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작가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작가
이번에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며 나의 아빠에 대한 시간으로 흘러들어 갔다. 울 아빠는 1.4 후퇴 때 친할아버지와 고모들. 큰아빠랑 내려왔다고 했다. 친할머니가 아빠 10살쯤 돌아가셔서 키워주신 큰 형수 조카들 친척들 놔두고
아주 잠깐 피난 갔다 온다고 하고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시지 못했다.
아빠는 푸르른 나이 20살이었다고.
내가 본 아빠는 코발트블루 그 색깔 자체였다. 아빠는 20년 전 돌아가셨다. 심근경색으로 병원 입원하시고 수술하신 직후 침대에서 "힘들구나 "라고 하셨다. 그때 얼굴 보고 아이들과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려 한다고 빨리 오라고 했다"가보니 돌아가셔서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했다.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아버지 십팔번이었다. 그 말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이리 아름답다. 진작 아버지 말 들을 걸 그랬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다른 사람에게 절대 폐 끼치지 않는다. "
울 아빠가 자주 들려주던 말씀이었다. 평생의 깨끗함과 정직의 신념으로 사셨다.
아빠의 기준에 힘들어하는 딸이었다.. 흩트러진 머리 보면 "미추괭이 " 덜렁 놓고 오면 "덜러깨비"등
이북 평양 사투리로 놀리시곤 하셨다. 그 칼칼함 속에 아빠 특유의 유머가 있으셨다.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치는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아직 도허우적 거리는 중이다
아빠 돌아가실 때 즈음 사이가 그냥 냉랭했었다. 그런데
급작스런 아빠의 돌아가심이 나도 엄마도 언니들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산산이 유리가 박힌 듯했다.
나의 아빠를 한 청년, 남편, 세 딸의 아버지로 이해하기 시작한 건 장례식부터였다는 생각이 든다. 철없던 나에게 아빠의 죽음은 사막 한가운데로 데려간 느낌이었다.
코발트블루였던 아빠에게 하늘하늘한 하늘색도 있었고 , 물감 푼 듯 시원한 푸른색도, 블랙에 가까운 인디고도 있었을 거라는 걸 알아가게 되었다.
계단 오를 때 걸어왔던 뒷모습의 계단과 이제 오를 곳을 보듯 또 다른 모습의 아빠를 만나곤 한다.
내가 자녀를 키우면서 더 많은 파랑을 알아간다.. 이제 진정으로 아빠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깊은 초록 파랑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아빠를 이해하는 만큼 그 텅 빈 우주 같은 공간은 커져만 간다..
후회도 커져가고 , "사랑한다 감사하다". 는 말도 못 해서.
아빠 고향인
대동강변을 따라 귀가 빨개져서 뛰어가는 소년을 본다. 손을
오므리고 헐떡이던 소년 아빠까지. 가끔씩 그 푸름과 만나곤 한다. 내 이마를 짚어주던 아빠의 손길이 오늘 무척이나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