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인생의 챔피언
엄마의 권유로 난 재수생이 되었다.
그리고 “지방보다 서울에서 공부해보는 게 좋겠다”는 말에,
처음으로 혼자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엄마는 그때, 아빠를 보내고 나를 또 한 번 보내는 기분이었겠지.
그 외로움이 얼마나 컸을지,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도 더
아빠를 보내지 못한 채였다.
그러니 엄마의 감정까지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남편이 없지만
‘날 제대로 키워보겠다’는 엄마의 그 마음이
내겐 부담이었을까?
아님, 어쩌면 사랑이었을 그 마음조차,간절함조차
나는 외면했다.
아니, 보고 싶지도, 느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 내려놓고 싶었다.
엄마에게서도, 나 자신에게서도.
아빠를 잃고 버거워하던 가족들의 그늘 아래에서도
그냥 벗어나고 싶었나 보다.
또, 나는 재수한다는 사실을 숨겼다.
혹여 친가 식구들의 입에 오르내릴까 봐.
‘그럴 줄 알았다.
내 동생 잡아먹은 독한것,
난다 긴다 하더니 대학 떨어졌다며?’
그 말이 두려웠다.
그래서 죽은사람처럼 조용히,
어딘가 쫓기듯 살았다.
그렇게 지내던 중, 큰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어디야.”
“그냥... 밖이에요.”
“너 어디냐고!”
“뭐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뭐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너 설마 재수하냐?”
“...네.”
“야! 니가 집안의 첫째면 생각이 있으면, 돈 까먹는 게 아니라
몸이라도 팔아서 니 동생 공부시킬 생각을 해야지.
어린 게 욕심만 덕지덕지 붙어선.”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난 울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나는 공부도 사치인 사람이구나.'
그저 깨달았다.
차마 이 사실은 엄마에게 대못 박는 이야기라
말할 수 없었다.
속으로 합리화를 하며 삭히기 시작했다.
한글자들을, 그 한마디 들을.
처음엔 큰아빠도 많이 속상했겠지.
동생을 그렇게 보낸 게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그래서 그랬을 거라 생각하려 했다.
그치만 아무리 내 상식으로 이해하려 해도
이상한 배신감이 치고 올라왔다.
아빠가 있을 땐
“딸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너 큰아빠 딸 하자”
그렇게 말하던 사람이,
어떻게 한순간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
또 어떤 날엔,
온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서 문득 튀어나온 생각이었다.
거기 있는 사람들 중,
'아빠 없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 순간, 다시 또
“왜 나뿐이야?”
그 생각이 꼬리를 물고, 결국 ‘쿵’ 하고 떨어졌다.
억울함도 있었지만,
그땐 서러움이 더 컸다.
어떤 노래를 들어도 신나지 않던 때가 있었다.
모든 음악이 그저 소음처럼 흘러가던 어느 날,
이어폰 속에서 흘러나온 리쌍의 ‘챔피언’을 들었다.
돌처럼 강했던 사람,
파도처럼 거침없었던 사람.
살아가는 매 순간이 도전이었던 사람.
내일을 위해 오늘을 바치며
마지막 까지 싸워준
내 마음속 영원한 챔피언
그 노래의 가사 모든 구절들이
마치 생전의 아빠를 그대로 묘사했다.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솟구치는 눈물을 쏟아낼수밖에 없었다.
그간 참았고, 삭혀두었던 말을 내뱉었다.
'정말 보고싶다.'
정말 보고싶지만 내 더이상 볼수없던 사람.
그날 이후,
난, 그 노래를 종종 듣는다.
아빠가 내게 들려준 마지막 응원가처럼.
괜한 위로가 필요할때 즈음이면.
참 많이 보고싶어질때 즈음이면.
아빠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면
“네, --- 입니다. ”
아빠의 목소리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게 위안이 되었고,
나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처음엔 분명 생생했던 아빠의 목소리가
언제부터인가 수십 번, 수백 번을 걸어 들어도
점점 희미해져갔다.
그게 너무 괴로웠다.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데,
자꾸 잊혀진다는 사실이 고통스럽기도 하고,
내가 너무 미웠다.
어느 날은 그 번호로 전화를 걸고
주절주절 이야기를 했다.
혼잣말처럼, 하소연도 하고,
“그래, 그럼 되지 뭐.”
말하다가 스스로 위안을 얻기도 했다.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편지처럼.
나만의 대나무 숲에 외치는것 처럼.
요즘 아빠의 전화기로 전화를 걸면,
전화기 속의 아빠 목소리가 더는 나오지 않는다.
그치만 나는 여전히 잔잔하게 ,
마음속으로 아빠에게 말을 건다.
“아빠, 나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 서 있어.
괜찮은 척 지내보는데. 나 안 괜찮아.
근데 그냥 살아내는 중이야.
그러다 보면.
언젠가 괜찮아질 수 있을까?
감히,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라도 꺼내지 않으면
나는 내가 아빠를 정말 잊어버릴까 봐.
그래서 또다시, 조심스레 이 기억들을 꺼내본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이런 이별도 있다고,
물론 아프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준비 되지 못한 이별이지만,
그저 나쁘고 아픈 이별만은 아니었다고,
때론 잘 보내게 될수도 있는 이별이라고.
감히, 그런 이야기를 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