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방갈로의 노래 4
작년 10월 여름으로 들어서며, 피터의 농장은 분주해졌다. 매년 인근도시에서 열리는 폴로대회 때문이다.
피터의 목장엔 폴로선수들이 위탁해 놓은 말들이 많았고, 그들은 2주마다 모여 폴로 연습게임을 하곤 하였다. 그리고 다음 주에 있을 경기로 선수들과 말 관리사들은 물론이고 농장의 누구 하나라도 바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농장 매니저인 사라는 폴로선수들과 색깔을 맞춘 앞가슴에 STAFF라고 크게 쓰인 폴로셔츠를 내게도 내밀었다. 가급적 대회당일에는 피터의 폴로클럽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는 피터의 지시 때문이라 했다. 나도 할 수 없이 그 셔츠를 입어야 했고, 대회 사흘 전, 말들의 컨디션을 고려하여 대회가 치러질 목장에 말들을 미리 데려다 놓는 일을 도왔다.
말들은 조련사와 관리사 그리고 선수들의 임무였고, 아무라도 할 수 있지만, 누구라도 하고 싶지 않은 잡일은 모두 내 차지였다.
대회 당일엔 다른 팀들이 경기를 하는 동안 마구간에서 쉬고 있는 선수들의 말들을 지켜보는 임무가 내게 떨어졌다. 아주 오래전엔 경쟁 팀의 방해로 경기를 망치는 일이 있은 후에는 말들을 지키는 임무 또한 중요하다고 피터가 내게 직접 내린 명이었다. 지금은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영국의 왕세자들이 그 경기에 자기 팀을 데리고 자주 참석을 했었다는 말을 들으니, 그 폴로대회가 더없이 중요하게 느껴졌고, 마구간을 지켜야 하는 나의 임무 또한 막중하게 다가왔다.
나는 그 마구간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후에나 있을 피터 팀의 경기까지는 세 시간도 더 남았지만, 나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새벽에 일찍 움직인 탓에 아침도 거른 상태였고, 점심시간을 지나 오후에 접어들자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들었다. 가지고 있는 무전기로 팀의 누군가를 불러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왠지 그렇게 하면 나의 임무를 다 해내지 못한 거란 생각이 들어 무전기는 그냥 허리춤에서 대롱거릴 뿐이었다. 그때였다.
내가 입고 있는 같은 색의 팀복을 입은 누군가가 마구간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를 따라 그의 등 뒤로 햇빛이 강하게 같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눈을 잔뜩 찡그려야 했고, 그의 얼굴을 잘 볼 수가 없었다.... 그의 앞가슴엔 STAFF라는 글자가 없는 것으로 봐선 그는 피터의 폴로선수 중 하나일 거란 예상만 할 수 있었다.. 그는 내게 다가와서 그의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게 내밀었다. 누런 종이에 싸인 햄 샌드위치였다. 그리고 따듯한 커피.
" 받아요.. 먹을만할 거예요"
나는 그것들을 건네어 받으며 피터나 사라가 나를 위해 음식을 보낸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여기 잠깐 있을게요. 원한다면 잠깐 나가서 편한 곳에서 먹고 와도 좋아요"
나는 괜찮다, 고맙다 했다.
"나는 폴이에요"
나의 이름을 듣기라도 하려는 듯 그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다시 무슨 말을 할 듯 머뭇거리다 그는 마구간을 떠났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말들이 경기를 치르기 위해 마구간을 나간 후, 매니저 사라가 이제 가서 식사를 하고 오라고 했을 때 나는 사라에게 샌드위치를 보내지 않았느냐 물었지만 뚱한 사라는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경기 중 혹시 있을 페어체인지(교체)를 위한 말들도 몸을 풀기 위해 조련사들이 밖으로 데리고 나간 덕분에 나도 피터 팀이 치르는 경기를 관전할 수 있었다. 평소 침착하고 순한 말들인데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말에 올라탄 선수들의 고삐의 당김과, 발차기 그리고 신호에 따라 날쌔게 몸을 움직이고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며 달릴 때마다 매끈하고 두툼한 근육들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나는 곁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 사라에게 물었다.
"폴이 누구예요?"
