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로 정중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담 내용이 녹음되어 외부로 넘어갔다는 주장이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안내에 따라 기록은 되지만, 외부로 유출될 일은 전혀 없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그는 믿지 않았다. 말은 오갔지만, 대화는 닫혀 있었다.
며칠 뒤에도 같은 전화가 반복되었다. 담당 직원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30분 넘게 통화를 이어갔다. 나에게도 비슷한 전화가 걸려왔고, 대화는 늘 같은 자리로 되돌아갔다. 설명은 벽을 더 높였고, 친절마저 의심으로 돌아왔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귓가엔 그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확인해 보니 그는 이미 정신건강복지센터에 등록된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또박또박, 논리정연했지만, 상대의 말을 늘 불리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설명할수록 의심이 깊어졌던 것이다.
20년 전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대학생이 병원 입원 거부를 문제 삼으며 연일 민원을 제기했다. 서류는 부처와 청와대를 거쳐 다시 우리 부서로 돌아왔다. 결국 감사까지 받았지만, 나의 처리가 적절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억울함보다 더 크게 남은 건 소모감이었다. 몇 년 뒤, 다른 사안으로 그 청년의 이름을 다시 보았다. 여전히 꼼꼼했지만, 그의 지적 덕분에 사업을 개선할 수 있었다. 같은 방식의 집착이 때로는 도움이 되기도 하는 셈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뚜렷한 환청이나 환각은 드물고, 말도 또렷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신중하고 쉽게 의심한다. 직장 동료나 이웃, 반복 민원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장 어려운 점은 스스로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움을 청하지 않기에, 주변에서도 손을 내밀 기회를 잡기 어렵다.
민원을 처리하다 보면 끝없는 불신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설명이 거듭될수록 말이 닿지 않는 거리감은 깊어진다. 퇴근 후에도 머릿속을 맴도는 목소리, 부재중 전화 알림 하나에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낀 적이 있다. 하지만 문득 생각한다. 그들도 늘 지쳐 있지 않을까. 세상을 의심하며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삶이 얼마나 고단할까.
오래전,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이 들어선다는 이유로 학부모들이 민원을 제기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그런 사람들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니요.” 그 말 속에는 뿌리 깊은 두려움이 드러나 있었다. 병보다 낙인을 더 두려워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치료를 시작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들의 불신은 결국 우리가 만든 벽이기도 하다.
진실과 망상의 경계는 생각보다 흐릿하다. 내가 만난 이들의 말 속에도 일정한 진실이 있었다. 문제는 받아들이는 정도의 차이였다. 그래서 이제는 설득하려 애쓰지 않는다. 다만 끝까지 들어준다. “많이 힘드셨겠네요”라는 한마디가 긴 설명보다 나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전화벨이 울리면 잠시 숨을 고른다. 여전히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그 속에서 그들이 전하려는 두려움과 고립을 읽어내려 한다. 닿지 않는 말이지만, 그 말마저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