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입은 나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본다

by 프시케
감정의 실루엣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내가 입고 있던 것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른한 오후,

소파와 한 몸이 된 나를 일으킨 건 한 통의 문자 메시지였다.

눈에 보이는 신발을 대충 구겨 신고는

문 앞에 놓인 택배를 조심스레 가져왔다.

어지러이 담긴 장바구니 속,

그다음 화면으로 넘기게 만들었던 그 바지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그래, 이거지."


무심한 듯 밀어 넣어진 주름이 마음에 들어서 고른 그 바지.

디테일은 사진에서 봤던 그대로다.

그런데, 뭔가 미묘하게 다른데?


"어? 파란색 아니었나?"


화면에서는 분명 파란빛이 감돌았는데, 실제로 받아 든 바지는 청록빛에 가까웠다.

이 바지에 어울릴만한 조합을 미리 떠올려놨는데 그 이미지가 흐려진다.

다시 쇼핑앱을 켤까 망설이다가,
옷장에서 상의 몇 벌을 꺼내와
거울 앞에 선다.




블라우스를 팔에 끼우기도 전,
갸웃 짓 하는 고갯짓에
분홍색 옷자락이 목 언저리에서 살랑 흔들린다.

셔츠 단추를 채우던 손가락이
마지막 단추 하나 앞에서 멈칫한다.

파란색 구멍 너머로 단추 얼굴이 설핏 보였다가 다시 숨었다.
그리고 이내 툭 하는 소리가 바닥에서 들린다.

가디건에 한참을 머물며 쥐었다 폈다 하던 손이 바지 위에서는 방향을 잃은 듯 한 자리에서 맴돈다.
그리고 부드러움을 밀어낸다. 조용히.




입고 벗고를 반복할수록, 거울 앞에 늘어나는 옷자락들.
그리고 같이 쌓여가는 감정의 자락들.

바닥에 쌓여가는 옷만큼 비어지는 옷장

안 보였던 셔츠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작년 여름, 별생각 없이 사두었던 셔츠.

하지만 어울릴 만한 옷이 없어 한 번도 입지 못한 채, 커다란 옷걸이에 걸려 구김 하나 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거밖에 안 남았으니 대보기만 해 보자

셔츠를 얼굴에 대본 순간, 지금까지의 고민이 무색하게 세트처럼 어울린다.

완벽한 조합.



그런데도 어딘가에서 수근수근거리는 소리들이 귓가에 맴돈다.


나 봄 웜톤이잖아.

이 색은 차가운 색상이라서 안 맞지 않을까?

내 이미지랑은 좀 다른 거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셔츠 자락에서 손을 뗄 수가 없다.

불편함과 어울림 사이에서 조용히 저울질하는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본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본다.

겉으로 보면 아무 문제없어 보인다.

오히려 생각보다 잘 어울린다는 게 문제였다.

이게 아닌데

살짝, 아주 살짝 비틀어진 듯한 기분.


조금 더 천천히 그 느낌 속으로 더듬어 가보았다.




나는 늘 그렇게 살아왔다.
밝고 부드러워야 해.
따뜻하고 편안한 인상을 남겨야지.


그 생각을 별 의심 없이 입고 있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스스로 입은 생각도 있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입기를 기대받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가족, 친구, 사회, 심지어 유행하는 문화에 따라 나도 모르게 차곡차곡 입혀졌다.


그렇게 입어왔던 수많은 ''라는 이미지.


오늘 거울 속에 비친 나는, 그 이미지와는 살짝 어긋나 있었다.

이 작은 어긋남이,

잔잔한 호수에 작은 돌을 던진 것 같이 커다란 물결을 일으켰다.




감정은 혼자 튀어나오는 게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오랫동안 입고 있던 이미지 속에서 반복해서 흔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감정은,

흐릿하게 느껴지는 이미지의 그림자 속에서 올라온다.

또 어떤 감정은,

입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아니 입고 싶지 않았던 이미지에서

머리를 내밀고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처음에는 전혀 몰랐던 이미지가 살아가면서 어렴풋이 느껴지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명확하게 인식되기도 하고,
아주 가끔씩

이미지를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억지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않고.


조금은 느슨하게,

조금은 유연하게.


내 감정과,

내 안에 만들어진 이미지들과,

그 모든 흐름을 따라.

그저 느껴지는 대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 흐름이 나를 현관 앞으로 자연스럽게 인도했다.

바닥에는 짝과 떨어진 색색깔의 운동화, 낡은 로퍼, 유행이 지난 굽 높은 구두들이 뒤엉켜 구르고 있었다.


그 앞에서 구김 하나 없는 옷을 입고 텅 빈 신발장을 바라보고 있는 나

아… 이 바지에 맞출 만한 신발이 없네…


가만히 신발장을 훑던 시선이 어느새 휴대폰으로 향했다.

손가락은 쇼핑앱 위를 배회하고 있다.



어쩔 수 없네. 신발 쇼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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