처럼 찢고 들어온, 유령의 방문이었다.
잠시 뒤, 깜빡이던 커서 아래로, 첫 번째 문장이 타자 치듯 나타났다.
소리도 없이, 한 글자씩.
이수연 기자.
그녀는 숨을 멈췄다.
상대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을지로 708호. 보안 시스템이 허술하군.
그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상대는,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자신이 누구든, 이 게임의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되었다.
"누구지? 강태준이 보낸 시험인가, 아니면 내가 공격하고 있는 '원로 그룹'이 보낸 반격인가?"
그녀는 상대를, 자신이 아는 체스판 위의 말 중 하나로 규정하려 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녀의 그 작은 세계를 비웃고 있었다.
강태준? 원로?
너희 정치인들의 유치한 싸움에는 관심 없다.
이수연의 뇌가, 순간 정지했다.
강태준의 적도, 원로 그룹의 적도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녀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송진우 회장.
그리고 그 이름 뒤에 숨겨진, 진짜 괴물들.
어젯밤, 삼청동 와인 바는 즐거웠나?
김민준 화가는, 아주 유용한 자산이지.
공포가, 그녀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녀의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가면을, 그리고 가면 뒤의 진짜 얼굴까지도.
그녀의 손가락이, 간신히 다음 질문을 타이핑했다.
원하는 게 뭐예요?
답변은, 즉각적이었다.
그것은 요구가 아니었다.
명령이었다.
화성 퓨처시티.
그 이름을, 다시는 입에 올리지 마라.
네가 시작한 불장난이, 우리가 잠든 숲을 태우려 하고 있다.
숲 전체가 타버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지금 당장 그 성냥을 꺼라.
이수연은, 그 문장이 가진 서늘한 무게감을 이해했다.
그녀가 ‘미래 설계자들’이라는 허구의 적을 만들어 벌인 이 모든 소동을, 그들은 그저 ‘불장난’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벌이는 이 체스 게임을, 그들은 거인의 발치에서 벌어지는 개미들의 싸움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신들이 누구든, 이 판은 이미 내 손을 떠났어요.
멈출 수 없어요.
그녀는 마지막 자존심처럼, 그렇게 타이핑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녀의 그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착각하지 마라, 이수연.
우리는, 강태준처럼 사람을 ‘제거’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삭제’한다.
너의 모든 주민 기록, 너의 모든 학력 기록, 너의 모든 기사들, 너의 모든 은행 계좌.
그리고, 너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까지도.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살해 협박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말소(抹消)에 대한 예고였다.
한 인간을, 이 세상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릴 수 있다는, 신의 영역에서나 가능한, 그런 종류의 힘에 대한 과시였다.
이수연은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모든 전략과, 모든 지성과, 모든 용기가, 이 절대적인 힘 앞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먼지가 되어버렸다.
화면 속의 커서가, 잠시 동안 깜빡였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다.
그 문장을 끝으로, 화면의 모든 글자가, 검은 물속으로 잉크가 번지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뒤.
‘툭.’
오피스텔의 모든 조명이, 다시 들어왔다.
컴퓨터 모니터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재부팅을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치, 지난 10분간의 모든 일이, 그녀가 꾼 끔찍한 악몽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이수연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악몽이 아니었다.
그녀는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이 세계의 진짜 구조를 보았다.
자신과 강태준이 싸우던 그 무대는, 사실 더 거대한 연극 무대 위에 놓인, 작은 소품에 불과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연극의 주인공은커녕, 언제든 무대감독의 손에 의해 치워질 수 있는, 이름 없는 엑스트라에 불과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거대한 딜레마에 빠졌다.
강태준은, 차지원을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그녀는 강태준에게 제거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체불명의 ‘진짜 적들’은, 이 판 자체를 멈추라고 경고했다.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녀는 ‘삭제’될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도 죽음.
멈춰 서도 죽음.
사방이, 절벽이었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김민준을 만나러 가야 할 시간.
그녀의 첫 번째 본능은, 모든 것을 취소하고, 이 벙커 안에 숨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숨는 것은, 답이 아니었다.
숨는 것은, 강태준에게는 ‘반항’으로, 저들에게는 ‘무시’로 읽힐 것이다.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이 절벽 위에서, 가장 아슬아슬한 외줄을 타는 것뿐이었다.
강태준의 명령을 수행하는 척하며, 동시에 저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것.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도해야만 했다.
이수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흔들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화장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공포에 질린 한 여자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얼굴을, 증오스럽다는 듯이 노려보았다.
그리고 명령했다.
‘다시, 클로이가 되어야 해.’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진짜 얼굴을, 완벽한 가면 뒤에 숨기기 위해.
하지만 오늘 밤, 그녀의 그 가면은, 이전처럼 단단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이제, 가면 뒤에서, 혼자 떨고 있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클러치 백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오피스텔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김민준을 만나러.
자신의 마지막 사냥터로.
그녀는, 자신이 지금, 왕과 신, 그 두 개의 거대한 존재 사이에서, 자신의 목숨을 건, 가장 위험한 춤을 추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