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틈에서 배운 것들

깨져야 할 것은 내 안의 안일함이었다.

by 박계장

망치가 나무상자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구청 뒤편 공터에 울렸다. 열다섯 대의 오락기를 산산조각 내는 동안, 나는 법을 집행하는 공무원이라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망치질 하나하나가 내 통장 잔고를 깎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1998년 가을이었다. IMF 구제금융의 여파로 아버지의 식료품점이 문을 닫았고, 아버지의 빚을 떠안은 나는 신혼집을 팔았다. 대출을 끼고 어렵게 장만한 집이 하룻밤 사이에 남의 손으로 넘어갔다. 집을 판 돈으로 빚을 갚고 임대보증금을 내고 나니, 통장에는 얼마간의 돈이 남았다. 그 돈만큼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해 9월, 보건소에서 구청 환경위생과로 발령이 났다. 전자오락실 인허가와 식품진흥기금 관리가 내 업무가 되었다. 전임자는 사무실 한구석에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우리 하는 일이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것 같아."


공직 5년차였지만 구청 업무는 처음이었다. 그의 경고는 귀에 들어왔다가 금세 빠져나갔다.


얼마 후 문구점 앞에 작은 오락기들을 놓고 영업한다는 민원이 접수되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전임자에게 물었다.


"불법 오락기는 압류해서 바로 파쇄하면 돼."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공익근무요원 셋을 데리고 나가 오락기를 트럭에 실어 왔다. 구청 뒤편 공터에서 망치를 들었다. 모니터와 전자기판을 감싼 합판이 깨어지고 플라스틱 부품들이 흩어지는 소리가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열다섯 대를 부수는 과정을 시간순으로 사진에 담았다. 그날 나는 업무를 제대로 해냈다는 뿌듯함으로 가득했다.


일주일쯤 지나 경찰서에서 공문이 왔다. 무신고 영업으로 고발한 사안에 대해 해당 오락기들은 '자동판매기'로 분류되므로 불기소 의견으로 송치한다는 내용이었다. 백 원을 넣으면 십 원어치 껌이 나오고, 그다음에야 게임을 할 수 있는 구조였다. 겉으로는 물품을 판매하는 자동판매기의 형식을 갖추었으니 불법 오락기라 단정하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업자들은 이 허점을 파고들었다. 아이들은 껌 한 조각에는 관심이 없었다. 진짜 목적은 뒤따르는 게임이었지만, 법 조항은 껌을 내놓는 기계라는 형식에 발목이 잡혔다. 지금까지 이런 껌오락기를 자동판매기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내가 산산조각 낸 오락기들은 순식간에 '불법기기'에서 '합법 판매기'로 둔갑해 버렸다.


검찰에서도 공문이 왔다. 무혐의 처분하니 압류물을 환부하라는 내용이었다. 이미 파쇄된 기계를 어떻게 돌려주라는 말인가. 압류물은 검찰 지휘 아래 처리해야 한다는 기본 절차를 누구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알려주지 않았다 해도 나는 알고 있어야 했다.


오락기 주인이 구청으로 찾아왔다. 그는 내가 절차를 어겼고 돌려줄 물건이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계장은 승진을 앞두고 있었고, 조용한 합의를 원했다. 나 역시 매일 찾아오는 그를 상대하는 데 지쳐 있었다.


"얼마나 드릴까요?"


그가 부른 기계값은 실제 시장가보다 3배는 많아 보였지만, 그 기계를 다시 구할 방법이 없으니 사실상 부르는 게 값이었다.


내 봉급 서너 달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계장이 일부를 보태주고, 동료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돈을 합쳐 겨우 합의했다. 결국 은행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예금까지 그날 모두 사라졌다.


그 돈이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IMF로 신혼집을 팔던 때의 허망함이 다시 밀려왔다. 가진 것이 하나둘 줄어드는 동안 마음도 점점 메말라 갔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달라졌다. 어떤 업무든 남의 말만 믿고 처리하지 않았다. 법령집을 직접 펼쳐 조항 하나하나를 확인했고, 선례를 뒤져가며 규정을 살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사건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삶이 얼마나 허술한 틈에서 무너지는지를 보여준 경고였다. 작은 오락기 열다섯 대가 내 가정의 기둥을 흔들었듯, 한 번의 안일함이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 있었다. 그때는 절망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알게 되었다. 그 경험이 내 삶을 떠받치는 또 하나의 기둥이 되었다는 것을.


망치로 오락기를 부수던 그 오후의 나는 몰랐다. 진짜 깨져야 할 것은 나무상자가 아니라 내 안의 안일함이었다는 것을. 잃음은 때로 앞으로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내 안에 살아 있어, 중요한 선택 앞에 설 때마다 나를 한 번 더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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