사라는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엉켜 있는 선수들을 가리켰다. 재차 묻던 나에게 사라는
" 저기 멋진 사람!! ( nice one!!)"
이라고 했지만 나는 결코 누구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 내 앞에 앉아있다.
이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춥지 안 나요?.."
라며 그가 물었다.
그러자 스몬은 나를 바라보며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는다.
"오,, 이를 어째요.."
나는 얼른 나의 몸을 보았고 다시 빠르게 거울로 만들어진 바의 벽을 보았다. 어둡기는 했어도 나의 몸에선 아지랑이가 피고 있었다. 비에 젖은 옷을 따듯한 키오스크가 말리고 있었던 것이다.
"올라가서 옷을 갈아입어요. 그러다가 감기 들겠어요."
폴이 말했다.
"괜찮아요. 이제 곧 집에 가면 돼요"
그러자 폴은 내게로 몸을 완전히 돌려 앉으며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아까 당신 차가 지나는 걸 봤어요. 그리고 당신 차가 지나고 잠시 후에 나무 하나가 길 위로 쓰러져 버렸어요. 크기가 큰 놈이라 내가 당장 치울 수는 없고 사람들을 불러 치워야 할 겁니다. 그러니 당신은 오늘 집에 못 간답니다."
그의 말을 듣자 집주인인 데비의 집에서 놀고 있을 아이들 생각에 가슴이 턱 막혔다. 가끔 옆집인 주인집에서 잠을 잔적은 있어도 아이들과 떨어져서 지내본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준비도 없이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경솔했던 내 자신이 너무도 싫고 원망스러웠다.
집주인 데비와 레오 부부는 우리에게 지낼 수 있는 집을 빌려 주었고, 내가 일을 나가야 하는 날에는 우리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 오는 일까지도 해주어 내가 수월하게 일을 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시집간 딸이 있었고, 그 딸이 사정상 잠시 친정인 데비 부부의 집에서 살게 되면서, 데리고 온 손자와 우리 아이들이 친구가 되어 잘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오히려 내게 고맙다 하던, 내게는 은인 같은 사람들이다.
내일 날이 밝으면 여기서 나갈 수 있게 해 줄 수 있지만, 이렇게 폭우가 내리는 밤에는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폴은 말한다. 나는 데비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전화기를 들었다.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나는 눈물이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데비는 이런 일쯤은 몇 번이라도 겪어본 사람처럼 태연하게 이해해 주었고, 오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지 못하던 내게 아이들은 너무도 잘 놀고 있고, 오늘이 아니어도 아이들은 가끔 자신의 손자와 그 집에서 놀다가 잠을 자기도 하지 않았냐며 오히려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리고 큰 아이의 목소리가 수화기 속에서 흘러나왔다.
"엄마 괜찮아요?'
아홉 살 아이가 어른처럼 묻던 그 첫마디에 나는 거의 울 뻔했다. 하지만 차마 울 수는 없어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
" 엄마는 괜찮아. 여기 산에 들어왔는데 나무가 길을 막고 있어서 오늘은 엄마가 집에 못 가. 너희들 괜찮겠어?"
"그럼요. 우리는 재미있게 놀고 있어요. 이따 밤에 데비가 만화영화도 보여 준댔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는 신나 있었고, 수화기 뒤쪽에서 들리는 우리 작은 아이와 데비의 손자가 들떠 노는 소리로 나의 마음은 조금 가라앉을 수 있었다.
아이들과 통화를 마치고 나니 그 사이 폴과 스몬은 커다란 파란색 아키아 가방에 뭔가를 가득 담아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자.. 나를 따라 올라와요.."
폴이 앞장섰다.
폴이 키오스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스몬의 미소를 한 번 더 바라본 후 그를 따라나섰다.
날은 완전히 어둑해져 있었고, 마당에 꽂아 놓은 흐리멍텅한 LED 불빛으로 아까보다도 더 굵은 빗줄기가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만큼이나 흐리멍텅한 불빛이었다. 생각 없이 경거망동했던 사람이 죄를 지어 갇힌 기분이 들었고, 감옥에 갇히기 위해 지금 교도관을 따라가는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