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용서하기 전에, 먼저 나를 위로 한다.
아버지는 술을 잘 삭이지 못했다. 저녁에 소주 반 병만 마셔도 집 안은 곧 불안으로 뒤덮였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표정이 굳으면서, 평소 과묵하던 아버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변화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어린 자식들은 숨을 죽인 채 그 순간을 견뎌야 했다.
1980년대 초반, 부산 남구 용호동의 단칸방은 여섯 식구에게 안식처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신 날이면 우리는 집 밖으로 나가야 했다. 불 꺼진 구멍가게 앞 평상에 앉거나, 공터 나무 밑에서 밤을 지샜다. 이튿날 아버지는 사이다 한 병을 사오라 시키고 하루 종일 누워 있다가, 그 다음날이면 다시 술을 찾았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나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를 선택했다. 집과 아버지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밤마다 쌓이는 울분과 분노가 나를 갉아먹는 것이 싫었다. 집을 떠나는 일은 도피였지만, 동시에 나를 지키는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선택은 내가 처음으로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린 결단’이었다.
아버지는 울진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자랐다. 공부도 곧잘 해 또래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준비 없이 시작한 사업들이 잇달아 실패하며, 선대가 물려준 땅을 모두 잃었다. 결국 가족은 야반도주하듯 부산으로 내려왔다. 하룻밤 사이, 아버지는 부잣집 도련님에서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그의 잘못은 없었지만, 삶의 궤도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친구들이 제자리를 찾아갈 때, 아버지는 세상의 뒤편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날 선 마음을 품은 사람에게 술은 마지막 도피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술에 취해 터져 나온 분노는 세상이 아닌 가족을 향했고, 그 화살을 우리는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모든 것을 잃고 낯선 땅에서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그는 얼마나 고단했을까.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채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던 그 시간은, 분명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이 가족에게 전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먼저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이해와 용인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지금 아버지는 더 이상 그런 밤을 만들지 않는다. 관상동맥 협착으로 긴 수술을 받은 뒤, 늙고 수척해진 모습으로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 병이 그의 분노를 가져가고, 대신 평온을 남긴 듯하다.
결혼 초, 아내는 여전히 이어지던 아버지의 술주정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친정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고, 맞벌이 부부였던 우리는 아이들을 낮 동안 본가에 맡겼기에, 그런 환경에 아이들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내를 불안하게 했다. 나는 미안함을 숨기지 못했고, 설명할 수도 감쌀 수도 없는 부끄러움을 오래 간직해야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직접 묻지 않았다. 왜 그토록 힘들었는지, 왜 술을 붙잡았는지. 솔직히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제는 묻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원망을 간직하며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살아가다 보면, 말로 풀어야 할 것들이 있지만, 말 없이도 풀리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아버지가 남긴 상처는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나는 그 시절의 밤을 잊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상처를 지우려 하지 않고, 상처와 함께 걷는 법을 익혀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되었다. 완전한 용서나 화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세월이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조금씩 맥락을 보이게 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상처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 상처는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판단을 서두르지 않는 사람이 되게 했다.
아픈 기억을 품은 채 살아가지만, 나는 여전히 아버지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려 한다. 그것은 아버지를 향한 용서라기보다, 어린 시절의 나를 어루만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